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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0:46:11

꾸밈비

1. 설명2. 쟁점3. 어원 논란4. 전통 혼례의 예식인가?5. 조선시대에는 혼례에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는가?6. 결론

1. 설명

약 2005년경부터 등장한 정체불명의 결혼 관련 신조어. 정체불명인 만큼 실제로 쓰이는 의미는 명확하지 않고 다양하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측은 대개 결혼식을 올리기 전, 시댁에서 며느리가 될 여성에게 봉채와는 별도로 지급하는 명품 혹은 그에 준하는 현금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2. 쟁점

실제 전통혼례를 기준으로 신랑 측에서 처가로 납폐함을 보내면서 안에 혼서지에 더해 채단이라 하여 재물로 성의를 표하는 '봉채'라는 문화가 있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로 상호 언약의 증표를 교환하는 절차로써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꾸밈비란 곧 봉채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도 있다. 때문에 봉채라는 개념이 낯선 현대 여성들에게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재물의 교환은 이미 예단과 예물이라는 단어로 널리 전파되어 있기에 굳이 신조어를 더해 논란을 만들 필요가 없다. 더불어 꾸밈비라는 단어 자체가 어느샌가 '봉채와는 별도로 시가에서 신부에게 제공하는 사치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면서 논란이 되었다. 덧붙여 시가에서 며느리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재단하는 척도라는 기괴한 추가 서술과 더불어 300에서 500만원 가량이라는 마치 명품의 가격에 딱 맞춘듯한 구체적인 금액의 제시는 덤.

철저히 특정 부류의 입맛에 맞춘듯한 이 해석은 인터넷 여초 커뮤니티 전반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떠나 누가 봐도 편향적이며 탐욕스러운 의도가 보이는 해석이고 따라서 이러한 개념의 유행은 곧 신랑과 신부 사이에 불만의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비 신부들의 욕망과 경쟁심리를 자극한다는 점과 더불어 기존에 해당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 결혼한 사람들에게 그런게 있는지도 몰라 못받고 결혼했다는 투의 어이없는 박탈감을 주기 때문이다.

일부는 결혼의 유불리를 따져 여성의 입장을 개선해주는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 봉채가 신부 측에서 제공한 예단비용 내에서 돌려주는 규모인 관행을 볼 때 꾸밈비를 통해 추가 비용을 받으면서 본전을 친다는 것. 하지만 이 또한 애초에 예단의 의미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서술이다. 실제로 사회통념 안에서 결혼 비용 유불리를 따지면 남성의 처지는 여성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불리해진다. 여기에 꾸밈비라는 정체불명의 추가 비용을 더 내야 한다? 더군다나 꾸밈비로 들어간 돈은 어떠한 공적 의미도 없이 온전히 여성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데 쓰인다. 문화라고 주장하는 측의 의도부터가 의심스러운 부분.

이렇게 갑자기 등장한 꾸밈비에 대해 이를 곧 봉채로 여기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결혼문화라며 옹호하는 측과 여성들의 사치욕이 만들어낸 사라져야 할 허례허식이라 주장하는 측이 맞서 논란을 만들고 있다.

3. 어원 논란

사실부터 먼저 다루자면, 꾸밈비는 전통 혼례 예식과 무관한 신조어로 그 기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인된 바 없다. 어디서 발생했는지도 불명이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일단 이 단어가 갑자기 신혼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03년도이다.# 언론에서 해당 단어가 등장한 가장 이른 시기는 2005년 기사이다. 현대 결혼풍속의 변천을 다룬 학술논문에서도 '꾸밈비'의 기원을 주제로 다룬 논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글을 보면 예단 예물 봉채와는 별도로 신랑 측에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2년, 디시인사이드에서 작성된 한 게시물에서는 꾸밈비를 화류계 여성의 치장비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주장했다. 출처(욕설 주의) 이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화류계 여성의 치장을 위해 주는 돈'이 꾸밈비의 유래라는 것. 현재 발견되는 글들 중 꾸밈비가 화류계 용어라고 주장하는 게시물은 위 글이 가장 이르다. 이 글에 뒤이어 한 인터넷 기사에도 이러한 시각이 기술된 바 있는데, 이 역시 2013년 기사로 실제 단어의 등장보다는 한참 늦다.

문제는 모든 주장들에 제대로 된 근거가 단 한가지도 없다는 것이다. 정작 단어는 2003년부터 등장하는데, 이 때 어원을 제대로 설명하는 측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문화라고 주장하는 측에선 그저 '신부 꾸미라고 주는 돈' 같은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지만, 애초에 이런 의미로 오가는 재화는 '예단'이고 오히려 신부측에서 출발하는 문화다. 또한 돌아오는 신부 측의 치장비는 이미 있는 '봉채'라는 단어를 쓰면 끝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2010년대에 와서 그 정확한 유래를 입증하는 것은 옹호/비판 양측 모두 불가능하다. 애초에 옹호파든 비판파든 의견이 모아지지도 않고 제각기 카더라 식의 주장만 덧붙일 뿐이다. 사상이나 성별의 갈라치기라고 보기도 어렵다. 화류계용 용어라고 주장하는 측은 디씨/일베 성향도 있었지만 보통의 정상적인 답변자도 있다. 게다가 꾸밈비란 말에 별 거부감이 없는 신랑 측도, 꾸밈비란 말을 잘못 꺼냈다가 파혼을 당한 사례도 있다면서 이러한 문화를 비판하는 신부측 답변자도 얼마든지 있다. 결국 아전인수 식으로 저 좋을대로 갖다붙이기 나름이라는 것.

다만 언론사회 분야에선 이를 대체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꾸밈비란 말이 다뤄지기 초반인 2006년에 이미 한 결혼정보매체의 기사에서 꾸밈비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2011년도에 꾸밈비를 다룬 프로그램이나 인터넷 기사에서도 역시 꾸밈비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4. 전통 혼례의 예식인가?

일각에서는 꾸밈비가 전통이라거나, 혹은 꾸밈비의 역할을 하는 다른 무엇이 과거에도 양반들의 문화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축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혼례라는 것이 무슨 법제화처럼 딱 정해놓은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기 때문에 있었을 만약의 가능성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사료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한 그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없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수준에 불과하다.

일단, 전통혼례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예기(禮記) 혼의(婚儀)에 나오는 육례(六禮),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의 6단계이다.
납채(納彩:혼례 예단)
문명(問名:신랑이 신부 측에 사람을 보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어보는 것)
납길(納吉: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게 혼례 날짜를 알리는 것)
납징(納徵: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갖가지 선물)
청기(請期:신랑이 신부 측에 혼례 날짜를 알리고 허락을 받는 일)
친영(親迎: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를 거행하는 일)

이외에는 문헌통고(文獻通考) 개원례황제납후의(開元禮皇帝納后儀)에서 임헌명사(臨軒命使)·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고기(告期)·명사 봉영(命使奉迎)의 단계가, 두씨통전(杜氏通典)에는 납채 대신에 납후(納后)로 대체된 형태의 혼례방식이 나타난다. 조선 중대까지 내려가면 혼례는 더 간단해져서 대명회전(大明會典) 친왕혼례(親王婚禮)를 보면, 납채·문명·납길에 관한 의절은 전부 빠지고 오직 납징 예의(納徵禮儀)만을 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납채 이하 문명·납길 세 가지 예는 한 번에 처리했다는 것이다. 이를 정친(定親)이라고 한다.[1]

이리저리 어려운 용어가 많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납징 단계에서 꾸밈비의 기능을 하는 무언가가 있었을 가능성만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며, 설령 존재했다고 한들 이것이 현대 꾸밈비의 직접적인 선조라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5. 조선시대에는 혼례에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일각에서는 조선시대에는 혼례에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하여 꾸밈비를 비난하는 근거로 삼으나, 이 역시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전통사회에서 결혼 단계에 재물이 오가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조선왕조실록에도 혼수품이 서로 오갔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다량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성종 대에는 '집안이 가난해 예를 갖출 수 없는' 이들의 결혼을 돕기 위해 예조를 통해 쌀과 콩 10석을 섞어 혼수품으로 쓰도록 하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재물을 갖춰 혼수로 삼는 것이 예의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2]

세종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황희의 딸도 시집가는 날이 코앞인데 예복은 커녕 시부모님 드릴 이불 한 채도 마련하지 못해 곤란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행히도 세종이 이를 듣고 결혼을 앞둔 가난한 처녀들에게 혼수품을 지급하여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런 혼수품들은 단순히 쌀과 콩 수준에 머무른 것도 아니다. 성종 13년의 기록에는 사족의 집에서 혼인시에 혼수품을 100여가지 이상 요구하는 등 지나친 혼수품 요구로 인해 가난한 자의 혼례가 막히는 일을 우려하는데, 이를 보아 이미 이 시기에도 다양한 재물들이 혼수품으로 요구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 혼수품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 전체를 통해 확인되며 대개는 과도한 혼수 요구를 경계하거나 혼수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혼수를 지급하라는 내용이다.[4]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 가능한 마지막 혼수에 대한 기록은 19세기인 순조 대의 기록이며 혼수품이 중인 열 가구의 재산을 넘는 경우마저 있다는 지적이 등장한다.[5]

명심보감의 구절인 '혼인의 일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이다'( 명심보감 치가편(治家篇))를 인용해서 조선시대에는 재물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하다. 명심보감 자체가 조선에서는 아무리 빨라도 19세기에나 등장하는 서적이고,[6] 명심보감 이전에 조선에서 이렇게 재물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다.

6. 결론

결국 꾸밈비는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고 정의내릴 수 없고, 분쟁 역시 해당 단어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냐의 문제다. 상기한대로 아전인수 식으로 저 좋을대로 해석하기 일쑤라 싸움이 되는 것. 하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여성들의 재물에 대한 탐욕에 기댄 해석이라는 점은 명백히 비판받을 부분이며, 이렇게 근거도 유래도 불분명한 문화는 결국 이런 행위로 가장 이득 보는 건 누구인가? 를 생각하면, 결론은 웨딩업체들이 지어낸 소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경제적 불황으로 봉채/예단 생략은 물론 결혼식조차 축소되는 추세인 현재는 해당 개념에 대한 논란이 거의 사그러든 상황이다. 쓸데없는 절차로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이를 아껴 신혼부부의 집값에 투자하는 것이 그들의 앞날에 보다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개인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개인 욕심에서 비롯되어 실제로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이는 결혼하는 부부 당사자와 양가 집안의 충분한 대화와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1] 定親의 정확한 의미는 추정에 불과.[2] 성종 18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5월 7일(계묘) 5번째 기사[3] 성종 141권,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5월 3일(신미) 1번째 기사[4] 정조 7권,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2월 4일(기미) 2번째 기사[5] 순조 34권, 34년(1834 갑오 / 청 도광(道光) 14년) 2월 30일(을축) 1번째 기사.[6] 원 서적 자체는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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