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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7 13:51:06

김종용


목 차

1. 개요
2. 상세
3. 전국대리기사협회
4. 생애
4.1. 창살에서 또다른 서른의 아침을 꿈꾸다
4.2. 돼지고기 떼먹는 미국넘들 물러가라~
5. 대리운전 현장 보고서
6. 공정사회와 약자동행

1. 개요

김종용은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 회장이다. 그리고 바로민생연구회(가칭)을 준비 중이다.

2. 상세

김종용은 2011년 어찌어찌하다가 대리기사가 되었다.
당시 진행 중이던 사업이 흔들리며 하루하루 피말리는 아픔 속에서 무엇이건 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게 대리기사, 꼬옥 한달만 하겠다고 아내에게 굳게 약속했건만....

하지만 그에게 대리운전시장은 신세계였다. 뭐 좋은 의미의 신세계가 아니라, 노동운동도 하고 깜빵생활도 겪은 그로서도 50인생의 절반을 잘못, 또는 모르고 살았다고 할 만큼 대리운전시장의 형편은 터무니없었다.
20퍼센트가 넘는 고율의 수수료에 콜취소벌금, 프로그램비, 이중삼중의 대리보험료, 업자들의 일방적 배차제한 등의 횡포를 겪으며
어찌어찌해서 소위 대리기사 권익운동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자식이 당장 밥 굶고 쫓겨날 처지에 놓여있건만 이 철없는 김종용은 어느덧 대리 권익판에서 벗어날 수 없을만큼 되버렸다.
물론 본인이 던져버리고 나가면 그만이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3. 전국대리기사협회

김종용은 자신들 싸이트에 다음과 같이 전국대리기사협회를 소개하고 있다.

3.1. 협회 탄생

[kakaotv(439337956)]
사단법인 전국대리기사협회는 대리기사권익운동과 함께 탄생 성장해왔습니다.
2010년대 초반, 고율의 수수료와 각종 기사장사, 일방적 배차제한 등, 대리운전시장의 부당한 풍토에 맞서 헌신적 활동을 펼쳐가던 대리기사들은 그 성과를 모아 2012년 전국대리기사협회를 결성하였고, 그 활동을 인정받아 업계 최초로 당국으로부터 사단법인과 비영리민간단체 인가를 동시에 받아냈습니다.

3.2. 협회 활동과 성과


협회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회의 활동 및 각종 정무사업, 대리운전업법 제정과 대리운전뉴스 발간 등, 각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가며 대리운전시장의 현실을 공론화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과 해법을 추구해왔습니다. 또한 법정투쟁을 통해 업자들의 부당한 방해를 막아내고 렌터카대리보험문제도 해결했습니다.

수년간의 활동을 통해 드디어 이동노동자쉼터사업을 성사시키고 대리기사마스크 배포확대, 고용안정지원정책 추진 등, 대리기사의 복지와 사회안전망 강화라는 유례없는 성과도 이뤄냈습니다.
또한 유튜브등 각종 온라인사업을 통해 홍보와 조직확대사업도 꾸준히 전개하고 있고, 협회 온라인뉴스레터인 전국대리운전뉴스는 2023년 현재, 250호까지 발간되면서 대리업계를 대표하는 플랫폼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비맥주와 다트협회 등 사업체들과 매년 음주운전방지캠페인을 벌여나가며 대리운전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협회활동은 물론, 대리기사의 권익과 업무환경은 열악하기만 합니다.
법적사각지대와 불합리한 풍토에 놓여있는 현실은 소비자와 대리업체, 그리고 대리기사 간 끝임없는 시장의 분규를 낳고 있고 업계 종사자 모두의 사회 경제적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묵묵히 꾸준히 실천해가며 공정시장과 처우개선, 그리고 사회안전망강화와 양질의 대국민 서비스를 위한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저희는 고대합니다. 보내주시는 배려와 응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4. 생애

김종용은 1958년 인천 부평에서 4남2녀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경찰악단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4.19 후 퇴직하고 서울 금호동 산동네로 이사와 살면서 그의 고달픈 가정생활은 시작되었다.

고3, 형이 사고사 당하고, 금호동 시장바닥에서 노점상을 하며 살림을 꾸려온 어머니가 고3 추석날 새벽에 돌아가시는 등 집안 형편은 다 무너졌지만 다행히도 그는 어찌어찌 서울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당시 수의학이나 수의사란 그리 인기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가난에 찌들던 집안의 그로선 더없는 행운이었다.
어쨋건 그의 형들이 공부는 다 잘해서 서울대를 다니는 것을 보면서, 어려운 집안환경이지만 금호동 산동네에서도 공부를 잘하면 대학을 다닐 수 있구나 하는 꿈을 가질 수 있었다. (글타고 뭐 사실 공부를 열심히 했거나 썩 잘하진 못했다 ^^)

당시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을 접하며 부평에서 야학을 시작, 노동운동의 길목에 들어서게 되었다.

4.1. 창살에서 또다른 서른의 아침을 꿈꾸다

조무라기 빵잡이 이야기
https://brunch.co.kr/@drmanzok/33

마치, 신선한 산공기라도 느껴지는 듯 합니다.
비록 감방 복도를 건너 비쳐지는 햇살이건만, 이렇듯 눈부시다니...

손발을 묶던 수정 하나 없다고 몸이 살아납니다.
며칠 내동댕이쳐지고 묶인 채, 먹지 못한 몸이건만 서른살 새벽을 맞는다는 마음때문이었을까요?
문밖 교도관이 말해주지 않았더면 몰랐을 내나이 서른의 새벽...

" 서른살, 눈...부시다 "

1987년 새해, 안동교도소 먹방 징벌사동입니다.
정권 말기의 집권 연장을 노리는 전두환정권에 맞서 사회 곳곳의 시민저항운동이 들불처럼 타오를 때, 감옥안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갇힌 자들의 투쟁은 더욱 처절하고 위태롭기만 합니다. 그나마 바깥 정치가 유화적일 땐 교도소 생활이 풀리고 투쟁도 먹혀들건만, 워낙 명운을 걸고 밀어부치는 정권의 말기 증상은 극악한 탄압과 고통뿐입니다.

안양교도소 투쟁으로 꽁꽁 묶여 이곳 경상북도 풍산 안동교도소로 이감되온지 며칠 째, 지방 교도소라서 그런가, 교도관들의 주먹질은 더욱 무지막지 합니다.

0.9평 독방의 감방문을 마주하고 갇힌 자와 무리 지은 경비교도대의 살기찬 대치는 몇분 안가 진압되버립니다. 포승줄로 짓묶이고 우악스러운 손길로 지하 감방에 내동댕이들 쳐집니다. 단 몇분도 지나지 않아 묶인 팔목은 굳어오는데 감시자들의 거친 숨결만이 세상을 이어줍니다.

며칠이나 되었을까요. 손과 발은 뒤로 묶여 개밥처럼 던져진 음식도 거부한 채 보낸 며칠,
새해 첫날 새벽이라고 풀어준 조막만한 감시창은 24시간 조명으로 밝은 징벌방보다 더욱 눈부신 바깥 풍경을 보여줍니다.

"달라진 삼십년, 여전한 삼십년"

그렇게 서른살 새벽을 맞습니다.
묶여 겪는 고통이 참담해서일까요?
참혹한 현실을 딛고 일어나겠다는 각오가 가득합니다. 아. . 또 다른 서른의 아침,, .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내손에 아직도 시퍼런 포박자국에 이슬이 맺힙니다.

30년이 흘렀습니다. 돌이켜보면 경직된 세상에서 경직된 열정과 의기룰 잃지않고 살려한 세월입니다.
뒤돌아보면 훅~, 낯 뜨거운 사연도 많고 부족함 많은 세월이었건만

오늘은 늙은 대리기사, 이런 모습으로 그날을 맞습니다.
그 시절 바람 심한 경상도 안동 풍산 산속 교도소에서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면,
이제 서울 강남 새벽 거리에서 웅웅대는 낡은 메가폰 들고
대리기사 생존권 사수를 외쳐대는 모습으로 맞이합니다.

아...또 다른 30년을 기대하기엔 너무 세월이 나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세상은 열려진 사회가 되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문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은 그 시절 의기와 열정으로 여전하듯 세상 불평등과 가난한 자들의 불행은 여전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그 시절 0.9평짜리 독방보다는 훨씬 드넓은 세상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밧줄 하나에 매달려 목숨을 담보로 독재타도를 외쳤다면, 오늘은 촛불 집회니 각종 정치집회를 목숨^^ 걸 걱정없이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세월, 남은 날들을 좋은 일 하며 곱게 늙어가길 바래야 할까요...
대리기사 권익운동에 매달린지 6년, 이것 하나만이라도 잘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의 천분의 일만큼이라도 세상이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다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 우리 아들과 아내의 가장 노릇 해야겠습니다.

4.2. 돼지고기 떼먹는 미국놈들 물러가라~

https://brunch.co.kr/@drmanzok/216

잉?...이게 멍미?
그게 2사동이었던가요? 하도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진 않군요.

교도소의 저녁밥은 일찍 나옵니다. 내 기억에...4, 5시면 소지들이 복도에서 "배식!~" 외치며 짬밥을 풉니다. 사실 바닥을 박박기며 노동판을 헤매던 시절의 먹거리보단, 갇혀지내는 교도소 짬밥이 더욱 괜찮습니다. 비록 히멀건 국이지만 따뜻한 보리밥에, 김치와 몇몇 반찬을 받아놓고 영치금이라도 남았다면 닭파우치니, 사식들을 시켜서 그러저러 한끼 식사가 됩니다.

그때, 건빵 덩어리에 마가린과 설탕 쳐녹여먹던 깐식이 왜 그리도 맛있던지...단식투쟁이라고 할 땐, 사실 그 맛이 온통 머리를 휘젓고 다녀 죽어버릴 뻔했지만...^^ 암튼~

가끔 특식 비슷한 게 나오는데 그래봤자 일주일에 한두번씩 나오는 돼지찌개입니다. 그런데 국그릇을 박박 저어봐도 고기건더기는 이미 출장 간지 오래입니다. 원래 돼지고기 덩어리가 정량 나와야하는건데, 윗놈들이 다 떼먹는다나 머라나...

불쌍한 돼지고기 복권을 위해~

그럴 때면 학생(양심수니 정치범의 다른 표현입니다^^) 들의 샤우팅이 철창 사이로 터져나옵니다.

" 돼지고기 떼먹는 미국넘들 물러가라~"
" 돼지고기 다 죽었다, 교도소장 물러가라~"

미국넘들과 교도소장이 동급으로 처리됩니다. 고 역적놈들만 처단하면 아마 우리 교도소 죄인들은 물론 북녘 동포들도 온통 꿀꿀이로 배 가득 채울 수 있을텐데요...주길넘덜~

1980년 중반, 엄혹했던 그 시절, 깜방에 끌려와 머리박던 젊은 양심수들은 그런 짓 하면서, 교도소 시계를 깨부셨습니다. 사실 당시 빵깐, 특히 지방의 빵깐은 운동권의 웰빙천국이었습니다. 온갖 그룹의 우두머리들이 다 잡혀들어와있으니 더욱 찐하고 '치열한' 사투의 현장이 되곤했고... 물론 가끔 바깥 정치상황에 맞춰 투쟁하다 깨지면 지옥으로 돌변했지만..

마치 경쟁적으로 어디서 북한 주체사상 원전들이나 조악한 김일성장군 항일혁명투쟁사, 단파라디오 등등을 들여와서 돌려보며 학습하고 토론하고... 간밤 라디오방송을 녹취해선 자신들 파벌끼리 회람하곤...

다른 파벌들은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이니 모택동이니, 좀더 고상한 저작물들로 대신하고...
그런 분위기였으니 불쌍한 돼지고기는 서로서로 충성심을 확인하는 애꿎은 소품이 되곤 했던거지요.

- 그들은 다 어디가 있을까~

어쨋건....
어제 광복절을 앞두고 민노총이니 하는 단체들이 노동자대회를 열고 주한미군 철수, 한미연합훈련 반대, 등등의 반미투쟁을 자랑차게 벌여나갔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대리노조니 하는 불쌍한 분덜은 안보이긴 하더만...

자주 민주 통일, 완전 중요합니다. 방해하는 토착왜구가 어디 살아있다면 에프킬라라도 들고가서 박멸해야 합니다.
돼지고기 떼먹는 미국넘들은 뜯다만 족발로라도 휘둘러 처죽여아겠지요.

그런데, 그때 그 샤우팅을 하고서야 짬밥을 입에 털어넣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가 있는 걸까요? 분명히 한넘은 대리판에서 대리기사 하고 있는 건 알 것는데.....

혹시 8천명 민노총 집회참여 조합원들 속에서 빙의 되어있는 걸까요? 혹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영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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