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김책의 차남으로 한때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에 이르렀으나 1969년에 숙청되었다.
2. 생애
1928년 1월 13일에 태어났다. 북한인명사전에 따르면 소련 육군대학을 거쳐 1951년에 19사단 산하 35여단장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소련 유학을 갔다가 소련 여자와 결혼해서 귀국했으나 북소관계가 악화되면서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자식들은 모두 소련으로 일방적으로 추방당했다.유영구 기자의 남북을 오간 사람들에 따르면 5.16 직후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 5월 17일에 열린 상무위원회 회의에서[1] 남한 사정에 대한 김일성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다가 "도대체 뭘 하고 밥먹는거냐. 너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도대체 일본새가 왜 그 모양이냐."라고 김일성에게 엄청나게 털렸다고 한다.
1966년 중장 계급으로 민족보위성 정찰국장에 임명되었으며, 민족보위성 부상을 겸했다는 정보도 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허봉학, 김창봉과 함께 대남도발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1.21 사태를 직접 지시한 것이 바로 김정태였다. 1968년 11월에 체포된 무장공비 정동춘과 고등운도 10월 28일에 김정태로부터 직접 남파임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1968년 9월에 공화국영웅을 받았다는 정보도 있으나 김책에게 공화국영웅이 추서된 것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1969년 1월, 허봉학, 김창봉 숙청 때 이들과 같이 조사를 받았고 전쟁준비라는 명목으로 경보병, 특수배들 대대적으로 편성하여 훈련을 빙자하여 간부들을 납치하고 민가를 습격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려 민심의 원망을 산 혐의가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부업농장으로 삼고 특수부대 휴양소를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처녀들을 납치하여 능욕하는 등 각종 대민범죄를 저지른 것도 드러났다. 결국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북한에서 밝힌 바로는 3년 간 혁명화를 당한 후에 다시 복권되어 대흥총국 부총국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 이후 조용하게 살다가 1987년 11월 12일, 대흥총국 부총국장 재임 중에 사망했다. 북에서 관련 동정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1969년에 숙청된 이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대흥총국 부총국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업(서울: 도서출판글, 1993).
- 이대근,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 김정일 시대 선군정치와 군부의 정치적 역할(파주: 한울아카데미, 2003).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원문은 정치위원회로 적고 있으나 1961년 9월 4차 당대회 소집 이전에는 상무위원회였으므로 오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