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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1:08:20

김정주(1903)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참고문헌

1. 개요

金貞周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03년 4월 16일,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 황산리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9년 소학교에 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하였고, 다시 1915년까지 자연과학을 공부한 후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 영변 중학교로 진학하였다. 1924년까지 개인 방직공장을 운영하다가 동아일보 기자로 취직하였다.

1925년에 일본으로 유학, 정치경제대학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고 일본에서 철공소를 운영하다가 1923년 9월, 천도교청년당이 창설되면서 여기에 가입, 조선인 대학생 조직 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에 중앙위원까지 올라갔다. 당시 천도교 중앙조직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는 극심한 혼란상이었는데, 1931년,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이 합당하여 천도교청우당을 조직했지만 나중에 다시 분열되었고, 당시 친일 관제조직으로 전락한 상황이라서 결국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흡수당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주는 1930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농민협회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1937년부터는 계속 상업에 종사했다.

해방 이후 봉산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영변군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인민위원회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천도교청우당 재건에 참여하여 1946년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조직되었을 때 중앙위원회 위원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8월부터 10월까지 청우당 대표단원으로 소련에 다녀왔다. 소련으로부터 김달현 다음가는 당의 2인자로 평가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초대 체신상에 선출되었다.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조국전선 성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3년 1월 25일 5시 45분에 만성 심근염증으로 인해 만 4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후임 체신상으로는 박일우가 임명되었다. 애국렬사릉 조성 이후 체신상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