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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6 17:12:04

김영국(군인)

<colbgcolor=#000><colcolor=#fff> 김영국
金榮國
출생 1928년 12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사망 1951년 9월 2일
강원도 철원
복무 대한민국 육군
최종계급 육군 대위
복무 기간 1950~1951
1. 개요2. 생애 및 군 경력 3. 공훈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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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영국(金榮國, 1928년 12월 1일 ~ 1951년 9월 2일)은 대한민국의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

2. 생애 및 군 경력

김영국은 1928년 12월 1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에서 출생하였다.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10월 9일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하였다. 군사 교육을 마친 뒤 1950년 12월 9일 육군 소위로 임관, 제2사단 32연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투입되었다.

1951년 6월, 국군 제2보병사단은 김화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방어 및 수색 작전을 수행하였다. 8월 2일부터 8일까지 치열한 공방전 끝에 734고지를 확보한 후, 제2보병사단은 제32연대에 진지를 인수하여 방어를 담당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 김영국 중위가 지휘하는 7중대는 연대 수색중대와 함께 734고지 전진거점을 담당하며 적의 공세에 대비하였다.

1951년 9월 1일, 중공군 제80사단 239연대는 73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2대대장은 각 중대에 734고지를 반드시 사수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김영국 중위는 부하들에게 적을 최대한 가까이 유인한 후 섬멸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대 규모의 적군이 계속 밀려오며 전투는 치열해졌고, 국군은 9부 능선까지 후퇴하며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대 OP(관측소) 사수를 결심한 김영국 중위는 적진으로 돌입한 김영제 하사가 전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직접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6명의 적을 사살하고 기관총 1정을 탈취하며 전투를 지속하였으나,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김영국 중위가 전사한 후에도 7중대의 잔여 병력은 끝까지 거점을 사수하였고, 9월 9일, 제6중대가 역습을 감행하여 734고지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영국 중위와 7중대의 결사항전은 734고지 방어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 트루먼 미 대통령, 유엔군 사령관, 미 제9군단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영국 중위의 희생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으며,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2회)을 추서하였다. 또한 2020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를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3. 공훈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 (1951년, 2회 수훈)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2020년 2월)

4. 참고 자료

국방부, 『호국의 별』 1권, 1975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6.25 전쟁영웅 김영국 육군 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