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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교육감)/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김석준(교육감)
1. 개요2. 우암동과 감만동의 어린 시절3. 학창 시절4. 대학 시절5. 사범대 교수시절과 80-90년대6. 정치 활동7. 제16-17대 부산광역시교육감8. 퇴임 이후

1. 개요

김석준(교육감)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우암동과 감만동의 어린 시절

1957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부산에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우암동과 감만동의 골목길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장남에 장손이었기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특히 엄격하셨다. 당시엔 집집마다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물지게를 지고 물을 뜨러 다녔는데, 그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쉼 없는 성실함과 끈기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철저히 지켜냈던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 어른이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기본이 성실하고 끈기 있는 사람’,‘무슨 일이든 맡으면 책임감 있게 해내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때가 많았다고 회고한다. *출처: <문제는교육이야-김석준 지음>

3. 학창 시절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반장을 맡았다. 3학년부터 선거로 반장을 뽑았지만 큰 무리 없이 당선되었고 6학년 때는 전교회장까지 하게 되었다.혼자 조용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한 운동장에서 뛰어놀기와 달리기와 축구 등 모든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초등학교학교 핸드볼 팀의 주전으로 뛰기도 했고, 중학교 때는 탁구, 고등학교 때는 축구선수 및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부산고등학교 입학후에는 입시공부에 찌든 현실속에서도 고교시절을 뜻깊게 보내고 싶어했던 의욕많은 친구들과 함께 독서회 활동에도 참여하며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과 꿈을 키워나갔다. *출처: <문제는교육이야-김석준 지음>

4. 대학 시절

대학 신입생이었던 1975년 5월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해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고, 이런 조치를 비판하는 행위조차 처벌하도록 규정한 초법적 조치였다. 김석준 교육감이 대학 3학년이었던 1977년은 서울대 사회학과가 설립 30주년을 맞는 해였다. 그래서 사회학과 학생들은 10월 학교 축제에 맞춰서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심포지엄 발표자로 선정됐던 김석준 교육감과 여러 친구들의 도피생활이 시작된다. 훗날 그날의 시위는 서울대 사회학과 심포지엄 사건’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유신정권 말기의 숨 막히는 대학가의 상황에 숨통을 틔워주고,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이어 일어나는 도화선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절 가장 존경하는 학문의 스승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신용하 교수와 김진균 교수를 꼽는다. 신용하 교수님이 학문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분이라면, 김진균 교수님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라고 회고한다

당시에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꼭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공부를 통해서 민주화 운동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더 컸다. 사회학과 대학원 과정을 미국으로 유학 가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래서 수업의 내용도 미국의 주류 사회학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의 미국식 사회학 일변도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우리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사례 또는 우리의 역사적 경험을 통한 고찰 등 실질적으로 한국사회에 필요한 사회학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문제의식을 적극 지원하고 지도해준 분이 신용하 교수였고 80년 봄에 신용하 교수가 만든 한국사회사연구회의 초대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또한 김진균 교수는 ‘관운장’이라는 별명만큼이나 풍모가 준수하고 인품 또한 넉넉한 분으로 40대 이후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나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실천에 앞장서신 보기 드문 분이었다고 김석준 교육감은 기억한다.

5. 사범대 교수시절과 80-90년대

당시 대학가에는 졸업정원제가 도입되어 3, 4년의 짧은 기간 동안에 학생 수가 2배 이상 늘어났다.그에 따라 대규모의 교수 충원이 필요했고, 연구경력 3년 이상이라는 최소요건만 충족되면 전임교수 지원 자격이 주어졌다. 그는 석사과정 2년과 박사과정 1년, 국립대 조교 2년, 강사생활을 1년을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된 상황이었다. 대학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추진한 졸업정원제라는 졸속한 정책이 오리려 좋은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됐다.

이로써 당시 김석준 교육감은 부산대학교 사범대 일반사회교육학과 전임강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때 당시 나이 만 26세밖에 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부산대학교 최연소 교수라는 타이틀까지 달게 되었다.

임용과 함께 83학번의 지도교수를 맡게 되었는데 당시 학생들에게 주고 싶은 것도 많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기에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특히 운동권, 혹은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던 학생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는데 이런 학생들은 학교에서 다른 교수들로부터 구박을 받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본인이라도 작은 방패막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석준 교육감은 그런 학생들과 근교 산을 등산하기도 했고, 수배를 받고 쫓기는 학생을 본인의 연구실에 숨겨주기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80년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국민들의 요구와 노력에 의해 민주화를 이루었고,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 시기에 학계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와 참여가 있었다. 그는 그때 서울대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연구와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서울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대부분이 모두 지방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모여 각자의 연구 성과들을 쉽게 나눌 수 있었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구주제를 통해 지역학술운동의 발전에도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었다. 이때 함께했던 장학자들은 훗날 제3세대 학자로 불리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학술연구 집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6월 민주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후에 대학민주화를 고민하던 교수들이 모여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를 조직했다. 부산지역 교수들도 함께 모여 민교협을 만들었고, 1988년 11월에는 부산경남민주화교수협의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부산경남민교협의 초대총무를 맡아 민주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민교협 기획강좌 등을 기획하고 실무적인 일들을 챙기느라 전보다 더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80년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1981년에 시작한 박사과정을 1992년 8월, 거의 데드라인을 채우고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제출한 「경제 변동에 대한 지역사회의 계급적 대응: 1980년대 산지역을 중심으로」라는 학위논문은 다음 해에 『부산지역 계급구조와 변동』이라는 제목의 일반학술서로 출판되었고, 지역사회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 지역사회 연구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대학교수들을 주축으로 지역연구자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사회학,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모여 눈으로 보고 직접 경험한 사회의 의미 있는 변화를 보다 큰 틀에서 바라보고,사회적으로 필요한 실질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할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만들어진 모임이었다. 이미 1985년에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대구의 ‘지방사회연구회’를 모델로 하여 부산경남의 연구자들이 모여 1988년 4월에 ‘지역사회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지역사회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연구발표회를 통해 지역사회의 현안 문제에 대해서 또는 개별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92년에 박사논문 제출후 ‘부산지역’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차에 ‘지역사회연구회’에서 함께 연구 활동을 했던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노동문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 영남노동운동연구소다.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연구자들이 주가 되는 다른 연구소들과 달리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변호사와 노동문제 전문가를 비롯한 연구자들과 현장의 노동조합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간부들이 함께 참여하여, 노동현장의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출범을 했다. 연구소 출범 이후 김석준 교육감은 8년 동안 소장직을 맡아 활동을 했고, 2006년 연구소가 문을 닫을 때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1994년에 문을 연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해산될 때까지 12년간 지역노동운동의 발전에 나름대로는 뜻있는 일들을 많이 해왔다. 특히 연구소가 발간한 산별노조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책자는 산별노조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 노동운동의 척박한 토양 속에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국내외의 여러 사례들과 연구자들의 관점과 대안이 제시된 연구결과나 각종 연구 자료들은 노동현장에서 교육이나 홍보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또한 학술적으로 부산의 오늘과 미래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만, 부산 사람들의 부산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컷기에 부산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고 다니며 만든 『김석준, 부산을 걷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부산 사람들이 먼저 부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부산을 생각하고 부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은 작은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산업의 발전과 함께 번성하는 도시의 이면에서 소외되고 버려졌던 것들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던 그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저서다.

이후 동항초등학교, 동아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1981년 만24세에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학원 시절 미국식 주류 사회학을 거부하고 한국적 사회학의 필요성을 주창했다고 한다. 석사를 마치고 2년 후인 1983년, 박사 학위가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26세의 나이에 부산대학교 사범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 당시 전국 최연소 교수 임용이라고 한다. 교수가 된지 9년 후인 1992년 서울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구 실적도 딱히 없는데, 이른 나이에 학위도 없이 최연소 교수가 된 배경을 궁금해 하는 경우가 많다.[1]

이후 30년간 교직에 있으며 연구실과 강의실보다 오히려 현실 정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수 시절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89년 전교조가 창설되었을 때, 이에 최초 가입한 64명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1994년 부산경남지역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영남노동운동연구소를 창립하여 본인이 소장을 맡았다.

6. 정치 활동

1997년 민중당 해산 이후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주도하여 창당한 건설국민승리21 창당에 참여했다.

1999년 부마항쟁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해 박정희의 3선 개헌과 독재를 비판하고 전태일 분신사건이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2000년 건설국민승리21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여 8년간 몸담았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민노당은 창당된 이듬해에 치르게 된 선거라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김석준은 부산시당에서 2001년 11월 일찌감치 후보로 내정되어 민노당에서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 당시 민노당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2002년 5월에야 발표한 것을 보면 민노당 부산시당에서 김석준의 입지가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선거에서 그는 토론회에 참여해 논쟁을 펼치며 한나라당은 성장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며 복지, 사회권, 환경, 노동, 공무원 노조 등을 내세으며, 노동자 보육시설 확충, 공무원 노조를 통한 공직사회개혁, 환경을 파괴하는 KTX 부산-대구 구간[2] 전면 백지화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시 토론회에서 복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했으나, 정작 복지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못했고 다만 복지 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만 반복했다. 당시 선거에서 그는 민주노총 부산본부 등 노동계와 부산 시민단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16%의 지지율을 얻어 3위로 낙선했다. 낙선했지만 민노당에서는 이러한 선거 결과를 성공적이라고 자평했다. 한나라당 안상영 후보가 압승을 거둔 가운데, 민주당 한이헌 후보의 19%와 불과 3% 밖에 차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차기 선거를 노려볼 만 하다는 평이 나왔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여 식상함으로 지지율이 첨차 떨어졌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정국 속에서 총선 때 금정구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부산시장 선거에서 16%대의 지지율을 받은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노무현 탄핵 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80%의 지지율(호감도)를 얻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선거가 시작된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10% 내외의 지지율을 보였고 결국 9.57%의 지지율을 획득하며 3위로 낙선했다. 김석준은 노무현 탄핵만 없었어도 80%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탄핵 역풍으로 인해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면서 패했다고 주장했다.

총선 참패 이후에도 김석준은 민노당 부산지부의 언터처블 1인자였지만, 총선에서 9%로 참패한 여파로 당 내외에서 그의 입지는 크게 타격을 입었다. 2004년 6.5 재보선에서도 부산시장 후보로 민노당에서는 김석준과 견줄만한 인물이 전무했기에 언론에서는 이구동성으로 그의 출마를 점쳤지만 총선의 참패의 충격이 거론되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민노당 지지 언론인 오마이뉴스는 김석준이 불출마한 것에 대해 쩐의 문제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비록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김석준과 민노당 부산시당은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를 공개 지지하며 허남식 한나라당 후보의 동성게이트 연루 의혹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쳤지만, 결국 허남식 후보가 62.3%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총선에는 참패했지만 2004년 7월 민노당 부산지부장으로 압도적 표차로 재선출되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지도부는 대폭 물갈이되었다. 김석준은 2006 지방선거에서 수십명의 후보를 내고 2012년에는 부산에서 집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04년 하반기에는 도룡뇽을 보호하기 위해 KTX 부산-대구 구간의 원효터널 공사를 반대하는 지율 스님의 단식 투쟁에 적극 동참했다. 이미 이전에 부산시장 선거 때부터 김석준은 환경을 파괴한다며 KTX 부산-대구 구간 전면 백지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또 2004년 하반기에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동참했다.

2005년 6월, 오는 11월에 부산에서 치러질 APEC 정상회의와 조지 W. 부시를 반대하기 위해 부산지역 33개 시민단체를 연합하여 'APEC 반대, 부시 반대 부산시민행동'을 결성하고 공동대표에 취임했다.이후 APEC 정상회의 및 미국을 반대하는 부산 지역 시위를 지휘했다. 11월 APEC 정상회의가 열리자 반APEC 시민행동이 주도하는 시위가 부산 곳곳에서 대규모로 열려 무려 10만여명이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 # APEC 시위대 10만명은 누구. 당시 APEC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무현산성이라 불리는 컨테이너 차벽을 설치하는 등 평화 시위라고 주장하는 김석준의 주장과 달리 시위는 폭력으로 얼룩졌다.

2006년 부산시장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다시 출마했으나 또 낙선했다. 지난 지방선거 때보다 지지율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이후 계파 갈등으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진보신당 상임선대위원장 겸 부산선대위원장이 되었다. 상임선대위원장이 된 후 기자회견을 갖고 이명박 정부의 폭주를 견제하고 교육대란, 집값대란, 의료대란, 일자리대란, 대운하 환경 대란 등 5대 재앙에 맞서기 위해 진보신당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아울러 김석준 본인은 그동안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는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선하여 국회로 진출하는데는 실패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 당시 MBC 여기자가 정몽준 한나라당 후보에게 “오세훈 시장은 사당 뉴타운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질문하자 정몽준 후보가 질문을 거절하며 뺨을 건드려 수치심을 느꼈다고 주장하여 성희롱 논란이 일었다.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김석준은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희롱을 일으킨 정몽준 후보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후 진보신당 부산시당위원장이자 시장 후보로 2010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했으나 민주당과의 단일화 과정에서 후보를 사퇴했다. 당시 진보신당 중앙당의 야권 단일화 불참 결정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섰던 심상정 후보가 단일화에 참여했고, 부산에서 민주당과의 전면 단일화를 실시하여 당내에 파문을 야기했다.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 합류해 부산지역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7. 제16-17대 부산광역시교육감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부산교육감 진보단일후보가 되어 34.67%의 지지율로 현직 교육감임혜경 후보[3]를 꺾고 당선되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범보수단일후보인 김성진 후보를 누르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교육감 재임 기간 교육계와의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교육계 전체가 그와 갈등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산지부와 공무원노조, 민주노총 부산본부, 학교비정규직노조, 학부모연대, 풀뿌리네트워크 등 부산지역 교육, 시민사회단체 등이 공개적으로 김석준 지지를 철회했다. # 부산 교육계에서는 최근 김석준 교육감의 독선적 운영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한 교육청 직원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직무수행도, 청렴도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며 안팍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이외에 진보 교육감 특성상 특목고를 축소하고 준특목고인 과학중점고등학교를 관내에 줄이는 형태로 보편 교육 방향으로 나아갔던 편이다.

2021년 3월 31일, 일본 정부의 역사왜곡을 강력히 규탄했다. # #

2021년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사전투표 독려 캠페인을 벌였다. #

2021년 6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기 위해 교육부에 요청하여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3선에 도전하였으나 엎치락뒤치락 접전 끝에 보수 성향의 하윤수 후보에게 1.65%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밀려 낙선하였으나[4] 하윤수 교육감이 1·2심과 같이 상고심에서도 당선무효형이 확정되어 교육감직을 잃게될 경우 보궐선거에 나올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쪽 역시도 전교조 해직교사 특채 지시 혐의로 재판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집행유예 이상의 형이 확정될 경우 피선거권이 제한되어서 보궐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된다.

8. 퇴임 이후

퇴임 이후 비교섭단체 몫의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 그의 집안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2] 초창기 KTX는 서울에서 대구까지만 고속선을 완공한 상태에서 선개통하여 대구-부산 구간은 기존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며 저속으로 완행을 했다. 이후 대구-부산 전용 고속선 공사가 추가로 진행되어 추후 완공되었다.[3] 대한민국 최초의 민선 여성 교육감이다.[4] 출구조사에서 하윤수 후보에게 4.6% 차이로 밀렸지만 개표 초중반에는 그래도 근소한 표차로 앞서기도 했지만 개표 후반에 다시 2위로 밀려났다. 16개 구군 중 영도구, 북구, 사상구, 강서구, 기장군 5곳만에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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