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장 김문호
일본군이 기록한 <폭도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김문호는 1908년 안동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며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고, 1908년 5월 2일 변장수사대에 의해 체포된 후 피살되었다. 이 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김문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
2. 해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김문호
1911년 1월 5일 황해도 해주부 백림동에서 출생했다. 해주 보통학교 및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1933년 4월 조도전대학 전문부에 입학했다. 1937년 3월 중국인 학생을 가장하고 독일 기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절강성 영파로 망명했다. 1937년 8월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영파 방수사령부 정치부에 특채되어 1939년 12월 소교로 진급하고 3전구 방송국에서 반전방송을 하였으며, 일본군 포로 심문과 일본 문서 및 서적 등에서 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또한 1939년경 중앙군관학교 제3분교에서 특수교육을 받았다.
1940년 9월 충칭으로 이동하였고, 1940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광복군 제3징모처 임명식이 거행되었을 때 주임위원 겸 선전조장에 임명되어 강서성 상요 방면에 파견되어 제3지대 편성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대원들과 함께 염전사상고취 전단, 일본군 귀순통행증 등을 화물차에 싣고 야전 방송기재를 휴대하고 금화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을 살포하고 일선방송을 하였다. 또한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일본군 점령지역에 공중 살포하게 했다.
이후 절강성 천태현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 제1유격 정진군종대 사령부와 합작하여 일선공작을 수행하였고,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징모제3분처가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로 편성되었을 때 분대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 유격대와 함께 정보, 선전공작을 전개하며 포로 심문을 통해 일본군의 전선 및 후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공작에 활용했다. 1944년부터 건양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 선전 및 초모공작과 냅코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8.15 광복 후 귀환하여 서울에서 살다 1999년 3월 29일 오후 2시 서울보훈병원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문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9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출처: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