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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07:30:28

김낙영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9년 7월 23일
황해도 장연군 서대면 송천동[1]
(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
사망 1971년 2월 8일
일본 도쿄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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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9년 7월 23일 황해도 장연군 서대면 송천동(現 황해남도 룡연군 구미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말 김창현(金昌鉉) 및 기독교 청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같이 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진행시켜 갔다. 그들은 송천 장날인 4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제작하면서 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 4월 18일에 그를 비롯한 기독교 청년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선도하였고, 이에 모인 수백의 장꾼이 가세하면서 만세시위는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읍내의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탄압을 가하였고, 그는 시위를 주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7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상고했으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도쿄로 이주했고, 1971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김낙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김규식의 부인인 김순애를 비롯하여 김필순, 김순길(金順吉), 서재현(徐載賢), 서병호(徐丙浩), 윤익선(尹益善)등 도합 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