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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0:54:43

김기추

1. 개요

대한민국의 항일운동가, 정치인, 법사. 백봉거사로 불렸다.

2. 생애

1908년 2월 2일 한의원인 김해 김공 봉한(金海金公 鳳翰)의 맏아들로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1920년 만 12세의 나이로 영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치고 1924년 부산제2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합니다. 1930년에 상업학교 선배인 정영모를 만나 부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습니다. 감옥에 면회 온 동생이 벽암록을 가져왔으나 무신론자인 그는 그 책의 내용에 관심이 없었고 또 난해한 그 글을 이해할만한 학문이나 불교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침 부록에 참선법에 대한 소개가 있어 처음으로 그 글에 따라 잠깐 앉아보았는데 건물밖 전선에 앉아 있는 참새가 보여 신기했다고 합니다. 수형을 마친 그는 일제의 ‘요시찰인’이 되어 감시, 가택수색, 방해를 당하며 지내다 결국 부산을 떠납니다. 그는 만주와 부산을 오가며 지내다 193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헌병대에 끌려갑니다.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다
헌병대에서 한 사람씩 처형되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는 문득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유치장 벽에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쓰기 시작해서 6~7개월이 지났을 때 벽은 명호로 가득했습니다. 헌병대의 수색에서 낙서한 것이 들통난 후 헌병대는 일본군 만주사령부의 요직을 받아 일제에 충성하든가, 아니면 죽든가의 선택을 종용하였습니다. 목숨을 부지하여 그 자리에 앉았으나, 끝내 그는 일제에 충성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핑계를 만들어 부산으로 돌아온 후 지하에 숨어 항일운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습니다..

정치계에 뛰어들다
이후 영도지역의 유지로 부산남중, 남고 설립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1958년 정치계에 들어갔습니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공천에서 탈락합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합니다. 놀라운 득표력을 보인 그의 능력을 보고, 자유당은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그를 영입합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이 몰락하면서 그는 도피하듯 부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불교를 만나다
그는 서울, 인천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죽어 지옥에 갈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1963년 여름, 인천의 지인들과 어울리다‘불교의 상승도리를 만나면 지옥을 면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랍니다. 도반들과 함께 관악산에 있는 절을 찾아가서 '사술(邪術)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그 절의 스님이 꾸짖으며 올바른 수행의 길로 안내합니다.처음 사흘간은 다라니를 외웠고 아무 소득이 없자 다시 스님을 찾아가‘무자(無字)’화두를 받습니다.

무자화두를 참구하다
그는 치열하게 화두를 참구했습니다. 1963년 12월 말에 그는 도반들과 청주부근에 있는 심우사(尋牛寺)라는 절에서 정진을 하며 목탁소리가 두 개로 들리고 옆에 서있는 신장(神將)을 보며 의아해 했습니다.

깨달음
1964년 1월 초 한 도반이 어느 날 옆에 앉아 무문관(無門關)을 펼쳐 보였습니다. ‘즉심즉불(即心即佛)’이 보였습니다. 그는 ‘그거 뻔한 거 아닌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도반은 몇 장을 더 넘겼습니다. ‘비심비불(非心非佛)’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즉심즉불’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삼계를 나투는 그 자리가 몸을 끌고 다님을, 육신은 그저 그림자임을, 생사가 그저 이름뿐임을 알았습니다. 도반들은 그를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 그 때 오 리쯤 떨어진 마을에 있는 교회당의 종이 울렸습니다. 그 종소리는 이제까지 들었던 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忽聞鐘聲何處來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얼로오노
寥寥長天是吾家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집안이 분명허이
一口呑盡三千界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水水山山却自明 물은물은 뫼는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1년 만에 금강경 해설서를 쓰다
인천으로 돌아온 날 밤 그는 금강경을 처음으로 펼쳐보고 자신이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서술되어 있음을 보고 그 해설서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전준렬 교수가 그 원고를 책으로 발행해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세상은 그 책을 보고 백봉 김기추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의 가르침에 환호하다
그는 서울로 자리를 옮겨 불암산에서, 정릉에서 자신을 따르는 보림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금강경을 강의하며 최상승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1968년 봄 대학생들이 백봉거사를 찾게되고 이 때부터 대학 방학인 여름과 겨울에 한달 가량의 집중수련대회를 열고 하루 여섯번 설법을 하며 참선수행을 지도합니다. 1969년 겨울 계룡산에서 대전고 학생들의 참선정진을 지도하고 이어 1970년에 대전 심광사에 머물며 대전불교학생회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이 일로 그의 대학생 포교는 날개를 달게 됩니다. 그후 수많은 대학생들이 부산 보림선원에서, 여름과 겨울의 철야정진법회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청담, 대의스님이 출가를 종용하다
그가 심광사에 머물 때 청담스님이 대의 스님과 함께 그를 찾아왔습니다. '출가하면 조실자리를 주겠다'고 하며 출가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숙고끝에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성과를 내는 공부를 하려면 승려사회를 혁신해야 하는데 자신 혼자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재가불교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출가를 거절하며 '집집마다 불당을 만들게 하고 싶다' 한 말에서 그의 비전을 볼수 있습니다.

부산, 그리고 전국에서 최상승의 법을 설하다
그는 유성에 보림선원을 열고 대학생 및 스님들을 중심으로 선(禪)을 가르치다가 1972년 부산으로 선원을 옮깁니다. 이 때부터 12년간 부산 사직동, 광안동, 남천동에 머물며 부산, 서울, 대구, 목포 등에서 새로운 선(禪)수행 방편을 제시하고 거사풍(居士風)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1984년 11월 지리산 기슭에 보림선원을 지어 이사했고 그 곳에서 이듬해 8월 2일 입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법을 펴는 곳을 보림선원이라 불렀으며, 자신을 따르는 학인들의 모임을 보림회로, 자신의 선을 보림선이라 이름지었습니다.[1]

새 화두, 새말귀
그는 재가불자의 수행인 거사풍 불교를 확립하기 위하여, 매일의 평범한 일과 수행을 병행하기 위하여 새 화두인 새말귀를 주창했습니다.

위 모든 내용은 http://www.borim.org/life.html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 사상

‘허공으로서의 나’를 근간으로 ‘새말귀’라는 독창적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조사선풍에 가깝지만, 철야수행을 수행방편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대우거사와 교류가 있었지만 수행법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2]


[1] 백봉 김기추거사와 보림선원[2] ‘한국의 유마거사’ 백봉 김기추 선생 삶을 기록하다 -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