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4C7474><colcolor=#fff> 김귀정 金貴井 | Kim Gui Jung | |
출생 | 1966년 8월 11일[1] |
경기도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2] | |
사망 | 1991년 5월 25일(향년 24세) |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 | |
사인 | 백골단 강경진압에 사망 |
학력 | 서울무학초등학교 (졸업) 한양여자중학교 (졸업) 무학여자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3] / 1학년 중퇴)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 명예학사) |
직업 | 학생운동가 |
부모 | 아버지 김복배[4], 어머니 김종분(1939~) |
형제자매 | 언니 김귀임[5], 남동생 김종수 조카 정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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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가이다.2. 생애
2.1. 학생운동
1966년 8월 11일 경기도 강화군(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에서 아버지 김복배와 노점상으로 생계를 잇던 어머니 김종분 사이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일찍이 부모를 따라 서울특별시 성동구 하왕십리동으로 이주했으며, 서울무학초등학교와 한양여자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했으나 집안 사정으로 1년 만에 중퇴하였고, 1988년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하게 되지만 집안 사정으로 1년 간 휴학을 하기도 했다. 복학한 후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심산연구회에 가입하였으며, 회장직도 수행하였다. 그 외에도 동아리연합회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2.2. 사망
1991년 명지대학교 재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하는 가운데, 고 강경대 열사 살인 만행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를 참가한다. 시위 도중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2가 대한극장 맞은편 진양상가 부근에서 건너편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고, 최루탄 세례 속에 무차별 구타를 당한 끝에 압박 질식사한다. 이후 중구 저동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경찰은 26일 새벽에 시신을 탈취하려고 영안실에 진입하였으나 김귀정 양 유가족들과 성균관대학교 재학생들,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관계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1991년 6월 12일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장례식 날 마지막으로 모교를 방문하고자 하는 장례행렬은 공자님의 위패를 모신 곳을 지나 운구할 수 없다는 성균관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어 장례에 나선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읍소하여 도서관 옆 쪽문을 통해 운구하는 것으로 장례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6] 이후 그녀의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가, 2016년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에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되자 그곳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사후
성균관대학교에서는 김귀정 열사를 기리고자, 매년마다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김귀정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김귀정 장학금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그 외에도 교내에 김귀정 생활도서관 그리고 김귀정 마당을 설치하여 열사의 정신을 기념하고 있다.정유인 선수의 이모로 정유인의 모친 김귀임이 김귀정의 언니다. 2021년 김귀정 열사 30주기 추모사업을 통해 알려졌다. 눈매가 많이 닮았다는 평을 많이 들으며 정유인 역시 김귀정이라는 이모를 둔 것이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정유인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하여 둘이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김귀정 열사의 유족들은 후에 국가에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하였고 대법원에서 이를 인용해 국가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렸다.(95다23897).[7] 이 사건의 겅우 불특정다수의 진압대원에 의해 망인이 사망했기에 불법행위를 가한 가해 공무원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국가배상이 가능하다는 요지에서 결정되었다. 행정법 시험에서 국가배상의 과실판단과 관련된 문제이니 기억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