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길영희(吉瑛羲, 1900년 11월 30일 ~ 1984년 3월 1일, 향년 83세)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다. 해방 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했다.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2005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2. 생애
1900년 평안북도 희천 에서 태어나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만세 운동에 학생대표로 활동하였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평양고등보통학교 시절 학자이자 승려인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학장 출신 마에다 에운(前田慧雲)의 평양 방문해 강연을 듣고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가 되기위해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의학도의 길을 걸었으나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며 옥고를 치르고 꿈을 접었다. 길영희는 당시 1학년 대표를 맡고 있었다.
「길영희 신문조서」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등을 참고하면 길영희는 같은 학교 선배였던 한위건 등과 함께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학생들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당일이 되어 오후 2시 탑골공원 육각정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학생들은 시위대를 형성해 군중들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전개하였다. 길영희 역시 이들을 따라 종로 거링하 대한문 등을 뛰어다니며 시위를 벌이다 귀가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이 일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다닐수가 없게되었다.
형이 끝난 후 교직으로 진로를 바꾸고 경성배재고등보통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 졸업한 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역사를 전공하였다. 졸업 후 배재고등학교와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3년 함경남도 안변황무지 개간사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민립농과대학 설립 준비를 계획하였다.
도산 안창호와의 교유도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길영희가 도산과 교유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도산이 대전감옥에서 출옥해 서울 지성여관이라는 곳에 머물던 때였다고 한다. 이때 도산을 처음 만나 후 성북동에 있던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동료들과 함께 조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길영희는 후에 도산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 중 병보석으로 병원에 머물 때 다시 재회해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길영희의 농촌계몽사업은 1938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뜨면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이곳을 기반으로 강습회와 교육활동 등을 전개하며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지역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자택에서 학교를 열고 인천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인천중학교는 6.25전쟁 후 실시된 학력경시대회에서 전국을 제패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1956년 제물포고등학교가 설립된 후에는 이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취임 직후 ‘무감독 시험’을 제안해 현재까지 학교의 전통이자 자랑으로 계승되고 있다. 제물포고등학교 역시 최고의 대학 입학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엄정한 테스트를 거쳐 뽑으면서 제물포고등학교는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길영희 교장의 교육철학은 학생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1961년에는 문교부가 전국고교장 인사이동을 하며 길영희 교장을 대구사범대학교 교장으로 전임시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생들이 학부모들과 함께 철야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길영희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겨 놓았는데 항상 두루마기와 국민복을 입고 다니면서 조회가 끝나면 두루마기를 벗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었다고 한다. 학생들과 인천 사람들은 길영희 교장을 ‘석두(石頭)’라고 불렀다고 한다. 교육에 대한 고집과 신념을 역설적으로 나타낸 별명이다.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강직하게 살았던 길영희는 경성 배재고보를 거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공립학교 교사를 지원했으나 3·1운동을 주도한 전력을 이유로 공립학교의 정식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였다. 해방 후 인천중학교가 설립되면서 인천시민의 결의로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였고, 1950년 6·3·3·4 학제개편으로 설립된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1961년 정년퇴임까지 인천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길영희는 1961년 정년퇴임 후 자택에 대성학원을 열어 가난한 청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나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 1967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근처에 ‘가루실 농민학교’를 설립하고 농촌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다가 1984년 사망하였다.
3. 사상
안창호와 함께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서 ‘유한흥국(流汗興國 땀을 흘려 일하여 나라를 일으키자)’을 교육의 지표로 세웠다.교장 재직 시에 학생들에게 유한흥국의 노작교육을 강조하여 교사와 도서관 신축시 학생들과 함께 등짐으로 벽돌을 나르며 몸소 그 정신을 실천하였다. 인천중, 제물포고 교장 재직 시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대한민국 최초로 무감독시험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길영희의 인재육성을 향한 일념은 1961년 서울대 전체 수석 및 3개 단과대학에 수석 입학생을 배출함으로써 제물포고등학교를 전국 유수의 명문학교로 키워 내었다. 인재 양성을 위해 길영희는 '민족의 얼'을 천명하였는데 이를 형성하는 3가지 기본정신으로 애국심, 정직성, 근면성을 강조하였다.
4. 주요 연보
1900년 평안북도 희천군 출생. 1919년 3·1운동 참가. 1938년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 설립. 1945년 인천중학교 초대교장 취임. 1956년 제물포고등학교 초대교장 취임. 1967년 충남 덕산면에 ‘가루실 농민학교’ 설립. 1984년 사망5. 관련 인물
아버지 길헌태(吉憲泰) 어머니 양찬린(梁燦麟)이다.6. 길영희 기념사업회
- 2011년: 인천중에 동상 제막
- 2014년 9월 : 길영희 선생 30주년 추모 서화전
- 2016년 3월 : 제31주기 추도식. '유한흥국' 정신을 기림(인천중학교 강당)
7. 평가
오천석은 길영희를 '작업복차림의 성자(聖者)'라고 칭송하였고, 시인 조병화는 아래의 추모시를 선생께 헌정하였다.이상은 멀고 높고
조 병 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주독립된 조국의 번영을 위한
청소년, 인재양성의 길에서
보다 높은 이상을
보다 뜨거운 욕망을
보다 줄기찬 열의를
해방된 조국, 그 조국에 이바지한
대한민국의 교육자
길영희 교장
- 후략 -
조 병 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주독립된 조국의 번영을 위한
청소년, 인재양성의 길에서
보다 높은 이상을
보다 뜨거운 욕망을
보다 줄기찬 열의를
해방된 조국, 그 조국에 이바지한
대한민국의 교육자
길영희 교장
-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