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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8:38:31

신유정변

기상정변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1. 개요

辛酉政變.

1861년 청나라서태후공충친왕 혁흔과 합작하여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친위 쿠데타이다.

신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유정변'이라고 하며, 함풍제의 고명대신들이 동치제가 즉위한 직후 올린 연호기상(祺祥)을 쓸 때 일어난 사건이라 하여 '기상정변'이라 하기도 한다.

2. 배경

1861년 8월 22일, 제2차 아편전쟁을 피하여 열하로 몽진했던 함풍제가 붕어했다. 함풍제는 죽기 직전에 군기처의 이혁정친왕 단화, 이혁이친왕 재원[1], 협판대학사 겸 호부상서 이혁보국군왕 숙순[2], 부마도위(駙馬都尉) 부찰경수[3], 군기대신 겸 병부상서 탁화락목음, 이부좌시랑 광원, 예부시랑(문부대신) 두한[4], 태부사소경 초우영을 비롯한 8명의 고명대신들을 보정대신으로 지정하여 아들 동치제를 부탁했고, 동태후서태후에게 각각 옥새를 이분화하여 어상과 동도당을 주었다.

한편 함풍제와 함께 가지 못하고 경사인 북경에 남은 재경(在京)대신들은 고명대신으로 지명되지 못하여 불만을 가졌고, 특히 그들의 필두에는 도광제 시절 차기 유력 황제 후보로 고려되었던 공친왕 혁흔이 있었다.[5]

3. 전개

공친왕 혁흔은 9월 5일에 열하로 와서 조문을 했고, 이때 자신을 견제하려는 고명대신들을 증오하여 서태후와 만나 정변 모의를 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붕어 이전부터 황족인 숙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9월 14일에 산동도감찰어사 동원순이 양궁(兩宮) 황태후가 수렴청정을 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보정 8대신은 이를 거부하여 태후들과 대립했다.

그래서 서태후는 공친왕을 이용하여 자신이 증오하는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기로 결정한 후 본심을 숨긴 채 혁흔과 협력하는 척했으며, 북경에 있는 재경대신들을 매수했다. 10월 26일에 단화, 재원, 양궁 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북경으로 출발했고, 숙순은 함풍제의 운구를 호종하여 하루 늦게 출발했다. 11월 2일에 선발대 중 양궁태후와 동치제가 먼저 자금성에 입궁했고, 단화와 재원은 뒤늦게 입궁했는데, 태후들의 지시로 보군통령에 막 부임했던 순군왕 혁현[6]의 칼 같은 지시로 입궁하자마자 체포되었으며, 숙순은 북경 북동쪽 밀운에서 체포되었다.

서태후는 11월 3일에 공친왕을 사실상의 섭정왕인 의정왕에 임명했다. 그 다음 11월 8일, 재원과 단화에게는 자결을 명령했고 숙순을 참수했다.[7] 이들 셋을 제외한 다른 5명은 함풍제와 공친왕 형제, 그리고 양궁 태후들과도 사적으로 엮인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이나 다름없는 머나먼 방계 철모자왕 가문의 3인과는 달리 관직에서만 물러나는 선에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11월 11일에, 애신각라 재순이 즉위식을 올리고 보정대신들이 올렸던 기상(祺祥)이라는 연호를 폐지한 후 이듬해를 동치(同治) 원년으로 선포했다.

4. 결과

함풍제가 본래 의도한 바가 아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새로운 연호인 동치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같이(同) 통치한다(治)'라는 의미로 황제와 황태후, 공친왕 등이 함께 통치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동태후가 정변에 동조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숙순을 비롯한 보정 8대신이 황태후와 황제를 업신여긴다며 그들보다 공친왕을 신뢰하고 있었을 뿐이었고, 스스로는 정사에 어두워 일부 사안만 충돌하고, 나머지는 서태후에 일임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머지않아 공친왕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고자 보수파와 결탁함으로써 공친왕을 '수석 군기대신'으로서 조정에 건의를 할 수 있을 뿐 절대권력은 갖추지 못한 '권신 1'과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고,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독식했다. 그 와중에도 공친왕은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의 한족 신사층을 중용하고 유학생을 뽑아 해외에 보내면서도 서태후의 입김으로 동치제가 원명원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재를 헌납하면서까지 국고 낭비를 막는 등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으나, 양무운동은 결과적으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유구한 역사를 반복했다. 공친왕은 아들을 인질로 뺏기며 서태후의 예스맨으로 전락한 순친왕 혁현에게 조금씩 밀려나다가 청불전쟁에서 패배하고 복건함대가 궤멸하자 실각했고, 서태후의 천하가 열리고야 말았다.
[1] 당시 영시위내대신으로, 옹정제가 친동생보다도 아낀 이복동생이자 옹정 연간 군기처에서 혹사당하다가 형보다 일찍 과로사(...)한 재상 이현친왕 윤상의 5대손이었다. 윤상 사후 윤상의 장남인 영랑군왕 홍교가 장각친왕 윤록(강희제의 16남), 이친왕 홍석(강희제의 황태자였지만 두 번 폐위당한 이밀친왕 윤잉의 장남)과 함께 건륭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윤잉-홍석 계통에 정통성이 있다며 주장하는 미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친왕의 작위을 뺏기고, 7남인 이희친왕 홍효(1722~1778)의 후손에게 후계가 넘어갔지만, 재원이 기상정변에 가담해 작위를 박탈당한 후 다시(...) 영랑군왕의 후손인 재돈(1822~1890)에게 넘어갔다.[2] 정친왕 단화의 이복동생으로 8명의 고명대신들 중 내각대학사직을 맡은 실세였다. 이친왕 재원과 정친왕 단화는 오히려 철모자왕의 권위를 갖춘 명목상의 우두머리에 가까웠다.[3] 도광제의 황6녀이자 공충친왕 혁흔의 누나인 수은고륜공주와 혼인한 부마였다.[4] 함풍제에게 감성팔이를 조언한 스승 두수전의 아들이었다.[5] 혁흔이 왜 북경에 남았냐면, 연해주가 중재수수료 명목으로 러시아에 할양되고, 구룡반도가 영국에게 할양되는 사건으로 잘 알려진 베이징 조약 등 외국과의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의 실무를 책임지며, 형이 열하로 도망가는 동안 뒷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재원은 영불연합군과의 강화협상에서 케케묵은 예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다가 서양 측 대표들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등 구태를 보였는데, 전란이 닥치자 황제를 지켜야 한다며 빤스런한 인물이라 그 뒷감당을 해야 했던 혁흔에겐 이가 갈리는 인물이었다.[6] 광서제와 재풍의 친아버지로 혁흔과 뜻을 같이 했으나 부인이 서태후의 여동생이라서 서태후와 더 가까웠다.[7] 이친왕 재원은 자금성에 있는 집무실에서 독을 탄 포도주를 직접 마셔 음독자살을 했고, 정친왕 단화는 사저에 대기 중이던 군사들의 위압을 받고 결국 분을 못이겨 너무나도 추웠던 12월 15일 밤에 눈을 맞으며 천안문 옥탑기와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을 했다. 이혁보국군왕 숙순은 현재 베이징시 시청구역 차이스커우 촌 안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을 당했다.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무릎을 꿇리려는 망나니에게 저항했으나, 망나니의 오함마에 다리가 부러뜨려져 강제로 무릎을 꿇게 되는 등 온갖 모욕을 당하며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