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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5:06:53

금의야행

고사성어
비단 금 옷 의 밤 야 다닐 행

1. 겉 뜻2. 속 뜻3. 유래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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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겉 뜻

비단옷을 입고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2. 속 뜻

자랑할 만한 일이 생겼음에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아무 가치 없는 일이란 의미로 쓰인다.

3. 유래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공이 있는 군벌들과 측근들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이것이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 때 자신도 어디를 영토로 삼을지 고민을 했는데, 유생 한생이 유방과 다른 제후들을 견제하면서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서 머무르면서 세력을 기르자고 했지만 항우는 반대했다. 그는 황폐한 함양 지방이 싫었고 초나라로 돌아가 고향 사람들에게 공적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귀해졌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衣繡夜行)이나 다름없소. 누가 그것을 알아주겠소?

이 고사성어는 항우가 그만큼 고향을 좋아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의 고향 사람만을 잘 대해주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하다. 또 항우의 전략적 식견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함양이 자리잡은 관중 평야를 둘러싼 하수와 진령산맥은 천혜의 요새였고, 두 자연 요소가 만나는 함곡관만 틀어막아버리면 외부 세력이 관중 안으로 진격하는 것은 당시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1] 또한 관중 평야의 무시무시한 생산력은 그 당시 중국 어디와 비교해도 제일의 생산력을 자랑했다. 여길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깡촌 중에도 깡촌이던[2] 초나라로 돌아간 것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실책이었다.

이 말이 나왔을 때는 몇 달에 걸친 파괴로 함양은 초토화됐고, 생산력도 일시적으로 끊어지다시피 한 상태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 파괴를 항우 본인이 했다. 자기가 망쳐놓고 여기 상태가 나쁘다고 싫증내어 떠나는 어이없는 짓을 한 것이다. 만약 항우가 지나치게 파괴하지 않고 적당히 처리하고 눌러앉았다면, 관중은 유방이 아니라 항우의 중요 거점, 더 나아가 대륙 통일의 기반이 충분히 될 수 있었다. 결국 자업자득이다.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든 물자 공급과 내정을 해낸 소하가 워낙에 괴물이었을 뿐이다.

한생은 이 말을 듣고 물러나면서 사람들 말로는 초나라 인간들은 원숭이가 갓을 쓰며 사람 행세를 하는 거나 다름없다던데, 과연 그렇군!이라고 뇌까리며 항우를 깠고, 그걸 들켜 격분한 항우에게 팽형을 당하고 말았다.

유방도 이 말을 알았는지 화양국지 파지에 따르면 유방이 한왕에 임명된 후 범목을 장안건장향후로 봉하고 관동을 정벌하려 했는데, 종인들이 고향에 돌아가려 하자 유방은 이를 허락했다. 범목에게는 부귀해지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범목의 임지를 옮겨 그의 고향인 낭중의 자향후에 봉했지만, 범목이 굳게 사양하자 도면후에 봉했다.

4. 기타

여기서 파생된 사자성어인 금의환향이 더 유명하며 설명도 거기에 더 잘 돼있다.

조선 세조는 이 말을 항우가 아니라 유방이 한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 정말로 금의환향을 누린 자는 결국 항우가 아닌 유방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있기도 하다.

현대중국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며 항우를 설명할 때나 사극 작품의 제목으로만 사용된다.

5. 관련 문서


[1] 실제로 항우 또한 힘으로 관중을 무너뜨린 적이 없다. 진과의 전쟁에서는 유방이 함곡관 문을 알아서 열어줬기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고, 초한대전에서는 관중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형양, 성고 방면에서 항상 가로막혔다. 사실 그 유방도 함곡관이 아니라 무관 방면으로 관중에 입성했다.[2] 초나라의 영역이던 양자강 일대의 경제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10세기 무렵부터다. 다만 항우의 본거지는 장강 이북인 팽성으로 오늘날 장쑤성에 위치해 있다. 초나라가 북상을 하면서 이곳이 초나라 영토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