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고구려의 궁예의 휘하 장수 중 한 명. 이름에 논란이 많으며 그에 대해선 후술.2. 생애
처음에 궁예는 북원(北原)[1]의 적 양길(梁吉)의 휘하에 있으면서 강원도 일대를 공략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를 근거지로 하여 주천(酒泉)ㆍ나성(奈城 :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 등을 치고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로 진출하여 갔을 때, 궁예의 무리가 3,500명에 이르게 되자 궁예는 이를 14개의 대(隊)로 나누었다.이때 금대검모흔장귀평장일(金大黔毛昕長貴平張一)이 궁예에 의하여 사상(舍上: 부장)에 임명되어 궁예를 보좌하였다고 하는데, 명확하게 인명을 나누지 않고 그냥 나열해 기록해놔서 이를 김대검ㆍ모흔ㆍ장귀평ㆍ장일, 혹은 김대검ㆍ모흔장ㆍ귀평ㆍ장일의 4명, 혹은 금대(김대)ㆍ검모ㆍ흔장ㆍ귀평ㆍ장일의 5명으로 파악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므로, 해석에 따라선 김대검이라는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 맨 첫 번째의 4인설a를 주장을 한 대표적인 학자가 이병도고 전남대학교 정청주 교수는 김대검과 모흔장으로 끊어서 두 번째의 4인설b를 주장했다. 이병도의 제자인 서울대학교 김철준 교수와 조선시대에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이 세 번째의 두 글자씩 끊어 읽은 5인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해석에 따라 금대(김대), 검모, 흔장, 귀평, 장일의 5명이 맞을 수도 있고, 김대검ㆍ모흔ㆍ장귀평ㆍ장일 혹은 김대검ㆍ모흔장ㆍ귀평ㆍ장일의 4명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역사서에서는 성을 누락시키고 이름만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2], 고려 이전에는 성씨의 사용 자체가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점,[3] 당시 인명들을 보면 2글자가 주류이며 黔이란 한자는 이름의 첫 글자로 쓰인 경우만이 나타난다는 점[4], 張은 성씨로 쓰인 한자였다는 점 등은 5인설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골때리는 문제가 있는데 이름의 앞글자인 金이 이름이면 그냥 금이라 읽는 게 맞겠지만 성씨라면 김이라 읽는 게 맞게 된다. 다른 기록라도 있다면 이들의 인명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겠지만 이들이 등장하는 기록은 달랑 이것뿐이다.
3. 대중매체에서
3.1. 태조 왕건
자세한 내용은 금대(태조 왕건)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코미디빅리그
2018 궁예의 등장인물. 코미디언 이정수가 맡았다. 이진호가 맡은 궁예가 명령하면 철퇴로 사람들을 쳐 죽이는 금부장으로 함께 나오는데, 분노와 장문의 명령을 동반하던 태조 왕건 시절과 비교하면 단순한 소환수가 되었다.이후 2018~2019 장희빈'에선 금부장에서 금상궁으로 변경되었고 죽이는 용도가 철퇴에서 사약으로 바뀌었다.
[1] 현 강원도 원주시 일대.[2] 견훤의 아들 신검, 양검 등이 대표적이다.[3] 앞서 견훤 가문의 경우도 성씨를 누락했다는 각주를 달았지만, 성씨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후백제 왕가가 견씨를 칭하게 된 건 고려시대에 들어서가 된다.[4] 유금필의 경우도 성씨를 제외하고는 첫 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