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8:02:15

권채근

성명 권채근(權采根)
생몰 1889년 2월 5일 ~ 1920년 1월 23일
출생지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읍 평안리
사망지 대구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채근은 1889년 2월 5일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읍 평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이강우, 김재화(金在華), 강달영(姜達永), 박진환, 박용근, 강상호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펴고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려서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제는 헌병과 경찰력만으로는 이를 저지할 수가 없자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이같은 일제의 폭력저지도 물리치고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명의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0년 1월 23일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채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