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우일(禹逸)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3년 11월 6일 |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2] | |
사망 | 1955년 9월 18일 |
경상남도 마산시 완월동 (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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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설명
권영조는 1883년 11월 6일 경상도 진해현 서면 대곡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아버지 권학희(權翯熙)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태용(金泰瑢)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0년부터 창원에서 사립 경행학교(景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기여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권영대·변상섭(卞相燮) 등과 함께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다가오는 고현(古縣) 장날로 약정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쓰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거사준비를 갖추어 가는 한편 각 면·동으로 다니면서 동지와 대중규합에 노력하였다.
약정한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자 예측대로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고 권영대의 선창과 지휘 아래 장터 곳곳에 대기중인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주민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다가 이해 3월 28일 오후 5시경 진동헌병주재소에게 체포되었고, 그는 1919년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마산시 완월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5년 9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권영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