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상수(權相洙)·권우송(權又松) |
출생 | 1873년 3월 29일 |
경상도 영천군 봉향면 하망동 (현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 |
사망 | 1941년 6월 16일 |
중국 베이징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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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송영호의 처남이기도 하다.
2. 생애
권상수는 1873년 3월 29일 경상도 영천군 봉향면 하망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916년 3월부터 1918년 3월까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권영목과 연결되어 송주찬(宋柱燦)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들은 영주에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치하고 활동의 근거지로 삼아 경북 영주 지역의 자산가들로부터 수차에 걸쳐 약 1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이 영주 헌병분견소에 발각되자 권상수는 포위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5년, 그는 베이징에서 김창숙 등이 주도한 유림단(儒林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1925년 여름 국내로 파견되어 이상촌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6년 4월 의열단의 국내 침투 및 폭파 계획이 발각되면서 그 또한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조용히 지내다 1941년 6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권상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