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기 너무 싫은 이유는 내가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가 없다는 거다. 특히 날 때부터 따라다닌 가난은 클수록 친구와 밥 한끼,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꺼리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는 척, 나만 신경 쓰는 척. 그게 연수가 살아온 방법이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할머니와 둘이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왔다. 이런 개천에서 살아남기 위해 독하게 마음 먹었다. 그래서 연수의 목표는 늘 성공이었다. 사실 성공의 기준이 크지 않다. 그냥 할머니와 나, 두 식구 돈 걱정 안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 겨우 그 정도지만 연수 혼자 짊어지는 짐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리고 그 해, 어깨의 고단한 짐을 한 순간 잊게 만드는 사람을 만났다. 최웅이었다.
연수에게 이런 사랑스러움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남들에겐 항상 사납고 차갑던 연수가 최웅 앞에선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최웅을 건드린다면 곧바로 다시 전투 모드가 튀어 나와 가만 두질 않는다. 연수의 이런 단짠단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최웅이 유일하다. 유일했다. 연수가 자신의 손으로 최웅을 놓기 전 까진.
10년이 지난 지금, 성공한 삶일까. 성공만 바라보고 달려왔고 어느정도 원하던 건 이루었다. 집안의 빚을 다 청산했고, 고정적인 월 수입이 있으며, 돈 걱정이 많이 줄었다. 이제야 남들과 비슷한 선상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수는 변한 게 없다. 성공하려고 아등바등 살던 그 삶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달리고 있다. 늘 일이 우선이고 직장에서도 모두가 인정할 만큼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어쩐지 공허하다. 망망대해에 목표를 잃어버린 방향키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모르지만 습관이 연수를 쉬지 못하고 달리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 최웅을 찾아갔다. 겉보기에는 쿨하고, 도도하게.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지만 최웅과 마주 앉은 테이블 아래 연수의 손은 미세하게 떨린다. 이게 또 다른 시작이 될 지, 아니면 정말 끝을 맺게 될 지.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마주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