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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5년 1월 15일 |
경기도 수원도호부 오정면 학현리 (현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463번지)[1] | |
사망 | 1960년 12월 15일 (향년 65세) |
경기도 평택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13호 |
가족 | 배우자 김형봉 |
상훈 |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95년 1월 15일 경기도 수원도호부 오정면 학현리(현 평택시 안중읍 학현리 463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1919년 4월 1일 진위군 오성면 안화리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이에 호응하기로 마음먹고 4월 3일 밤 마을 뒷산인 봉오산에 올라 김용성(金容成)·이사필(李思弼) 등과 함께 주동이 되어 마을 사람 13명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2]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를 취하하면서[3]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60년 12월 15일에 경기도 평택군에서 사망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6년 9월 22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학현리 421번지로 기재되어 있다.[2] 1919년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3] 1919년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 형사사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