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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본관 | 제주 고씨 |
출생 | 1893년 2월 10일 |
함경도 북청도호부 양가사 초리[2] (현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리) | |
사망 | 몰년 미상 (향년 불명) |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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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재완은 1893년 2월 10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양가사 초리(현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리)의 평민 가정에서 고기봉(高紀鳳)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경기도 경성부로 이주해 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 소재 전명우(全命禹)의 방에 기숙하며 학업에 정진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탑골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종로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어 3월 4일 김재익(金在益)에게 받은 붉은 천 2권을 지니고, 5일 아침 대한문 앞에서 군중과 함께 붉은 천을 휘두르며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7월 12일 특별 사면되어 출옥한 그는 1924년 미국 시카고로 건너갔으며, 1930년 2월 미국 뉴욕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조직한 내지학생운동대책강구회에 참여했다. 또 1932년 2월 미주 지역의 단일당 결성을 위한 공동대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고재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