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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1:41:10

고데마르 1세 뒤 페이

성명 고데마르 1세 뒤 페이
Godemar Ier du Fay
생몰년도 1288년 ~ 1350년
출생지 프랑스 왕국 뒤 페이
사망지 프랑스 왕국 보케르
아버지 에티엔 블랑
어머니 바렌느의 아녜스
배우자 아가테, 마리
자녀 에티엔 뒤 페이, 고데마르 2세 뒤 페이
직위 투르네 주지사, 릴, 베르망두아, 상스, 보케르의 세네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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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세네샬. 백년전쟁 시기에 솜강의 교두보인 블랑슈타크를 건너려는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2. 생애

레보와 뒤 페이의 영주인 에티엔 블랑과 바렌느의 아녜스의 아들이다. 1328년 바트리의 세네샬[1]로 임명되었고, 1330년에는 쇼몽의 셰네샬로 선임되었다. 1338년에는 투르네의 주지사이자 릴의 세녜샬로 선임되었다. 1342년과 1345년, 1346년에는 베르망두아의 세네샬로 선임되었다.

1346년 8월, 에드워드 3세는 파리 근교까지 진군했다가 플란데런 백국으로 복귀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프랑스인들의 청야 전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역에서는 프랑스인들이 미리 밭을 갈아엎고 식량을 없애고 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은 더 먼 곳에 식량 수집 부대를 보내야 했다. 이들은 프랑스 민병대의 습격을 받아 전력이 갈수록 소모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행진이 느려지는 사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적보다 하루 먼저 솜강에 도착한 뒤 적이 플란데런이나 노르망디로 이동할 길목을 틀어막고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했다.

에드워드는 프랑스군의 솜 봉쇄를 뚫기 위해 행게스트, 퐁레미를 찔러봤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그 와중에 보급품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8월 24일 저녁 잉글랜드군이 아슈앙비메우 북쪽에 진을 쳤을 때,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은 불과 10km 떨어진 아브빌에 진을 쳤다. 이제 다음날이면 프랑스군이 그들을 따라잡고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날 밤, 에드워드는 현지에 사는 잉글랜드인이나 프랑스 포로로부터 불과 6km 떨어진 세뉴빌 마을 근처에 블랑슈타크라는 여울목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즉시 숙영지를 철거한 뒤 전 병력을 그쪽으로 이동시켰다. 당시 블랑슈타크에는 고데마르 1세가 500명의 중장병과 알려지지 않은 수의 용병 석궁수를 포함한 3,500명 가량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경비하고 있었다. 고데마르는 적이 나타난 것을 보고 경사진 북쪽 강둑을 따라 3개 대열로 병사들을 배치하고 최고의 정예병인 500명의 중장병을 중앙에 배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군이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널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당대 사료들의 서술이 불일치하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드 브네트(Jean Venette)는 고데마르가 잉글랜드군이 엄청난 수로 용감하게 건너는 것을 보고 돌아서서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다고 기술했다. 잉글랜드 왕의 고해사제인 리처드 윈클리도 이와 비슷한 기술을 남겼다.
"우리 왕은 크로토이(Crotoy)와 아브빌(Abbeville) 사이의 조수간만 지역을 제외하고는 건너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 번에 6~10명을 제외하고는 지역 주민들 중 누구도 안전한 곳이라고 알지 못하는 곳에서 군대 전체가 무사히 건넜다. 우리 병사들이 마치 안전한 여울목인 것처럼 거의 모든 곳을 건넜는데, 그 곳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반면 챈더스 해럴드(Chandos Herald)는 저서 <흑태자의 삶>에서 수백 명의 최고의 기사가 선발되어 솜강을 앞장서서 건너면서 적을 상대로 큰 전투를 벌였다고 밝혔다.
필리프는 파리에 있었고 그곳에 집결하고 있는 그의 대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센강과 솜강 사이에 잉글랜드군을 가두어 그곳에서 싸울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복수하지 않으면 자신을 나쁘게 생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인들은 모든 것을 불태우며 즐겁게 지냈다. 그들은 많은 여성을 과부로 만들고 많은 가난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었다. 그들은 솜강에 이를 때까지 밤낮으로 말을 탔다. 반대편에는 고데마르 드 페이 경이 피카르디의 많은 병사들과 함께 있었다. 강은 매우 넓고 조수로 인해 부어올랐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어떻게 건너갈지 궁금해했다.

고귀한 왕자는 자신의 선봉대 중 가장 뛰어난 기사 백 명을 선택하여 그들이 어떻게 건너는지 알아보도록 보냈다. 그리고 이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은 솜강을 가로질러 여울목을 보여 주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말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들 100인 모두는 용감한 기사들이었기 때문에 군마를 타고 즉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창을 들고 쉬었고, 그들을 바짝 따라오던 왕자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솜강 건너 여울목에서 큰 전투를 벌였고 기사들은 열심히 싸웠다. 양측은 활과 창을 휘두르었지만 곧 고데마르와 피카르디인들이 달아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잉글랜드인들은 적절한 시기에 그곳을 건너갔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는 기사의 용맹에 중점을 둔 챈더스 해럴드와는 달리 장궁에 중점을 두고, 잉글랜드 궁수들이 사격을 너무 잘해서 무장한 병사들이 교두보를 양보하도록 강요했다고 밝혔다.
프랑스군은 여울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근처에 전투 대열을 구성했고, 잉글랜드군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물에서 나올 때 그들 때문에 크게 짜증을 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그들에게 많은 해를 끼치는 제노바 석궁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아더, 반면에 잉글랜드 궁수들은 사격을 함께 잘해서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을 굴복시켰다. 블랑슈타크의 이 여울목에서는 양쪽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잉글랜드군은 건너갔고, 그들이 해안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들판으로 달려갔다. 왕과 왕자, 그리고 다른 영주들이 건너간 후, 프랑스군은 대열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빠르게 도망갔다.

이렇듯 당시 상황에 대한 동시대 기록이 다양하기 때문에 잉글랜드인들이 강을 어떻게 건넜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아무튼 에드워드 3세는 고데마르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여울목을 무사히 건넜다. 이후 크레시로 가서 전열을 재정비한 뒤 1346년 8월 26일 아군을 추격해온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을 크레시 전투에서 섬멸했다.

고데마르 1세는 적군이 여울목을 건너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1347년 상스의 세네샬, 1384년 보케르의 세네샬을 맡았다. 1350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알본의 아가테와 처음 결혼해 아들 에티엔 뒤 페이를 낳았고, 슈아줄의 영주 장 2세의 딸 마리와 재혼해 아들 고데마르 2세 뒤 페이를 낳았다.


[1] senechal, 남부 프랑스의 지방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