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대 중국의 관중 서부(현 섬서성 일대)에 거주했던 유목 민족. 당시 중원 왕조를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서융(西戎)의 일파로 분류된다.2. 역사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 헌원씨의 후손이 낳은 백견(白犬) 한 쌍이 견융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신화일 가능성이 높아 명확한 계보로 보기는 어렵다.언어학적, 고고학적 관점에서 현대 학계는 견융을 오늘날의 티베트인이나 강족과 연관된 민족으로 보고 있다.[1]
여기까지만 보면 중원 주변의 여러 이민족 중 하나로 보일 수 있지만, 견융은 중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바로 주나라 유왕 시기 수도 호경을 침공하여 유왕을 살해하고 서주(西周)를 멸망시킨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주나라 왕실은 더 이상 기존의 근거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이전의 주나라를 서주,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라고 부르며, 길고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즉 견융은 중국 고대사의 흐름을 통째로 바꿔놓고 춘추시대의 문을 연 장본인들인 셈이다.
이들의 위협은 유왕 때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목왕 시절부터 주나라와 크고 작은 충돌을 벌여온 질긴 악연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열어젖힌 춘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견융에 대한 기록은 급격히 줄어들며 역사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 이유는 바로 진(秦)나라의 부상 때문이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쫓겨간 뒤, 진(秦)의 양공(襄公)은 주나라의 옛 땅을 수복하고 서쪽의 융족을 막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 진나라는 수백 년에 걸쳐 서융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견융 부족들이 진나라에 정복당하거나 동화되었다. 즉, 견융이 일으킨 혼란이 역설적으로 서쪽의 방어자였던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었고, 그 성장한 진나라에 의해 자신들이 소멸하게 된 것이다.[2]
3. 여담
'견융(犬戎)'이라는 이름에 포함된 개 견(犬) 자는, 중원의 화하족(華夏族)이 이민족을 낮춰 부르기 위해 사용한 멸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3][1] 주류 학설에 따르면 이들은 현대 티베트인이나 강족의 직계 조상이거나,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친척 민족으로 추정된다. 언어학적으로는 중국티베트어족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 실제로 견융 중 상당수가 당시 진나라에 동화되어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3] 다만 일각에서는 견융 부족 내에 개와 관련된 토템 신앙이나 건국 신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