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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1:47:20

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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顕如 (けんにょ)
(1543년 2월 20일 ~ 1592년 12월 27일)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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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센고쿠 시대의 승려. 일본 센고쿠 시대 정토진종(일향종)의 승려로 혼간지(본원사) 11대 법주. 쇼뇨의 아들이고 렌뇨의 현손이다. 롯카쿠 사다요리의 양녀이자 구게 산죠 긴요리의 딸인 뇨슌니[1]와 결혼하였다. 잇코잇키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본명은 혼간지 켄뇨(本願寺顕如)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적대했던 사람들 중 가장 끈질기게 노부나가를 괴롭혔던 남자. 노부나가와 10여 년간 긴 전쟁을 벌였던 인물인데, 이 행적으로 인해 노부나가의 천하평정을 10년 늦춘 사내라는 평가도 받는다.[2]

2. 생애

이시야마 혼간지를 중심으로 기나이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와 충돌하게 되었고 1568년 노부나가가 상경하면서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마침내 1570년 켄뇨는 노부나가를 불적(佛敵)으로 규정하고 이때부터 약 10여 년간 이시야마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미요시 3인중, 마츠나가 히사히데,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다케다 신겐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자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했다. 켄뇨는 기이의 정토진종 호족 세력인 사이카슈와 함께 각지에서 잇코잇키를 일으켜 노부나가를 괴롭혔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영지가 피폐해졌으며,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가 멸망한데다가, 다케다 신겐이 상경 도중 급사하면서 혼간지의 세력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모리 데루모토를 비롯한 오다의 적들이나 다른 승단과 손잡으면서 저항했다.

켄뇨는 엔랴쿠지 승단이 백성들에게 온갖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 당시 승려들은 신도들로부터 시주를 받아서 그 돈으로 고리대금업을 했으니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엔랴쿠지 승단이 오다 가에 의해서 싸그리 학살당할 때 백성들이 통쾌해했으니, 켄뇨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혼간지에서는 흉년이 들면 백성들에게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주었고, 병자들을 무상으로 돌보면서 민심을 휘어잡는다. 덕분에 다른 승단과는 달리 민심을 기반으로 한 혼간지 세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3]

하지만 오다 가도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혼간지와 적대하는 승단을 지원하고, 혼간지 소속의 승병이 벌인 범죄를 백성들에게 크게 알리고, 혼간지 세력의 돈줄을 끊고 등등,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9년을 버티던 혼간지는 막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모리 가의 무라카미 수군이 오다 가의 구키 수군에게 패하면서 해상을 통한 지원도 끊겨버린다.

아들 코뇨는 끝까지 저항할 것은 주장했으나, 켄뇨는 혼간지를 엔랴쿠지처럼 불바다로 만들 수는 없다면서 저항을 포기했다. 1580년 오기마치 천황에게 중개를 맡겨 화친을 청했고, 소유하던 땅의 많은 부분을 천황[4]과 오다에게 바쳐 화친을 맺었다. 이후 켄뇨는 측근 간부진을 데리고 사기노모리 별원[5]으로 이동했으며, 이때 불상을 비롯한 각종 재물, 그리고 상당수의 신도들이 함께했다.

오다 가는 혼간지라는 노른자위 땅을 얻었기 때문에 켄뇨를 끝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 오다 가도 피해를 제법 받았지만 화친을 했고 다른 적들도 남겨둔 상황이었으니 힘을 아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켄뇨가 떠난 다음에 혼간지에 불이 나서 수많은 집과 땅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켄뇨가 약속을 저버리고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다고 분노했는데, 켄뇨 쪽에서 급히 사신을 보내서 모든 것은 오해라고 설명했다. 혼간지에서 벌어진 화재와는 무관하며, 이제는 오다에 맞설 수준의 세력도 아니고 화친까지 맺었는데 왜 굳이 불을 지르면서 뒤끝을 부리겠느냐는 말이었다. 이에 노부나가는 화재 현장을 엄밀히 조사할 것을 명했는데, 1년 동안 대대적으로 조사한 끝에 정말 자연적으로 발생한 화재였다고 결론이 난다. 결과를 보고받은 노부나가는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잿더미가 된 도시를 다시 재건하고 그 동안 백성들을 돌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출이 소모되는지는 구태여 말할 것도 없었다.

2년 뒤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 히데요시와 화친하여 덴만 혼간지를 건립하였으나 교토 주라쿠다이에 히데요시를 비웃는 낙서를 한 사건이 터진다. 낙서를 한 범인이 바로 덴만 혼간지 세력으로 달아났다는 정보와 같이 히데요시가 추방한 호소카와 아키모토를 덴만 혼간지에서 숨겨줬다는 의혹을 받자 히데요시는 병력을 보냈고 낙서를 한 범인을 숨겨준 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켄뇨도 영주 권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1591년 히데요시로부터 교토에 사원 부지를 받아 혼간지를 건립하였고 1592년 49살로 사망한다.

이시야마 전투 때 노부나가에 대한 의견을 놓고 아들들인 쿄뇨와 쥰뇨가 서로 대립을 벌여왔는데 켄뇨의 사후 강경파였던 쿄뇨 대신 화평파인 쥰뇨가 12대 법주가 되었다. 때문에 쿄뇨는 이에 반발하여 히가시혼간지(동 본원사)를 새로 세웠고 이 때부터 혼간지는 쿄뇨의 히가시혼간지와 쥰뇨의 니시혼간지(서 본원사)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때 쿄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고, 도쿠가와는 혼간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히가시혼간지의 건설을 지원해주었다.

3. 대중매체

노부나가와 기나긴 전쟁을 벌였던 행적 때문에 노부나가가 주인공인 창작물에서는 주요 적대 포지션으로 등장하는 인물. 전국시대 기반 창작물에서 종종 거물급 무장으로 등장하는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같은 인물 이상의 은근한 흑막 포스를 보여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승려 신분 때문인지 종교적 이미지가 가해져서 뭔가 요승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1] 이 노슌니는 다케다 신겐의 정실 산죠부인의 동생이다.[2] 노부나가의 시노비가 대표적.[3] 애초에 정토진종이 신라 원효대사의 영향을 받아 만민구제를 내세워 성장한 종파였고, 따라서 농민들이나 상공업자의 지지에도 많이 의존한 편이었기 때문에 민심을 얻고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4] 이것은 중개를 해준 천황에게 제공하는 상징적인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5] 현재의 와카야마시에 소재. 현재도 동일한 명칭으로 남아있다. # 물론 현재의 건물은 1948년 다시 건축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