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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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네유 장 프랑수아 하이만스[1] | 게르하르트 도마크 | 수상자 없음[2] |
게르하르트 요하네스 파울 도마크 Gerhard Johannes Paul Domagk | |
출생 | 1895년 10월 30일, 브란덴부르크 주 라고프[3] |
사망 | 1964년 4월 24일 (향년 68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베르베르크 |
국적 |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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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독일의 병리학자로, 인솔로 프리츠 미치(Fritz Mietzsch), 요제프 클라러( Josef Klarer)와 연구하여[4] 설폰아마이드(sulfonamide)계[5] 항생제의 일종인 프론토실(prontosil)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6] 1939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2. 생애
분명 1939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긴 했으나, 문제는 당시 나치 독일이 자국민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수상을 금지했다는 것이었다.[7] 결국 그는 영문도 모른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0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출소했고,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인 1947년에서야 받을 수 있었지만 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8][1] 혈맥동(sinus)과 대동맥의 호흡 조절 기작 연구.[2]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3] 현재 폴란드 루부스키에 주 시피에보진 시 와고프[4] 이 두 학자들은 어릴적 가족을 패혈증으로 잃은 아픈 사연이 있어 도마크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5] 우리가 흔히 아는 설파제를 말한다.[6] 동물 임상시험을 통해 프론토실의 성능을 입증한 시점에서 그의 딸 힐데가르트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들던 중 바늘에 찔려 패혈증으로 사경을 해메자 곧바로 딸에게 프론토실을 투여하여 실용성을 입증했다.[7] 이는 반나치 운동을 벌이다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193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히틀러가 격분했기 때문이었다.[8] 이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서 노벨상 수상 자격자가 1년 안에 상금을 청구 및 수여받지 않을 경우 해당 상금을 무효처리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