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거트루드 마거릿 로시언 벨 Gertrude Margaret Lowthian Bel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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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68년 7월 14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럼주 워싱턴 (現 영국 잉글랜드 타인 위어주 선덜랜드 워싱턴) | |
| 사망 | 1926년 7월 12일 (향년 57세) |
| 이라크 왕국 바그다드 | |
| 직업 | 작가, 탐험가, 고고학자 |
| 국적 | |
1. 개요
영국의 작가, 탐험가, 고고학자로 평생 중동을 탐험하고 지도를 만들었으며 광범위한 여행을 통해 얻은 지식과 인맥 덕분에 아랍 전문가 로서 영국 제국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생애
거트루드 벨은 1868년 영국 더럼의 부유하고 교육열이 높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지적 탐구심과 모험심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성장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해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뒤 문학, 등반, 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며 세계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중동 지역에 대한 깊은 매혹을 느껴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를 수차례 방문하며 고고학적 조사와 지리적 탐사, 현지 부족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다.이를 통해 영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중동의 문화와 사회 구조, 정치 상황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학계와 정계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보기관과 아라비아국에서 자문관, 분석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아랍 민족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영국의 중동 정책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와 함께 새로운 국가 질서를 구상하며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이라크 국가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하여 국경 획정, 행정 체계 설계, 국왕 파이살 1세의 즉위 지원 등 국가 기반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남겼다.
영국군이 1917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벨은 콕스의 요청으로 그곳에 소환되어 CBE 훈장을 받고 활동을 이어갔으며, 1918년 콕스가 떠난 뒤 행정 책임자가 된 윌슨과 처음에는 의견이 비슷했지만 1919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자치 문제를 두고 점차 대립하게 되었고, 벨은 프랑스와 영국의 평화협상 현장과 중동 여러 지역을 돌아보며 아랍 자치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반면 아놀드 윌슨은 영국의 직접 통제를 선호해 갈등이 깊어졌고 결국 1920년 여름 시아·수니 부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벨은 이를 윌슨의 오만한 통치 탓으로 돌렸다가 같은 해 10월 콕스가 돌아오면서 벨은 다시 동양국 비서로서 아랍 정부와의 중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전쟁과 재정난으로 피로해진 영국 정부는 비용 절감 차원에서 이라크의 자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처칠이 1921년 카이로 회의를 열었고 벨은 콕스와 로렌스와 함께 이 회의에서 영국 위임통치 지역의 국경과 통치 방식을 논의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벨은 트랜스요르단과 이라크에 하심 가문 왕정을 세우는 ‘샤리프안 해법’을 적극 지지했고 파이살이 이라크를 통합할 적임자라고 보았으며, 회의에서 모술 문제[1]로 한때 패했지만 이후 국민투표 과정에서 친파이살 쿠르드 엘리트를 확보함으로써 결국 모술을 이라크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고 1926년 터키와의 앙카라 조약으로 확정되었으며, 벨은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하려는 영국의 결정과 시온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며 밸푸어 선언이 현실과 동떨어진 위험한 정책이라 비판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벨은 이라크 국가 구성의 핵심 설계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영국 제국 정책과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서 복잡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샤리프안 해법으로 파이살이 이라크 왕으로 추대되자 벨은 잠재적 반대자였던 탈리브를 콕스에게 제안해 체포·추방하게 했고, 이후 1920년대 내내 영국 고등판무관부 자문단의 핵심으로서 파이살 즉위 초기 이라크 행정 전반에 관여하며 부족 지리, 지도층 정보, 현지 정치 조언을 제공했고, 알카툰이라 불리며 파이살과 영국·아랍 엘리트 간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국기와 왕기 디자인까지 제안하는 등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도 관여했으며, 시아·수니·쿠르드·유대인·아시리아인 등 다양한 집단을 하나의 국가로 묶기 위한 통합 과업 속에서 시아파의 지지를 확보하는 문제를 가장 큰 과제로 보면서도 시아 지도자들과 문화적 제약 탓에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고 시아파가 정권을 잡으면 신정체제로 흐를 것을 우려해 수니 중심의 통치를 지지했으며, 왕과의 협업이 쉽지 않음을 토로하면서도 실무를 계속 맡았다.
동시에 고고학적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 박물관 설립을 주도하고 문화재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등 학자로서의 사명감도 놓지 않았으나, 전쟁과 정치적 갈등, 책임감 속에서 지친 마음과 건강 악화가 겹쳐 1926년 바그다드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3. 여담
- 파이살 국왕은 1930년 1월 바그다드 고고학 박물관의 일부를 벨 기념관으로 헌정했다.
[1]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면서 모술 지역의 영유권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두고 영국과 신생 터키 공화국이 벌인 국제적 분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