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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7-12 01:12:21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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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암살

1. 개요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Гали́на Васи́льевна Старово́йтова, 갈리너 바실리예브나 스타로보이토바)는 소련, 러시아의 민속학자이자 정치인이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러시아 대통령 소속 민족문제 자문위원으로 지냈으며, 1995년부터 1998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으로 재직했다.

스타로보이토바는 정치인으로써 주로 인권 활동, 러시아 내 소수민족 권리 보호에 전념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문제가 되던 오세티아 갈등, 체첸 전쟁 등에 평화적인 해결을 호소하면서 주목받았다. 1998년 11월 2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택을 나서던 중 암살당했다.

2. 생애

스타로보이토바는 1946년 5월 17일 소련 러시아 공화국 첼랴빈스크에서 태어났다. 1966년 레닌그라드 군사기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1971년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심리학부를 졸업했다. 1976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민속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압하지아와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민속학, 인류학 연구에 전념했다.

스타로보이토바는 1989년 아르메니아에서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개혁파 정치인들이 모여있던 지역간모임(Межрегиональная группа, Inter-regional group)에 참여, 안드레이 사하로프, 보리스 옐친 등과 함께 신연방 헌법 구상에 참여했다. 당시 스타로보이토바는 소련 내 소민족갈등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개혁파 의원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 공로로 1990년 러시아 공화국 인민대표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러시아 대통령 소속 민족문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소련 독립 후 수많은 지역에서 자치권 및 지역이권 요소를 가지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스타로보이토바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프리고로드니 지방을 둘러싼 북오세티아인구셰티야 공화국 분쟁, 체첸 분쟁트란스니스트리아 분쟁에 있어 협상을 주선했다. 스타로보이토바는 1992년 당시 옐친이 북오세티아-인구셰티야 분쟁에서 친러 분위기가 강했던 북오세티아에 프리고로드니 지방을 넘긴 일을 비판했으며, 체첸 독립문제를 두고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친러계 인구가 몰도바 정부와 갈등을 빚자, 둘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기도 했다.[1]

이후 정치인을 그만두고 잠시 학문 활동에 전념하다가, 19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구에서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활동을 제개했으며, 탈공산화법, 소련 시절 정치범 복권, 양심적 대체복무 강화 법안 등을 제출했다. 특히 스타로보이토바는 제1차 체첸 전쟁에서 군인권단체였던 병사들의 어머니(Солдатские матери)와 함께 반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을 다룬 AP통신 영상

당시 체첸전에서 러시아군에서는 열악한 재정상황과 군 내 만연한 부패 때문에 포로 석방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체첸 반군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은 반군에게 잔인하게 참살당하거나, 이를 보다못한 병사의 가족이 석방을 위해 반군에 몇백 달러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등 전반적으로 병사들의 대우가 열악했다. 스타로보이토바는 당시 체첸 반군들과 협상해 200명 이상의 러시아 병사들이 석방되도록 하는 한편, 러시아 보건부로 하여금 병사들을 위한 진료를 늘리도록 기여했다.

3. 암살

스타로보이토바는 옛 소련 공산당 시절 고위 간부들의 청산을 주장했던 몇 안되는 정치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92년에는 최고회의에서 청산법(Закон о люстрации)을 제출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국회를 장악했던 공산당 계열 세력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특히 스타로보이토바는 1998년 옛 KGB 출신 인사이자, 당시 FSB 국장이었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의 총리 지명을 반대하면서 반대 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98년 11월 20일, 남편이었던 루슬란 린코프와 함께 자택에서 총을 맞은 채로 발견되었다. 린코프는 다행히 병원으로 호송되어 살 수 있었지만, 스타로보이토바는 숨을 거두고 만다.

그녀의 장례식

장례식에는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이었던 아나톨리 소브착, 소련 시절 당시 반체제 인사였던 발레리야 노보드보르스카야 등이 참여해 간소하게 치러졌으며, 니콜스코예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1] 하지만 당시 이들 분쟁이 전쟁으로 흘러가면서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