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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30 08:42:28

제아네트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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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제아네트 하라
Jeannette Jara
파일:Jeannette_Jara,_2022.png
본명 제아네트 알레한드라 하라 로만
Jeannette Alejandra Jara Román
출생 1974년 4월 23일 ([age(1974-04-23)]세)
칠레 인디페덴시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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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종교
직업 변호사, 공무원, 정치인, 사회운동가
소속 칠레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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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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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운동권 시절4. 정치 활동5. 2025년 대선

1. 개요

칠레의 법조인, 공무원, 정치인. 칠레 공산당(이하 공산당) 소속으로 가브리엘 보리치 정부의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2025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며, 여당연합인 칠레를 위한 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2. 생애

산티아고시 콘찰리 구에서 세르히오 하라와 제아네트 로만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은 정비공이고 모친은 평범한 가정 주부였다. 부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댁에서 자랐는데 수돗물이 안 나왔던 것으로 봐서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농장과 노점상에서 알바를 뛰기도 했으나 수입 또한 시원찮았던 모양. 칠레 교황청 가톨릭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중간에 칠레 산티아고 대학교로 전학가서 행정학을 전공했다. 다만 이후 칠레 중앙대학교에서 법학을 추가로 전공하여 본인이 원하던 법 공부는 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운동권 시절

학창 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1989년 칠레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칠레는 악명 높은 군사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통치를 막 벗어난 직후였으며, 하라는 피노체트 집권기에 초토화된 학생운동 조직들을 재건하는 운동가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이끄는 중도좌파 정부가 출범했지만, 그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산티아고 대학교 재학 중 학생회장에 선출되었는데, 상대 후보가 당시 집권 연정의 한 축인 사회당 계열이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캠퍼스에서 발생한 학생회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라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공무집행방해 자체가 중대한 문제였기에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행정부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불러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석방되었다.

프레이 대통령도 이념적으로는 좌파로 분류되지만, 당시 칠레 정치의 현실을 고려하면 같은 좌파라고 해서 서로 협력하는 구조는 아니었다. 칠레는 다당제가 공고하여 비슷한 성향의 정당들이 연합을 이루는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한다. 단, 성향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연합에서 배제되는데, 프레이는 중도좌파 정부의 수장이었지만 그가 속한 기독교민주당은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정당이다. 단지 사회당 등 중도좌파 정당들과 연합하면서 중도좌파 블록으로 분류될 뿐, 정치적 실체는 오히려 당시 90년대말부터 2000년대초까지의 국민의 정부 시절 민주당계 정당에 더 가까웠다. 반면, 공산당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정권 타도를 외치는 급진 노선을 고수했으니, 제도권 여당 입장에서 하라 같은 극좌 운동권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2]

그러나 이러한 극좌 운동권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이미 민주화가 정착한 시점에도 정권 타도 노선을 고집하는 운동권에 대해 국민 여론은 처음에는 동정적이었지만, 점차 현실감각을 잃은 급진 행보에 피로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2000년에는 프레이보다 한층 명확한 중도좌파 성향의 리카르도 라고스가 집권하면서 운동권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

결국 하라 역시 현실을 직시하고 운동권 활동을 그만뒀다. 이후 평범한 공무원으로 일하며 한동안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4. 정치 활동

그렇게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나 싶었지만... 2016년 미첼 바첼레트 정부의 사회안전국장(차관급)으로 등용되었다. 다만 이는 쉽게 말해서 정무직공무원으로, 신분이 정치인인 것은 절대 아니다. 공산당 당적만 보유하고 있었을 뿐... 이후 2021년 본인의 고향인 콘찰리 구청장 후보로 출마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나 낙선했다. 다만 이 때 자신과 비슷한 극좌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나마 위안. 물론 오랜 앙숙이던 극좌파와 중도좌파가 연합한 좌파 대연합 정부였지만.

2022년 보리치 정부의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주40시간 근무제 도입, 직장 내 괴롭힘 근절, 연금제도 개혁 등 보리치 정부의 노동개혁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특이한 점은 하라 본인은 공산당 소속에 극좌 성향이었고, 보리치 정부 또한 전반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좌익 성향을 드러냈지만, 언급된 노동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우파[3] 야권과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이 덕분에 하라의 행보가 더욱 더 빛을 발했고, 졸지에 잠룡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5. 2025년 대선

2025년 4월 7일 공산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이에 따라 노동사회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6월 29일 칠레를 위한 연합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여 최종적으로 여당 후보가 되었다.

이번 칠레 대선 경선과 결과는 여러 면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가장 큰 이유는 좌파 진영의 전례 없는 단일화 과정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칠레의 중도좌파와 급진좌파는 대선에서 각기 다른 후보를 내세워 왔다. 2021년 대선만 해도 이 구도는 유지되었으며, 중도좌파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고 탈락한 급진좌파 후보가 중도좌파를 지지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급진좌파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결선에 오르고, 중도좌파 후보가 탈락 후 급진좌파 보리치 후보를 지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결국 보리치는 그 공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보리치 정부는 극히 낮은 지지율로 고전했고, 그 여파는 범좌파 전반을 강타했다. 범좌파의 잠재적 대권주자들은 하나같이 저조한 지지율을 보였고, 그 사이 중도우파의 에벨린 마테이와 극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가 견고한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좌파 후보들의 지지율을 모두 합쳐도 우파의 두 후보 중 한 명의 지지율에 미치지 못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좌파가 결선에서 아예 탈락하고 우파 후보 둘만 올라갈 수 있다는, 2002년 프랑스 대선의 좌파 전멸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범좌파가 실패하면 구도가 완전히 깨질 상황이었기 때문에, 좌파 진영은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전례 없는 단일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이례적이었던 점은, 경선에서 승리한 하라가 애초부터 강력한 대권주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론조사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지지율은 다른 여권 주자들과 비교해도 특히 높지 않았고, 범좌파권 내에서도 약체로 분류되었다. 후보난이 심각하다 보니 일부에서는 대통령을 두 차례 지낸 미첼 바첼레트에게 다시 출마해 달라는 요구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바첼레트는 세대교체를 이유로 완주 의사가 없다고 밝히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대안을 발굴해야 했는데, 그나마 제기된 현실적 선택지는 중도좌파계의 카롤리나 토아 정도였다. 하라는 이 대안 후보군 안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런데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상황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이변 중의 이변으로 하라가 최종 후보로 선출되면서, 좌파 진영 내부는 물론 정치권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경선과 결과가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적인 좌파 전략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약체로 평가받던 인물이 깜짝 후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범여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이후 지지율이 20% 후반대에서 30% 초반대로 상승하면서 1위로 올라섰다. 오히려 한때 강력한 지지율을 자랑하던 마테이는 3위 자리조차 위태로워질 정도로 밀려났고, 보리치의 처참한 인기를 고려하면 이례적이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문제는 결선. 1차에서는 1위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2차에서 승리 가능성이 불확실한 상태. 현재로서는 카스트랑 맞붙을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문제는 결선 여론조사에서는 카스트한테 줄곧 밀리고 있는 중이다. 설령 마테이나 파리시 등 다른 우파 후보들과 맞붙는다고 해도 대부분 하라가 밀리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11월 16일, 1차 투표 개표 결과, 26.9%로 1위를 차지해 카스트와 결선투표로 진출했다. 다만, 하라 캠프 내에선 기대보다 저조한 득표율에 다소 실망한 표정이고[4] 다음날 Panel Ciudadano가 발표한 첫 결선투표 여론조사에서 카스트에 22%p 차로 밀리는 것으로 나오며 당선 가능성은 더 희박해보인다.
[복수전공] [2] 김대중 대통령 역시 집권 후 한총련 등 극좌 운동권을 강경하게 단속한 전례가 있다.[3] 중도우파 및 극우 둘 다[4] 이 득표율은 1차 투표 전 여론조사 결과보다 낮다. 반면에 우파는 2위 카스트, 4위 카이세르, 5위 마테이까지 범우파 후보의 득표율을 모두 합하면 50%로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가 난다. 지금 최대 관건은 3위 파리시가 득표한 20%의 표가 어디로 가느냐인데, 파리시도 기본적으로 중도우파 성향인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 카스트 쪽으로 갈것이란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