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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10:06

헨리 르 스크루프(초대 스크루프 남작)

성명 헨리 르 스크루프
Henry le Scrope
생몰년도 1312년 9월 29일 ~ 1391년 7월 3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메섬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민스터
아버지 제프리 르 스크루프
어머니 이베트 드 로스
형제 제프리, 윌리엄, 토머스, 스티븐, 베아트리체, 콘스탄스, 이베트
아내 조앤
자녀 제프리, 스티븐, 리처드, 조앤, 이사벨라
직위 메섬의 스크루프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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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1312년 9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메섬에서 잉글랜드 대법원장으로서 에드워드 2세에드워드 3세 치세에 활약했고 말년에 백년전쟁에 참여하여 전사로서도 활약했던 제프리 르 스크루프와 기원이 불분명한 이베트 드 로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헨리[1], 윌리엄[2], 토머스[3], 스티븐[4], 베아트리체[5], 콘스탄스[6], 이베트[7]가 있었다.

1333년 스코틀랜드에 대항한 원정을 벌인 에드워드 3세에게 가담해 베릭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할리든 힐 전투에 참전해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1335년 북부 전선에서 복무했고,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 참여했다. 134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섬을 포함한 노팅엄셔에 있는 여러 부동산의 소유자가 되었다. 1342년 에드워드 3세의 브르타뉴 원정에 가담한 후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된 랄프 드 우퍼드의 지휘하에 아일랜드에서 복무했다. 1345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일부 기록은 그가 1346년 크레시 전투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기수로 싸웠다고 주장하지만, 역사가들은 이것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1347년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이후 몇 년간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복무했으며, 1350년 윈첼시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을 격파하는 데 참여했다.

1350년 11월 스크루프 경으로서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고, 이후로 메섬의 초대 스크루프 남작에 선임되었다. 1354년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잉글랜드 대사가 되었고, 1355년 피카르디 방면 군대에 복무했으며, 1357년 스코틀랜드 전선의 주요 요충지인 베릭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후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석방 조건을 협상하는 위원회에 포함되었고, 1359년 곤트의 존 휘하에 들어가 샹파뉴 전선에서 활약했다. 1360년 파리 인근에서 기동하는 군대의 일원이었으며, 1361년 칼레와 기옌의 소장을 맡아 1370년까지 그 직을 맡았다. 1365년 예루살렘으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항 공략전에 참여했고,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했다.

1369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자 곤트의 존 휘하에 들어가 프랑스 전선에서 활동했다. 1370년 스코틀랜드-잉글랜드의 서부 국경 수비대 지휘관에 선임되었고, 1371년 왕실 관리자로 선임되었다. 1377년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한 후 새 국왕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돌볼 섭정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요크셔와 노섬벌랜드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했다. 말년에 은퇴 후 자기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고, 1391년 7월 31일에 사망한 뒤 요크셔의 민스터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383, 링컨 대성당의 정경[2] ? ~ 1367, 기사[3] ? ~ 1340년 이전, 기사[4] ? ~ ?, 이름만 언급됨[5] 링컨셔 출신의 기사 앤드류 루트렐의 부인[6] 링컨셔 출신의 기사 제푸리 루트렐의 부인[7] 존 드 호톰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