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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0:43:52

해리 파

해리 파(병사)에서 넘어옴

파일:Harry Farr.jp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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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리 파(영어:Harry Farr, 1891년 ~ 1916년 10월 18일 계급:일병)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병사였다. 명령 불복종으로 25살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후 2006년 영국 정부에 의해 특별 사면되었다.[1]

2. 생애

해리 파는 1891년에 태어났다, 이후 그는 1908년 영국군에 정규군으로 입대하였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하자, 영국 원정군 제2대대에 소속되어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1915년, 그의 진지는 지속적으로 포격을 맞았고, 그해 5월, 해리 파는 독일군의 포격을 맞고, 그후, 급하게 피하면서 생긴, 심각한 경련으로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항상 몸을 떨었고[2], 그는 총소리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3] 우리는 그에게서 편지를 받았지만 그것은 낯선 사람의 필체였습니다. 글씨는 잘 썼지만 손이 떨려서 펜을 잘 잡지 못했습니다.[4] - 그의 아내 게르투르드

2.1. 솜 전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 파는 영국 원정군 제6보병사단 제1대대로 재배치 되었다. 당시 6보병사단은 솜 전투에 참전 중이였다. 해리 파는 자신의 상관에게 무려, 재배치되고 나서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병을 이유로 되며, 야전 병원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해리 파의 상관은 오히려 겁쟁이라며 놀리거나, 군법 재판에 회부되고 싶냐고 오히려 해리 파에게 소리를 질렀다.

1916년 4월, 그는 그의 상태로 인해 2주 동안 야전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후, 1916년 7월 22일 그는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퇴원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들은 그가 정상이고, 꾀병을 부린다 생각했다.

1916년 9월 17일, 그의 심각해진 병 때문에 그는 야전 병원으로 후송되어야 했지만, 야전 병원이 이미 환자들로 가득했고, 또한 해리 파의 상관은 그가 물리적으로 다치지 않았고, 또한 이미 그의 대대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해리 파를 병원으로 보내주고 싶어도 그럴수 없었다. 그날 밤, 해리 는 밤 8시에 보금 운송 반에서 근무를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되었다. 이후, 밤 11시에 해리 파가 발견되자 상관은 화를 내며, 최전선 복귀를 명령했지만, 해리 파는 또 자신의 병을 이유로 들며 최전선 복귀를 거부했다.

1916년 10월, 그후 그 즉시 해리 파는 헌병에게 체포되어, 이후 군사 재판에 넘겨졌다.

2.2. 군사 재판 및 사형

"적 앞에서 비겁함을 보일 정도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 해리 파의 죄명
군사 재판은 영국 원정군, 제 6사단, 제11연대 사령관 프레더릭 스프링 중령[5][6]이 판사로서 진행되었다. 재판은 겨우 20분 밖에 진행이 안되었고, 질문은 대부분 해리 파의 비겁함의 대한 것이 였다. 그리고 20분후, 해리 파는 사형을 선고받고, 최종적으로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 장군이 사형 선고에 서명을 함으로, 해리 파는 1916년 10월 18일, 오전 6시, 솜 근처에서 총살형을 집행받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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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파의 사형 선고서
사형선고 (DEATH CERTIFICATE)
나는 죄수번호 8871번, 제 6사단, 1대대, 서 요크시어 연대 소속, 해리 파 일병에게 10월 18일, 오전 6시, 카르노이[7]에서 총살형을 즉시 집행하도록 선고한다.
프레더릭 스프링 중령(서명)

[1]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아예 없지만, 영연방 국가에서는 해리 파의 사연은 꽤 유명한 편이다. 또한 쉘쇼크PTSD가 유명해진 것도 해리 파의 사연이 한몫했다.[2] 셸쇼크[3] 수십년이 지나 그가 청각과민증과 청각 원심성 기능 장애를 앓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 당연하지만 해리는 손이 떨려서 글씨를 스스로 잘 쓸 수 없었다. 글씨를 잘 썼던 이유는 해리 자신이 쓴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5] 프레더릭 스프링 중령은 무고한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본인은 85세까지 장수하며 평생 잘먹고 잘살았다. 심지어는 이 재판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훈장까지 수여받았다...[6]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어느 정도 이해는 할수 있다. 당시에는 쉘쇼크라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7] 솜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