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버 왕국 Königreich Hannover | ||
국기 | 국장 | |
1814년 ~ 1866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베스트팔렌 왕국 | 프로이센 왕국 | |
수도 | 하노버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언어 | 독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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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노버 왕국은 19세기 독일 북부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하노버의 위치는 현재 독일의 니더작센 주이며, 구 하노버 영토의 85%가 현재의 니더작센 주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하노버 선제후국을 거쳐 하노버 왕국이 되었다.전성기 하노버의 영토는 면적이 40,000제곱 킬로미터 정도로 벨기에보다 크고 현재의 네덜란드, 덴마크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 내의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절반 수준이었으며 웨일스보다 조금 더 컸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하노버는 독일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에 은근 슬쩍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시절 하노버 왕국은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에 이은 다섯 번째 규모의 대국이었으며, 근대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독일사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당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에서 보다시피 하노버의 무게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다만 영국, 프로이센 등 열강이 주도하는 연합에 하노버가 수동적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역사 서술 관점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편이다.
2. 역사
하노버는 독일 역사에서 오랫 동안 공국으로 존재했었다. 독일 연방 내의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왕국으로 승격된 후의 기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짧았다.2.1.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하노버 왕국 지역은 중세 5대 부족 공국 시절의 작센 공국 영토 중 일부를 계승하고 있다. 12세기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은 작센 공국과 바이에른 공국을 지배하며 신성 로마 제국 최고의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반목한 끝에 롬바르디아 원정을 돕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180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제국추방령을 선고 받아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벨프 가문이 다스리던 방대한 영토는 몰수된 후에 바이에른 공국은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증여되었고, 작센 공국은 안할트의 아스카니아 가문, 쾰른 선제후 등에 의해 분할되었다.1235년 마인츠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호엔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이 화해하면서, 벨프 가문의 사유지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Herzogtum Braunschweig-Lüneburg)으로 승격되었다. 공국의 이름은 가장 큰 도시인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후 벨프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하노버 왕조도 벨프 가문의 후손들이다.
(주황색 영토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은 공식적으로는 분할되지 않은 제국 영지로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다른 공국들과 마찬가지로 분할 상속으로 인해 여러 차례 작은 공작령과 후작령으로 분할되었다가 재통합되기를 반복했다. 반복된 분할과 재결합 과정을 거치면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영지 대부분은 나중에 하노버 왕국에까지 계승되었지만, 일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작센 선제후국, 헤센 방백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과 더불어 가장 빨리 루터교회로 개종했다.
1636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로크가 수도를 하노버로 옮기면서 이때부터 하노버 공작가문이 되었다.
(녹색 영역이 1648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의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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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공작 게오르크가 1641년 죽자 그의 장남인 크리스티안 루트비히가 그 뒤를 이었으나 1665년 아들 없이 죽었다. 이후 게오로크의 둘째 아들이었던 게오로크 빌헬름이 당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뤼네부르크까지 이어 받아 새로운 공작으로 취임하는가 했지만 이 게오르크 빌헬름은 되리어 그의 동생인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주고 또 다른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뤼네부르크 공국을 물려주면서 본인은 퇴위했다. 이는 그의 부인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외손녀가 되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막내딸 팔츠의 조피와의 결혼을 피하고 자신의 정부였던 프랑스 출신 하급귀족의 딸 엘레오노르 드미에르 돌브뢰즈와의 결혼을 위해서였고, 그 사이에서 나중에 영국 국왕 조지 1세와 결혼하는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났다.
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받았던 요한 프리드리히가 1679년 아들 없이 죽자 다시금 하노버 공국의 상속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게오로크 빌헬름은 원래 결혼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형제들에게 상속지를 분할해주었으나 이젠 딸 조피의 존재로 꼬여버렸다. 물론 살리카법이 있기 때문에 유일한 남계 후손을 낳았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공국을 가져갔지만 금전 등 재산의 상속은 걸림돌이 있을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상속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겸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게오로크 빌헬름이 딸 조피 도로테아를 1682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장남인 게오로크 루트비히와 결혼시켰다. 물론 이 결혼 생활은 서로의 항목을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거의 막장에 가까웠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꽤나 정력적으로 공국을 이끌어 나갔는데 기존 하노버 공국이 브라운슈바이크 공국과 뤼네부르크 공국으로 나뉘어서 상속되었던 법을 바꾸어 단일 상속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레오폴트 1세의 편을 들어 오스만 제국과의 대튀르크 전쟁에 참가하였고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 169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로 인정받았다. 참고로 게오로크 빌헬름은 1705년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동생들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
2.2. 하노버 선제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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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 선제후 | 세속 선제후 | ||||||
마인츠1 | 쾰른1 | 트리어1 | 보헤미아 | 팔츠2 | 작센 | 브란덴부르크 | |
17세기에 추가 | |||||||
바이에른3 | 하노버4 | ||||||
1803년 이후 추가 | |||||||
레겐스부르크5 | 잘츠부르크6 | 뷔르츠부르크7 | 뷔르템베르크5 | 바덴5 | 헤센5 | ||
신성 로마 황제 1: 1803년 소멸 2: 1777년 팔츠-바이에른으로 통합 3: 1623년 선제후국 승격 4: 1692년 선제후국 승격 5: 1803년 ~ 1806년 6: 1803년 ~ 1805년 7: 1805년 ~ 1806년 | }}}}}}}}}}}} |
하노버 선제후국 Kurfürstentum Hannover | ||
국기 | 국장 | |
1692년 ~ 1807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 베스트팔렌 왕국 | |
수도 | 하노버 |
1692년 하노버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면서 하노버 선제후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사실 하노버 공국이 선제후국으로 되는 과정에는 복잡다난한 과정이 더해져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왕국의 절대왕정을 이끌던 루이 14세의 욕심이 더해진 결과였다. 1685년 칼뱅파 선제후였던 팔츠 선제후가 카를 2세의 사망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노이부르크 분가의 필리프 빌헬름이 즉위하면서 가톨릭으로 환원되었는데 루이 14세는 자신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결혼한 카를 2세의 누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가 카를 2세와 더 가까우니 필리프에게 팔츠 계승권이 있다면서 살리카법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9년 전쟁을 일으켰다.[1] 프랑스는 틈만 나면 황제선거에 간섭해서 독일을 약화시키려 했기 때문에 당대 황제였던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안정된 제위 세습을 위해 프랑스의 야심을 막고 영방국가 제후들의 지원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마침 8명의 선제후 중 가톨릭 선제후가 성직 선제후까지 더해 6명[2]이고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만 개신교 선제후였는데 작센마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출을 위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선제후 중 가톨릭과 개신교의 균형이 확실하게 깨져버리는 바람에, 제국 내 개신교도들의 불만도 잠재울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여러 정치적인 이유가 맞물려 하노버 공작은 선제후로 승격되었고, 이는 앞으로 영국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2.1. 영국과의 동군연합
1698년,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죽자 그의 아들인 게오로크 루트비히가 게오로크 1세로 하노서 선제후로 즉위했다.게오로크 1세는 혈통적으로 이전 하노버 공작과는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모계 혈통 즉 어머니인 팔츠의 조피를 통해 그레이트브리튼섬(잉글랜드 왕국과 웨일스,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와 연결이 되었다. 당시 스튜어트 왕조는 명예 혁명이후 왕가의 자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는, 이후 윌리엄 3세는 재혼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잉글랜드 의회는 자신들이 내쫓은 제임스 2세의 가톨릭 교도 자손들의 왕위 계승 즉 자코바이트를 막고자 혈안이 되어 1701년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켜 가톨릭 교도의 왕위 계승을 철저하게 막았다. 그로 인해 당시 메리 2세의 동생이었던 후에 앤 여왕이 되는 앤 공주와 팔츠의 조피만이 왕위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고 앤 여왕이 즉위하였지만 앤 여왕 자체의 병으로 인하여 남편 덴마크의 외르겐 왕자와의 사이에서 자손을 남기지 못하였고 결국 사실상 다음 왕위는 팔츠의 조피가 이어 받게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게오로크 1세는 이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부터 잉글랜드 왕국[3]의 돈독한 관계를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군대를 직접 이끌고 참전하였다.
그러다 1714년 게오로크 1세의 어머니인 팔츠의 조피가 죽고 영국의 앤 여왕이 따라서 사망하면서, 그가 조지 1세로서 영국의 왕이 되어 영국과 동군연합이 되었다. 영국은 조지 1세부터 빅토리아 여왕까지 하노버 왕조라고 불린다.
조지 1세는 영국의 국왕이 되었지만 50대가 될 때까지 평생을 독일 하노버 선제후로 살았던지라, 독일에 더 관심이 많아서 독일 내에서 하노버 공국의 세력을 확대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조지 1세는 결혼[4]으로 칼렌베르크 공국을 상속받았으며, 내륙에 머물고 있던 하노버를 북해로 진출시키려는 목적에서 대북방전쟁에 참가하고 승리하여 스웨덴으로부터 브레멘-페르덴을 할양받아 하노버 영토는 북해와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지 2세 역시 독일 출생이었으며, 하노버 왕조의 왕은 조지 3세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출생하기 시작한다.[5]
2.2.2.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 혁명전쟁 와중인 1795년, 혁명정부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기겁한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와 강화를 맺었다. 이 강화에서 프로이센이 라인강 서안 영토를 프랑스에 할양하는 대신에 프랑스는 독일 중부 마인강 이북 지역에 대한 프로이센의 우선권을 보장해주었다. 이를 근거로 프로이센은 하노버를 합병해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 유럽에서 처음으로 프랑스와 강화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마음대로 퍼준 것. 이 때문에 프로이센과 영국 사이가 험악해졌으나 1806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나란히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박살난 와중에 우유부단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유럽 국가들의 압력과 자국 신하들의 요청으로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가 패망하면서 틸지트 조약으로 하노버를 프랑스에 빼앗겼다. 그리고 1807년, 하노버는 프랑스의 괴뢰국인 베스트팔렌 왕국에 강제로 합병되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노버의 장교와 군인들은 임금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14,000명의 하노버 군인들이 "왕의 독일인 군단(King's German Legion)"이라는 부대로 재편되어 영국군의 지휘 아래 싸웠다. 매우 열심히 싸웠는지 영국군에서 이들은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2.3. 하노버 왕국
1813년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영국의 조지 3세는 하노버 선제후국을 재탈환했다.[6] 1815년의 빈 회의에서 하노버 선제후국은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미 작센과 뷔르템베르크 공국는 나폴레옹에 줄을 선 대가로 1806년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노버 왕국으로 승격될 때 중세 시절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영토의 일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활약했던 왕의 독일인 군단은 재건된 고향 하노버로 귀환했으며, 새로 건설된 하노버 왕국의 군대로 복귀했다.
2.3.1. 동군연합 해체
초기 하노버 왕조의 왕들은 영국보다 고향인 하노버에 관심이 많았으나, 영국 태생의 왕들이 즉위하고 영국의 국력이 크게 신장되면서 점차 하노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조지 4세(게오르크 4세)는 하노버에서 하노버 국왕으로서의 즉위식을 따로 가졌지만, 동생 윌리엄 4세(빌헬름 4세)는 하노버를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1815년부터 1837년까지 조지 3세의 아들이자 조지 4세와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가 하노버 부왕(副王, viceroy)으로서 대리 통치했다.
1833년 영국법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면서 자유주의적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1837년 윌리엄 4세가 사망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4세보다 먼저 사망한 남동생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1767~1820)의 외동딸 빅토리아가 여왕으로 즉위했지만, 하노버에서는 살리카법에 따라서 살아 있는 남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Ernst August I)[7]가 왕이 되면서, 영국과 하노버 사이의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였고,[8] 독일의 전제군주처럼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애초에 영국은 하노버를 국왕의 사유지로 여겼었고, 과거 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처럼 합병대상으로 보지는 않았기에 하노버 왕국은 찬밥 신세였으며, 조지 3세 시절 윌리엄 대(大) 피트 총리가 대놓고 하노버는 국왕의 이해관계에 있는 땅일 뿐 영국의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며 거의 버리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 빡친 조지 3세가 그를 해임하기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계는 하노버를 암묵적으로 배제하려고 했었다. 한때 하노버가 영국의 대륙 상업 교역지로서 영국 국익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19세기가 되면서 이는 이미 옛날 이야기였다. 영국의 국력이 초강대국 수준으로 성장하고 영국 속령이 전세계 면적의 4분의 1을 점해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영국의 세계 전략 상에서는 하노버는 그다지 쓸모 없었고, 오히려 대륙의 분쟁에 휘말려들 빌미를 줄 수 있는 부담으로 작용하는 지역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은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 통일을 지지하는 편이었기에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세제의 맏아들 프리드리히 왕자[9]에게 자신의 맏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를 시집보낼 정도였다.
2.4. 멸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뒤를 이은 게오르크 5세(Georg Friedrich Alexander Karl Ernst August)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었다가 오스트리아가 패배하면서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하노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프로이센 왕국의 '하노버 주(州)'가 되었다.[10] 그리고 프로이센은 하노버 왕국의 국고를 몰수해서 바이에른 왕국에 뇌물로 그대로 넘겨주다시피 했다. 당시 바이에른의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는 이때 얻은 돈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세웠다.게오르크 5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열강들에게 하노버 왕국의 재건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일 국내에서는 하노버 왕국의 부활을 요구하는 보수주의 정치 결사 단체 독일 하노버 당(Deutsch-Hannoversche Partei)이 생겨났다.[11] 게오르크 5세는 프랑스에서 사비를 들여서 하노버 탈환을 노리고 벨펜레기온(Welfenlegion)라는 군사조직을 만들기도 했지만 프랑스마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게오르크 5세는 파리에서 사망했고 윈저 성의 채플에 묻혔다.
2.5. 멸망 이후
게오르크 5세의 장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Ernst August Wilhelm Adolf Georg Friedrich)는 친척들이 있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하노버의 왕세자이자 영국의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12]으로 활동했다. 그의 사촌인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빌헬름(Wilhelm, Herzog von Braunschweig)은 자신이 사망하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를 상속시키려 했다.하지만 프로이센 정부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하노버 왕가가 정식으로 하노버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가와 하노버 왕가가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노버 왕가와 호엔촐레른 왕가의 대립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장남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을 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조의문을 보내고 애도를 표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이에 대한 감사 인사차 마지막 남은 아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Ernst August Christian Georg)를 베를린으로 보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이때 빌헬름 2세의 외동딸 빅토리아 루이제(Viktoria Luise)와 사랑에 빠져 1913년에 결혼했다. 이에 따라 거의 반세기에 걸친 두 왕가의 갈등도 종식됐다. 결혼식 이후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아들을 위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계승권을 정식으로 포기했다. 같은 날 독일 의회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즉위하는 것을 승인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으로서의 상속권을 포기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영국에서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위를 유지하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되면서 그런대로 왕가의 체면은 차리는가 했는데…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는 독일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일군으로서 복무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에서 독일과 결탁한 하노버 왕가에 대한 이미지는 진짜 최악이 돼버렸다.(…) 결국 1917년 작위박탈법이 제정되어 컴벌랜드와 테비엇데일 공작의 작위도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1차대전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하노버 지역은 '프로이센 자유주'의 하위 지방인 '하노버 주'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연합국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어 신탁 통치를 받게 된다. 이 때 영국은 '하노버 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1946년 영국 군정은 '프로이센 자유주'의 하위 행정구역인 '하노버 주'를 독립된 주로 승격시켰다. 이어 1946년 11월 영국 군정은 하노버 주와 그 인근에 있는 브라운슈바이크 주, 올덴부르크 주, 샤움부르크리페 주를 니더작센 주로 통합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하노버 왕국은 완전히 사라졌지만,[13] 하노버 왕가 때 형성된 인맥 관계가 좀 남아 있었다고. 그 인맥 라인이 제2차 세계 대전 후 현 니더작센 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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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 독일 연방군 | 국가인민군 | |||||
독일 | 독일 연방군 | ||||||
각주 | ※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 }}}}}}}}} |
하노버 왕국군(Königlich Hannoversche Armee)은 하노버 선제후국의 군대를 계승한다. 하노버 왕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고 그 자리에 괴뢰국인 베스트팔렌 왕국이 세워지자, 기존 하노버 군대는 동군연합인 영국으로 탈출하여 영국군 휘하의 왕립 독일인 군단을 구성했다.
전쟁이 끝나 하노버가 복구되고 왕국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국군에 가담했던 기존의 하노버군도 돌아왔다. 재창설 이후에는 독일 연방군의 일원이었으며, 약 13000명의 병력을 보유해 연방군 내에서도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에 뒤이어 6위 규모였다. 근위대까지 포함해 8개 보병연대와 6개 기병연대, 그리고 1개 포병여단을 주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866년 발발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였고, 하노버가 프로이센에 흡수됨에 따라 하노버군도 다시 해체되었다. 하노버의 연대들은 프로이센군에 흡수되었는데, 양국의 적대적인 관계 때문에 이들은 기존 하노버 시절의 전통을 잇는 것을 금지당했다. 이 조치는 1899년 하노버 왕조와 호엔촐레른 왕조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해제되었다.
4. 역대 국왕
하노버 국왕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 0px solid; margin-bottom: -15px;" | <rowcolor=#191919>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게오르크 3세 | 게오르크 4세 | 빌헬름 4세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 게오르크 5세 |
- 게오르크 3세: 재위 1814~1820
- 게오르크 4세: 재위 1820~1830
- 빌헬름 4세: 재위 1830~1837
-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재위 1837~1851
- 게오르크 5세: 재위 1851~1866
5. 관련 문서
[1] 실제 9년 전쟁의 원인은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패퇴해 대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여 오스만 제국이 수세에 몰리자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놓고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는 어려우니 어떻게든 명분을 쥐어짠 결과가 팔츠 선제후국의 계승 문제였다. 살리카법 때문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인줄 알면서도 강행한 것이다.[2]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3인의 성직 선제후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동군연합으로 준세습하고 있던 보헤미아 국왕,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과 팔츠.[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점에서는 아직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이었다. 두 나라가 오늘날의 영국이 되는 것은 1707년 통합법 발표 이후이다.[4] 앞서 언급한 조피 도로테아와의 결혼.[5] 조지 2세의 장남이자 조지 3세의 아버지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 역시 하노버에서 태어났다.[6] 다만 이 당시 조지 3세는 정신병 발병으로 훗날 조지 4세로 즉위하는 왕세자가 섭정중이었다.[7] 영어식으로는 어니스트 어거스티스 1세(Ernest Augustus I).[8] 그 여파로 괴팅겐 7교수 사건이 발생했다.[9] 훗날의 프리드리히 3세.[10]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주′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우리가 알고있는 자치권이 보장되는 오늘날의 독일의 주가 아닌 한국으로 치자면 도와 같은 개념이다.[11] 이 당은 나치당이 금지할 때까지 지속되었다.[12] 이는 하노버 국왕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가 영국 왕족으로서 얻은 작위이며, 그의 아들 게오르크 5세부터 대를 이어 아들에게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는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3세의 5남으로, 그의 후손인 하노버 왕가의 남자들도 영국 왕자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13] 1차대전 종전 전에는 프로이센 왕국령 하노버 주, 1차대전 종전 후에는 프로이센 자유국(Freistaat Preußen; Free State of Prussia) 산하의 하노버 주(Provinz Hannover; Province of Hanover)로 대체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