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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무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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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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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태종 무열왕 표준영정[1]
출생
(음력)
603년[2][3]
신라 금성
사망
(음력)
661년 6월 (향년 58세)
신라 금성
능묘 영경사 북쪽(永敬寺 北) 무열왕릉
재임기간
(음력)
상대등[4]
연대 미상 ~ 647년 이후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29대 국왕
654년 3월 ~ 661년 6월 (7년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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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 강릉 김씨[5]
춘추(春秋)
부모 부왕 문흥왕
모후 천명공주
왕후 문명왕후 김문희
자녀 태자 김법민
왕자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
왕녀 김고타소[6], 딸[7], 김지소[8], 딸[A], 딸[B]
서자 김개지문, 김차득, 김마득, 김거득
서녀 요석공주(?)
종교 불교
묘호 태종(太宗)[11]
시호 무열대왕(武烈大王)[12]
골품 진골(真骨)
관등 대아찬(大阿飡)[13]
이찬(伊飡)
직위 상대등(上大等)[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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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릉비

1. 개요2. 묘호시호3. 생애4. 평가5. 가계6. 여담7. 《삼국사기》 기록8. 대중매체에서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29대 국왕.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15]로, 선덕여왕의 조카이다.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골품제라는 신라의 특수한 사정상 즉위 직전까지 태자 및 후계자가 아니었으며, 마지막 성골진덕여왕이 승하한 후 화백회의의 합의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16]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관, 정치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서 태종 무열왕이라는 묘호와 시호 외에 본명인 김춘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정치사로 보면 제36대 혜공왕 대까지 이어지는 신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신라 중대 왕실시조격이 되는 임금이기도 하다. 태종 무열왕은 그의 행보와 업적에 대해 후술되어있듯 여러 상반된 평가들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7세기 당시 김춘추를 빼고 한반도 정세를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핵심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라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묘호시호


문헌기록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묘호 중에서 주인이 명확하게 확인된 둘뿐인 묘호로,[19][20][21] 금석문까지 종합할 경우, 태조 성한왕,[22] 열조 원성왕[23]과 함께 신라 당대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세 명의 군주 중 한 명이다.

신라 이후의 기록에서 묘호가 확인되는 것은 추존세조(世祖) 김알지(링크) 등 몇 명이 더 있으나, 신라 당시에 김알지를 세조로 추존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태종이라는 묘호에 대해서는 손자 신문왕(神文王) 때 당 고종이 “우리 태종께서는 위징(魏徵) · 이순풍(李淳風) 등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는 대업을 이루셨기에 태종이라 하였는데, 너희 신라는 바다 밖에 있는 소국 주제에 '태종'이라는 묘호로 천자의 칭호를 참칭하니 그 뜻이 불충하다. 고쳐라”라고 요구했는데, 신문왕은 “당 태종께서 위징을 얻어 천하를 평정하신 것처럼 우리 태종께서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셨기에 태종이라 했습니다”라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삼국사기에는 이후에 다른 말이 없어서 그냥 썼다고 하고, 삼국유사에는 당 고종이 태자로 있을 때 어느 날 하늘에서 “삼십삼천의 한 명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라는 외침 소리를 듣고 기록해 두었던 것을 찾아서 확인해 보고 놀라며 태종이라는 묘호를 쓰는 것을 허용했단다.

참고로 고려나 조선이 원칙적으로 모든 군주에게 묘호를 올렸는데,[24] 신라에선 일부 군주에만 묘호를 올린 이유는 해당 시대의 묘호 관행이 고려와 조선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묘호 제도는 본래 중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원래 중국에서도 모든 군주가 아니라 일부 중요한 업적을 남긴 군주에만 묘호를 올렸다. 예를 들어 한나라의 경우도 몇몇 황제는 태조, 세조 등의 묘호가 있었지만 《삼국지》로 유명한 영제헌제 같이 업적이 없었던 황제는 묘호가 없었다. 해당 문서 참조. 《삼국지》로 한국에도 유명한 조위•촉한•동오나 사마씨의 진나라(서진, 동진)도 마찬가지로 일부 중요한 군주만 묘호를 올렸다. 중국에서 모든 군주에 묘호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부터였고, 이를 한반도에서는 고려부터 처음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에서 모든 왕이 아닌 일부 중요한 왕에만 묘호를 붙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호의 (武), (烈) 자는 유교적 시법에서 지향하는 뜻이 컸으나 곤궁함이 많았고, 그럼에도 결국 결단력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며 강대한 힘으로 공을 세워 백성들을 평안하게 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무열'이란 시호는 오(삼국시대)의 시조 손견, 서요를 중흥시킨 야율대석과 같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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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태종 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게 있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패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겨 두 번 다시 되찾지 못한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뉜다.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쪽에서는 김춘추가 신라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그 능력이 출중한 편에 속한 명군이며 그 탁월한 외교와 정무 감각을 바탕으로 신라를 양면전선의 늪에서 구해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 김춘추가 외교관으로서 입국했을 당시의 일본, 중국 측 기록을 보면, 김춘추는 공통적으로 호감가는 외모와 화술을 구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신라의 동맹이던 중국 기록은 그렇다쳐도 신라의 적국인 백제의 동맹국으로서 김춘추를 좋게 평가해줄 이유가 없는 일본에서도 저렇게 적은 것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매력과 언변으로 그는 신라를 위해 열심히 외교술을 펼쳤고, 김유신명장과 함께 정복전쟁을 벌여 몇백년째 서로를 위협하던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의 영토를 늘렸다는 것이 근현대 이전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내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허나 조선 말 실학자들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은 삼국통일 과정 중 대동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맹약을 당나라와 체결하였고,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점,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당나라에 볼모로 넘기고 당나라연호와 복식을 따르는 어찌보면 굴욕적인 조건으로 당의 지원을 받아 삼국통일을 함으로써 중세 한국사 사대주의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 등을 비판하였고[25] 단재 신채호 선생도 김춘추를 외세의존적인 음모가라고 비판했고, 반대로 김춘추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인 연개소문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며 칭찬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대야성 전투 패배의 결정적인 계기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의 막장 바보짓이었다는 것을 갖고 김춘추가 평소 자기 사위 단속도 제대로 안 해놓고 그대로 대야성이라는 국방의 요충지로 보내서 그 사단이 일어나 자기 딸 고타소도 죽었는데 괜히 그걸 나중에 백제 탓을 했다며 어리석고 옹졸하다고 까기도 한다.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한국사의 정통으로 삼는 북한학계에서도 무열왕을 깎아내리는 편이다.

그러나 이는 현대 민족주의적 시각을 고대사에 투사한 시대착오적 해석이다. 다시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백제 역시 삼국 바깥 수나라, , 기타 북방민족 등 '외세'를 삼국간의 전쟁에 불러들여 이용하려 했으며 서로가 생존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 예컨대 중국과 결탁하여 한민족계 국가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신라보다 앞선 백제의 오랜 외교 정책으로, 백제 개로왕, 위덕왕, 무왕 등은 중국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백제가 협공할테니 제발 고구려를 쳐달라고 간절히 요청한 바 있었다.[26][27] 그 외에 백제는 지식인을 대가로 왜군을 빌려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한 사실이[28] 광개토대왕릉비에도 기록되었으며, 고구려 역시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다지만 일단은 이민족인 말갈인 군대를 백제, 신라와의 전쟁에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삼국 가운데 오직 김춘추의 전략만이 성공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일정 부분 억울하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라는 김춘추의 통일전쟁 이후 영토가 과거의 몇 배로 늘어났고,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 시절에 가선 사이가 험악해진 당나라를 상대로 선제공격해 나당전쟁을 벌여 대동강 이남 권리를 확보했으며, 요동에서도 결국 발해가 들어서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나머지 고구려의 영역을 차지했다. 결국 당나라는 한반도 국가를 상대로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지만 실리가 없었고 신라만 이득을 본 채로 끝난 셈이다.[29] 그래서인지 김춘추를 다룬 <역사스페셜>에서는 김춘추의 필요에 따라 당나라가 오히려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서로를 외국으로 인지는 했을망정 아주 남으로 여겼던 건 아니었다. 삼국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였고[30], 실제로 서동과 선화공주처럼 다른 나라간 결혼도 하였으니 동족 의식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언어와 문화가 비슷해도 서로를 외국으로 인식하며 싸우는 사례는 역사상 무수히 많다. 그리고 외국 왕가와의 통혼 역시도 드문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동족 의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결국 신라가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삼국통일 사상이 완성되긴 했지만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삼국 시대까지는 종족은 비슷해도 국가는 엄연히 달랐던데다 같은 나라가 갈라진 상황도 아니었기에 '동포'라는 인식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었다.[31] 이는 광개토대왕릉비, 충주 고구려비 같은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32][33] 그러니 이걸 갖고 무열왕과 무열왕의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그 모든 책략과 노력을 폄하할순 없다.

즉, 삼국은 서로 생존을 위해 철저히 대결, 경쟁할 수밖에 없는 적대 세력이었고 신라는 그냥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국을 멸망시켰을 뿐이라는 것. 거기에 21세기 기준으로 7세기 사람 김춘추를 가치판단하는 것은 객관성을 가지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신라의 생존이 최우선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더라도 당나라의 한반도 영향력을 너무 높여, 이후 나당전쟁에서 알 수 있듯 잘못하면 세력균형을 무너뜨린 김춘추 때문에 신라까지 멸망 테크를 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근시안적인 도박을 자행한 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긴 하다. 결과적으로 아들인 문무왕 시절에 적절한 선제공격과 고구려 부흥군 회유, 우주방어와 역습으로 간신히 나당전쟁에서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신라가 이때 져서 당나라에 편입됐다면 늑대 잡을려고 호랑이 끌어들인 꼴이 되어 외교술의 천재는커녕 오히려 망국의 군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34] 그러나 당장 고구려와 백제의 맹공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신라 입장에서는 그런 2차적인 요소까지 고려를 할 여유가 없었으며 우선 고구려와 백제, 왜로부터 살아남아야 당나라 문제도 고민할 수 있고 당시 주변국이 당나라 빼고 다 적인 이상 신라가 살아남는 법은 당나라와의 동맹이 사실상 유일했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당나라는 그때 고구려, 백제따위랑은 비교도 못할 정도로 최강국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뒤에 어떻게 당을 몰아낼지에 대해서는 의문임으로 역시나 당나라를 끌어들인 건 마냥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도 그렇지만 특히 백제는 틈만 나면 신라를 침공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신라가 위기 의식을 느낄 정도로 고구려와 백제는 맹공을 해왔고 특히 의자왕 즉위 후 백제는 신라 공세에 광적으로 열을 올렸다. 물론 이건 신라의 업보 탓도 있는게, 백제는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 이래 신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35][36]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가면서 침공해 오는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끼고,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 백제와의 전투에 올인하려 했으나, 고구려에 자청해서 사신으로 건너갔다가 오히려 투옥당했던 김춘추는 고구려와 백제의 밀접한 관계를 눈치챈다. 이후 김춘추는 일본에도 건너가 보았지만 일본 역시 백제와 친분이 있던 탓인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결국 과의 동맹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하자면 당시 삼국 사이에서 굳이 말하면 고구려와 백제가 지배 계층으로 보면 보다 가까운 관계긴 했다. 우선 백제, 고구려의 경우는 백제의 지배 계층이 많이들 알다시피 주몽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 출신이기 때문에 신라보다는 연계 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 모두 부여의 계승을 자처하는 나라였기에 피지배층은 몰라도 최소한 왕족과 중앙귀족들[37]에게는 고구려에 대해 국가 정통성적으로 의식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것은 사실이다. 당장 《일본서기》에도 부여창고구려 장수와 일기토를 벌일 때 자신을 고구려 왕과 성씨가 같다고 언급하였고, 무령왕의 후손인 어머니를 둔 간무 덴노도 자신의 즉위를 정당하기 위해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 백제 부여씨 왕실의 연계성을 언급하는 모습이 있다. 그 외에도 중국 측 기록에도 백제와 고구려를 '양맥'으로 칭하기도 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백제와 고구려는 같은 뿌리를 둔 국가로 인식되었다.[38]

게다가 신라의 경우엔 건국설화 역시 부여에서 이어지는 고구려, 백제와는 다르다. 다만, 학자들 중에서는 삼국 간의 교류와 접촉이 늘어 남에 따라 후반에는 어느 정도 비슷하게 인식하는 의식이 있지 않았냐는 의견도 적지 않으며, 신라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전쟁을 펼칠 때, 삼한일통의 기치를 내세우며 백제,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려 하였다.

어쨌든 그렇게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선전했으나 민간에서 실질적인 동족 의식이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한편 드러난 사실로만 보면 통일신라가 민족 통합에 실패한 건 사실이다. 즉 낙랑 및 말갈 주민들을 고구려인으로 융화해내는 데 성공한 고구려, 옛 마한 거수국들 전체를 백제인으로 융화해낸 백제, 가야인들을 신라인으로 융화한 신라와는 달리, 통일신라는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신라라는 브랜드 아래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하는 데는 실패하긴 했다. 그저 신라 말기 중앙 권력의 약화와 이에 따른 지방 호족들의 대두로 인한 것일뿐 민중의 민족 의식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다면 수백 년 전 망한 나라의 국호가 여전히 부흥의 명분으로 쓰이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후삼국이 서로를 통합해야 할 대상 내지는 동포로 보는 의식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라에게서 명백히 분리 독립해 각기 전에 망한 두 나라를 계승해 성립한 고려나 후백제 모두, 다른 두 삼국의 일원을 궁극적 통합의 대상으로 상정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춘추의 업적은 분명 한반도 민족 형성에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의 주민이 통일신라라는 같은 나라 체제 안에서 문화적, 경제적, 언어적 차이 등등이 대폭 좁혀진 것에 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39]

김춘추는 주로 대외 외교가 면모로 주목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낡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신념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에도 크게 얽매이지 않는 편이었는데, 비록 성골은 아니더라도 그 자신이 진골 귀족이라는 특권층 출신임에도 비주류인 가야계 가문과 혼인하고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격이 낮다고 할 수 있는 김유신, 강수, 원효를 중용하는 등 신분과 혈통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당나라에 갔을 때도 가장 먼저 한 일이 고등교육기관 태학을 견학하는 일이 있었으며, 비담의 난을 평정하고 정계의 1인자로 떠오른 진덕여왕 시대부터 여러가지 제도 개혁을 시작했다. 이런 성향은 문무왕신문왕 시대까지 이어졌고, 고대국가의 성격이 강하던 신라의 체질을 개선해 향후 수백년간 나라가 유지되는 토대가 되었다.

사서에 드러난 기록들로 볼 때 당시 신라를 이끌었던 김춘추와 김유신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개인적인 희생을 여러 번 감내하였던 인물들이었다. 김춘추는 목숨을 걸고 몸소 고구려와 왜, 당 등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위인 김흠운도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후에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김유신도 고구려군과 싸우다 고립된 당나라군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직접 지원부대를 이끌고 적국인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으로 가서 임무를 성공시켰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백제의 침공으로 죽은 개인적인 원한을 이후의 외교와 전쟁의 주요 동기로 부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극적인 장면이 필요한 창작물에서 그러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로 개인적 복수심이 한 요인이었을 수는 있으나, 결정적인 요인이라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김춘추가 더욱 적극적으로 몸을 사리지 않는 외교를 한 것은 대야성이 함락당하면서 백제와의 전선이 수도와 더욱 가까워지고 낙동강 서쪽 영토를 상실함으로 국방 위기와 관련이 있다. 가령 딸과 사위가 살아 도망쳐나왔다고 해도 대야성을 함락당한 그 당시 상황에 백제와 신라가 앞으로도 계속 싸우지 않을 상황도 아니었다. 물론 일종의 말놀이 비슷한 느낌인게, 둘 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게 가장 정확할 것이다.

다만 신라 내부적으로 보면 당시 신라 정계에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김춘추 이외의 귀족 계파가 존재했는데, 사위의 뻘짓(...)으로 대야성을 잃어 김춘추와 그가 주도하는 근왕파는 정치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당시 신라 사회는 임전무퇴를 귀족의 미덕으로 여겼고, 이것을 실제로 지킨 인물들이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에서 숱하게 등장해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김춘추의 사위씩이나 되는 인간이 항복하려다가 속아서 죽었다는 것도 그야말로 나라의 비웃음거리였을 것이다. 때문에 이걸 덮을만한 뭔가 큰 업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정치적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다.

5. 가계

6. 여담

7.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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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 소지 지대로 · 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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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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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태종 본기>
一年春三月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다
一年夏四月 왕의 죽은 아버지를 추봉하다
一年 죄수를 사면하다
一年夏五月 율령을 가다듬어 정하게 하다
一年 당에서 사신을 보내다
一年 당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一月 이찬 금강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年 고구려가 북쪽의 변경을 침략하다
二年春三月 당이 고구려를 치다
二年 법민을 태자로 삼다
二年冬十月 우수주[54]에서 흰 사슴을 바치다
二年 굴불군[55]에서 흰 돼지를 바치다
二年 왕의 딸인 지소를 김유신에게 시집을 보내다
二年 월성 안에 고루를 세우다
三年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오다
三年秋七月 문왕을 당에 보내다
四年秋七月 일선군에 홍수가 일어나다
四年 토함산의 땅이 불타다
四年 흥륜사의 문이 무너지다
四年 바위가 부서져서 쌀이 되다
五年春一月 중시인 문충을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三月 하슬라[56]를 주로 삼다
六年夏四月 당에 사신을 보내서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秋八月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다
六年秋九月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바치다
六年 공주 기군의 강에서 큰 물고기가 죽다
六年冬十月 장춘과 파랑이 당의 소식을 전하다
七年春一月 이찬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삼다
七年春三月 당 고종이 백제를 치게 하다
七年夏五月二十六日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다
七年夏六月十八日 남천정[57]에 다다르다
七年夏六月二十一日 태자 법민이 소정방을 맞았다
七年秋七月九日 김유신 등이 황산의 벌판으로 진군하다
七年秋七月九日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七年 백제의 왕자가 당의 장군에게 글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당과 신라의 군사들이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가다
七年秋七月十二日 백제의 왕자가 가축과 음식을 보내다
七年秋七月十三日 의자왕이 밤에 도망하다
七年秋七月十八日 의자왕이 항복하다
七年秋七月二十九日 왕이 소부리성에 이르다
七年秋八月二日 주연을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다
七年秋八月二日 모척의 목을 베다
七年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七年秋八月二十六日 임존의 목책을 공격하다
七年秋九月三日 낭장 유인원사비성을 지키다
七年秋九月二十三日 백제의 나머지 적병이 남잠성 등을 차지하다
七年 당 황제가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다
七年秋九月二十八日 왕문도가 조서를 전달하고 갑자기 죽다
七年冬十月九日 왕이 이례성을 치다
七年冬十月十八日 이례성을 빼앗아 지키게 하다
七年冬十月三十日 사비의 남쪽에 있던 군대를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一日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공하다
七年冬十一月五日 왕이 왕흥사잠성을 공격하다
七年冬十一月二十二日 싸움에서의 공을 논하다
八年春二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좋은 말을 바치다
八年春三月五日 품일이 군영을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다
八年春三月十二日 대군이 두량윤성을 공격하다
八年夏四月十九日 군사를 돌이키다
八年夏五月九日 고구려가 술천성을 공격하다
八年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다
八年夏六月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다
八年夏六月 왕이 죽다

재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 재위 기간에 삼국 통일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역대 신라 왕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기록이 많은 왕이며, 특히 왕이 되기 전의 활동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신라 임금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삼국시대의 왕들 중 가장 많은 기록을 가진 왕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그만큼 태종 무열왕이 가진 역사적 입지는 평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삼국사기》 5권은 선덕여왕부터 시작하여 태종 무열왕에서 끝난다.

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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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밀양 박씨 왕조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昔] 경주 석씨 왕조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통일전에는 삼국 통일의 주역들인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의 영정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의외로 이 표준영정과 문무왕 표준영정을 혼동하는 사람도 많다. 이 표준영정을 그린 사람은 세종대왕의 표준영정도 그린 운보 김기창. 그런데 사실은 고증 오류다. 무열왕이 당나라에서 책봉을 받으면서 당나라 복식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가 즉위한 이후 시점에는 금관이 아닌 연각복두를 쓰고 단령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 다만 670년 이후 시점을 그린 그림인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의 무덤 벽화 '예빈도'에서 신라 사신이 여전히 당인들과 달리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열왕이나 문무왕 등 7세기 중반까지는 사모단령과 기존 복식이 혼용되었다는 설도 있다.[2]삼국유사》에 따르면 59세(만 58세)로 죽었다(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 따라서 역산하면 603년생이 되며, 이는 진평왕 25년에 해당한다.[3] 여담으로 고조할아버지 진흥왕과는 고작 69년밖에 차이가 안 난다. 세대 별 평균 17.25년.[4]삼국사기》에는 상대등이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일본서기》에서 647년에 '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 김춘추를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상신은 상대등을 뜻하는 단어이다.[5] 후손 중 문무왕 계통은 혜공왕 일가가 김지정의 난으로 몰살당하며 끊기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혹은 김문왕)의 후손인 김주원(신라)부터 강릉 김씨로 이어진다.[6] 642년 이전 혼인.[7] 요석공주라는 설이 있지만, 이 사람은 설화적 성격이 강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고, 설령 실존인물이라 할지라도 6두품인 원효대사와 혼인하는 것을 보면 적녀가 아닌 서녀로 추정되며, 적녀만을 지칭하는 "딸 5명"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요석'은 이름이 아니고, 거처하던 궁의 이름이다. 태종 무열왕 치세(654~661)에 재혼. 과거의 노처녀 기준을 생각하면 첫 결혼은 650년 정도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8]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기준 3녀. 655년에 혼인.[A] 김의관의 부인이자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안승의 장모이기도 한데 그녀의 딸이 혼인 당시 결혼 적령기였다면 그녀는 665년 정도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B] 신목왕후의 모친[11]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기록[12]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기록[13] 《일본서기》 기록.[14] 《일본서기》 기록.[15] 형제나 누이에 대한 언급은 사서에 없다.[16] 견제 세력이 있어서 김춘추가 아닌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목소리도 존재했는데 알천의 양보로 김춘추가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17] 무열왕릉비. 정확하게는 태종 무열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8] 2022년 경주에서 발견된 공순아찬신도지비에서는 '태종대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찬 김공순(金恭順)은 태종대왕의 손자이다(太宗大王之孫者也). 우리 김씨의 근원은 소호다.(我金氏淵少昊)."[19] 신라 원성왕의 묘호가 '열조'로, 최치원이 비문을 작성한 초월산 숭복사(崇福寺)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20] 금관가야수로왕도 태조(太祖)라는 묘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건 《김해 김씨 족보》에만 나오는 기록이라 신뢰하기가 어렵다. 족보는 후대에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21] 일본측 기록에 백제에서 도모왕(동명성왕 추정)을 태조로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한데 참고 수준이다. 다른 사서(史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태조대왕 역시 있지만 이 경우 역시 묘호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뭐 백제 왕실에서 동명왕이라는 인물을 '태조'에 준하는 인물로 보았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22] 진흥왕 순수비에는 태조가 등장하며 문무대왕비와 흥덕대왕비에는 태조 성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태종이 있는데 태조가 없을 리 없는 데다가 당대 기록인 금석문에까지 태조라는 말이 나오는 걸로 미루어보아 신라에 태조라고 불리는 왕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다만 누가 태조인지는 알 수가 없어서 해석이 분분하다. 성한왕 문서 참조.[23] 원성왕릉의 왕릉 사찰인 숭복사 비문에서 원성왕을 열조로 언급하기도 한다.[24] 고려의 경우는 원나라내정간섭을 거치면서 어쩔 수 없이 제후의 법도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면서 묘호를 폐지했고, 조선에서는 폐위된 임금은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성종 때에 한번 고려 태조 이래 원종까지 임금들의 묘호를 제후국의 법도에 맞춰서 빼야 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지만 김종직 등이 "기록돼 있는 거 굳이 뭐하러 뺍니까"라고 반대해서 그대로 썼고,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폐위되지 않는 이상 쭉 묘호를 썼는데, 이때 김종직이 반대 근거로 가지고 온 게 이 태종 무열왕의 사례였다.[25] 정작 고구려 전성기였던 장수왕 시대에조차 북위유송에 칭신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김춘추가 억울한 점은 있다. 게다가 장수왕도 말갈의 병사들을 빌려 다른 삼국을 공격한 적이 있다. 물론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이 당시 말갈은 당나라 느낌은 아니고, 장수왕이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넘기고 영토까지 포기한건 아니며 또한 장수왕은 순순히 북위에게 꿇은 건 아니고 북위와 유송에게 붙으려 한 북연을 쥐어패 멸망시키고, 고구려 내에서 뻗대던 풍홍의 목을 치기까지 했지만.[26] 사실 설령 전성기까지 따져도 고구려를 멸망시킬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나라는 비슷한 시기 한민족 국가 중에서는 없었다. 비록 백제가 전성기 때 고국원왕사살하고, 신라가 전성기 때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해서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으나, 전자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중국이, 후자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치르고 있어서 양면전선이 형성돼 한반도 남쪽 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 고구려의 국력이 백제, 신라보다 약해져서가 전혀 아니었다. 당시 백제든 신라든 중국의 도움 없이는 결코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없었으며, 이는 훗날 고구려가 수도 평양성 앞에까지 당나라에게 몰린 상황에서도 당나라의 공격을 여러차례 막아내는 것을 넘어서 당의 대군을 아예 박살을 내놓는 것을 통해 증명되었다. 이는 중원, 북방과 백제, 신라 사이에 껴있는 고구려의 지리적 특성상 건국부터 멸망까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 약점이었다.[27] 이 점은 신라와 백제 둘다 마찬가지. 신라도 백제도 둘 다 막강한 강대국 중 가장 자신들과 국경을 가까이 하고 있던 고구려가 위협적이었을테니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자주 이용했고, 이를 반영했는지 SBS 드라마 <연개소문> 37회에서도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 직전에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동시에 찾아와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도울테니 하루빨리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고구려를 치라며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신라에 대해서만 이런 이미지가 강하고 백제가 중국을 끌어들인 부분에 대한 인식이 약한 데 비해 이 드라마에서는 의외의 부분에서 고증을 지킨 셈. 이에 수양제는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물러간 후 자신들의 방어막이 되주고 있는 고구려가 망하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라는걸 모른다며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을 비웃는다. 물론 조공 잘 바치던 국가를 굳이 공격할리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당나라처럼 고구려 멸망 후 실제로 신라를 공격한 사례도 있었다.[28] 399년 백제 아신왕은 일본,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으로 패퇴한 바 있다. 이후 백제 성왕관산성 전투에서 일본 및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다가 전멸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으며,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 때도 일본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진흥왕에게 털리고 말았다. 백강 전투에서도 백제부흥군은 일본군을 한반도에 불러왔다.[29] 물론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인만큼 신라도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긴 했다.[30] 완전히 다른 계통의 말을 썼을 개연성은 물론 0에 가깝지만, 같은 말이었을지에 대해서도 확증은 없어 학자마다 주장은 조금씩 다르다. 애초에 현대조차도 사투리가 심한 지역은 아예 다른 언어처럼 들리는 경우도 꽤 많은걸 고려하면 진짜 남녀노소 100% 말이 통했을지는 의문.[31] 그리고 삼국시대가 끝나고 신라가 삼국의 유민들을 다 포용한지 200년도 넘은 시점에서도 다시 다른 나라들로 갈라진 것이다.[32] 단, 이 비문들이 삼국의 근연 인식을 반박하는 근거로 쓰이는 현상도 본명코 잘못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왜는 신라와 백제와는 완전 논외인 고구려 세계관 바깥 존재로 상정되고 있고, 거기서 한과 예를 구분하는 인식은 한예가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한(韓)이 주로 한씨조선-위만조선 등 서북한 조선계 예맥계로 쓰였던 용례를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지배층이 엄연히 부여계였고 주민 상당수가 동북한계인 예족이긴 했으되 초기 고구려의 인구 대부분은 한씨조선을 구성했던 조선인들로 판명되고 있다.[33]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동이 매금이라 함은 이민족으로서 비하하는 게 아니라 중화로 상정된 고구려왕의 '동생'격인 존재라는 뜻이다. 그 비문에서 동이 매금은 고구려왕의 '동생'격인 존재인데, 동생격인 존재가 오랑캐면 형이라는 고구려는 뭐가 되겠는가?[34] 세계사에서 외세를 끌어들였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까지 멸망당한 사례는 꽤 찾아볼 수 있다. 신라가 만에 하나 나당전쟁에 져서 당나라에 병합되었다면, 무열왕의 도박은 악평을 받아 동로마 제국 알렉시오스 4세나 베트남 가륭제만큼이나 냉소적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즉, 김춘추보단 차라리 문무왕을 더 평가하는 게 맞다는 것. 그러나 이것도 하나마나한 소리인 게, 무열왕의 업적이 없으면 문무왕의 활약도 없었다. 백제와 고구려에게 망하고 나면 무슨 다음이 있겠는가?[35] 이건 고구려도 비슷했다. 보장왕연개소문이 신라의 요청을 묵살한 것 역시, 과거 진흥왕에게 거한 통수(...)를 고구려가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양양왕 때 평양이 함락 위기에 처했을 때 신라가 고구려를 도와준 적도 있긴 했다. 정확하게는 당시 백제 주도 연합군의 중심축이던 신라가 돌연히 고구려 정벌을 반대한다. 이러자 성왕은 할 수 없이 고구려 정벌을 그만두게 된다. 《일본서기》 <흠명(긴메이)조>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밀약이 있었다고 추측되기는 하지만 한 때 고구려와 신라는 한번 손을 잡은 적이 있었던 것.[36] 다만 이런걸 빼더라도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를 도와 백제를 무력화시키거나 혹은 멸망시키는게 큰 메리트가 없는게, 백제는 신라에 감싸져 있는 형태였기에 설사 백제를 굴복시켰다고 해도 결국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신라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로서는 얻을 수 있는 영토도 별로 없어보이는데, 단순히 후방 안정을 얻자고 신라를 도와주는 것보단 오히려 신라를 침공하는 것이 더 이득으로 보였을테기 때문. 보장왕이 신라에게 죽령 서북의 땅을 요구한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지 모른다.[37] 대성팔족 중 해씨 가문이 유력하다. 부여의 왕성과 동일한 자를 쓰는데다가, 실제로도 이 가문이 가장 고참 가문으로써 대접받았다고 한다.[38] 다만 알다시피 뿌리와는 별개로 서로 무수하게 치고박긴 했다. 실제 두 국가 사이가 나빴던 기간이 말기에 여제동맹을 맺은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온조왕 주몽 아들설을 정설로 채택하면, 사실 온조왕은 고구려 권력 투쟁에서 유리 왕자에 밀려 남부로 쫓겨온 사람이니 그의 후예들 역시 고구려에 악감정이 상당히 남아있을법도 하다.[39] 물론 후삼국시대에 깨어진 삼국을 다시 통합하는 방법이 적어도 '신라'란 국호 아래에선 아니었음이 신라의 한계를 상징하긴 하지만 이것을 김춘추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에 기득권 양보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백제 유민 및 고구려 유민을 포용하려던 그 무열왕계 왕실을 파멸로 몰고간 진골들 잘못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 진골들 대부분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신라 멸망 후 서라벌 일대 향리로 몰락해 그들이 조상 대대로 무시하던 과거의 5~6두품들 아래 신분으로 편재되면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40] 김용수가 지도부인 소생이라 볼 확실한 증거는 없다.[41] 천명공주가 마야부인 소생이라 볼 확실한 증거는 없다.[42] 설화 속 인물이라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43] 부친인 김흠돌이 모반을 일으켜서 연좌되어 폐비되었다.[44] 사위인 김흠운의 딸이기 때문에 외손녀이기도 하다.[45]삼국사기》에서는 문희의 소생으로 《화랑세기》에서는 첫째 부인인 보라궁주의 소생으로 되어 있다. 덧붙여서 《화랑세기》에서는 아예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둘을 뒀다고 나온다.[46]삼국유사》에서만 등장한다.[47] 원효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자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 일찍 과부가 된 차녀 요석공주를 원효와 맺어주기 위해 원효를 데려오라고 했는데 일부러 원효가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원효를 인솔하던 관리가 요석궁으로 원효를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는데 여기서 요석공주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48]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이가 바로 신라의 대학자로 유명한 설총. 설총은 태종 무열왕의 외손주가 되는 셈이다.[49] 손위 처남이자 사위이다.[A] [B] [52] 이 김은의라는 인물은 정사에 나오는 김인위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53] 패서에 근거를 둔 세력이 결국 삼한 재통합을 이룩하게 된다는 걸 고려하면 딱히 틀린 예측은 아니었지만, 이런 방심이 쌓이고 쌓인 다음 견훤이라는 신라군 내부 이단아와 만나 폭발하게 되자 서라벌과 신라 왕실은 최악의 시련과 탄압을 맞이하게 된다.[54]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 혹은 그 일대로 추정.[55]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로 추정.[56]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57] 현재의 경기도 이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