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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22:23:58

인종(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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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인종(仁宗)
시호 법천숭도응세화민융자현혜성문신무원명예효황제
(法天崇道應世化民隆慈顯惠聖文神武元明睿孝皇帝)
존호 헌요광성태상황제
(憲堯光聖太上皇帝)
쩐(Trần, 陳/진)
캄(Khâm, 昑/금)
생몰기간 1258년 12월 7일 ~ 1308년 12월 16일
재위기간 1278년 ~ 1293년

1. 소개2. 생애
2.1. 초기2.2. 제2차 원월전쟁2.3. '살달'의 의지2.4. 원월전쟁 이후
3. 참고 항목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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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베트남 대월 쩐 왕조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 휘는 진금(陳昑). 《원사》(元史)에는 이름이 진일존(陳日燇)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성종 진황의 장남이었다. 인종은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자신을 '죽림대사'(竹林大士)로 칭했고,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불황'(佛皇)으로 부르게 했다. 그래서 당시 베트남에 선종(禪宗)이 유입되었다.

내치뿐 아니라 원나라의 침략에도 직접 항전하여 나라를 지킨 명장이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재위 초기엔 아버지 성종의 섭정을 받았다. 당시 성종의 별호는 '효황'(孝皇)이었고, 쩐 왕조의 전통적인 관습인 태상황의 내정 개입으로 정사는 성종이 주관했다.

1280년 정각밀(鄭角密)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종은 진일율(陳日燏)[1]에게 명령해 회유하게 하니 정각밀이 투항했고, 인종과 만나자 정각밀의 아들을 인질로 삼았다.

1282년 종실 진도애(陳遺愛)를 원나라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쩐 왕조는 명목상으론 태종과 원나라가 군신관계를 맺어 원나라의 제후국이었고, 따라서 원나라는 태상황 성종의 입조를 요구했으나 성종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쿠빌라이 칸은 진도애를 강제로 '안남국왕'(安南國王)에 책봉한 뒤, 병사를 붙여 안남, 즉 대월 제국의 괴뢰화를 시도했다. 태상황 성종은 진도애 일파를 공격해 진도애와 그 병사들을 죽였고, 이는 쿠빌라이 칸의 화를 사 이전에 태종과 맺은 군신관계가 깨지고, 다시 원나라와 격렬하게 치르게 될 대혈전의 계기가 되었다.

2.2. 제2차 원월전쟁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원나라의 베트남 원정
, 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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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은 진도애 사건을 계기로 교지행성(交趾行省)의 사도(唆都)를 대월에 파견했고, 사도가 무려 50만 대군을 거느린채 양산(諒山)을 공격하자 인종은 태상황 성종, 진사만(陳舍灣)과 군대를 지휘해 직접 원나라의 대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진경여(陳慶餘)[2]진국준 등 유능한 장수들이 어떻게든 원군을 격파하긴 했으나 몽골군은 대월의 남쪽 참파까지 점령해 대월을 고립시킨 후, 1284년 대월의 수도 탕롱(현 하노이)을 점령했다.

2.3. '살달'의 의지

쩐 왕조는 멸망의 위기에 처했고, 태상황 성종과 인종 역시 항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인종은 항복을 고려했으나 항전 의지가 있었던 진국준이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황제 인종에게 대답했다.
「先斷臣首然後降」
항복하시려면 신의 목부터 베어주십시오.

또한 진국준은 <격장사>라는 후대까지 전해지는 명문을 작성해 장수와 병사들에게 쩐 왕조의 위급을 호소하며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항전을 계속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대월군 병사들은 팔뚝에
살달(殺韃, 달단 놈들을 죽이자)
이란 글자를 새기고 치열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대월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청야 전술, 게릴라 전술를 이용해 원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히자 결국 원군은 퇴각했다.

이후 원나라는 1287년 다시 대월을 침공해 수도 탕롱을 재점령했으나 명장 진국준의 계략으로 원군은 무려 10만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손해를 입고 철수했다. 그 후에도 원나라는 제4차 침공을 준비했으나 쿠빌라이 칸이 붕어하자 카이두의 난이라는 내부 문제도 겹쳐 결국 대월 원정을 포기했다.

2.4. 원월전쟁 이후

이후 소수민족인 우후(牛吼)가 애뢰(라오스)의 지지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자 친정하여 이를 정벌했고, 1293년 태자 진전에게 양위한 후 태상황이 되었다. 특이하게 출가하여 불학을 연구해 '불황'(佛皇)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아버지 성종처럼 국정에 개입했다. 그 후 원나라의 사신이 인종에게 입조를 요구했지만 인종이 병을 핑계대며, 따로 사신을 보내고 직접 입조하지 않자 원나라가 베트남을 재침공하려 했으나 때마침 쿠빌라이 칸이 붕어하여 안남 정벌은 중단되었다.

그 후 인종은 불학과 국정에 힘쓰다 1308년에 붕어했다. 인종은 문(文)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관심이 많아 베트남에 선종이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아예 본인이 새로운 종파를 세우고 선사(禪師)를 제자로 두었다고 한다. 인종이 출가한 후 수행한 산이 베트남의 명산인 옌뜨 산이다.

3. 참고 항목

4. 둘러보기

쩐 왕조의 역대 황제
2대 성종 진황 3대 인종 진금 4대 영종 진전

[1] 1255 ~ 1330. 작위는 소문왕(昭文王).[2] 인혜왕(仁惠王), ? ~ 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