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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1-28 14:35:58

킨드레드/배경

좋은 죽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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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 배경2. 장문 배경3. 피할 수 없는 죽음4. 좋은 죽음5. 소아테스의 결말

1. 기본 배경

''다시 말해봐, 양아, 뭐가 우리 거라고?"
"전부, 전부 다야, 늑대야."

둘로 분리되어 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 킨드레드는 죽음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존재다. 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화살로 빠른 해방을 선사한다. 늑대는 막다른 길까지 달아나는 자들을 가차 없이 물어뜯어 처참한 죽음을 선고한다. 룬테라 여러 지방마다 킨드레드를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긴 하지만, 살아있는 이라면 누구나 둘 중 한 형태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2. 장문 배경

킨드레드는 따로지만 언제나 함께인 죽음의 양면을 지닌 존재다. 운명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양의 화살로 빠른 죽음을 선사하고, 운명을 거부하고 도망치는 자에게는 늑대가 달려드는 잔혹한 최후를 안겨준다. 룬테라에서는 지역마다 킨드레드의 본성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지만, 필멸의 존재라면 결국 진정한 죽음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은 같았다.

킨드레드는 공허를 하얀빛으로 포용하는 존재이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이를 악문 존재이기도 했다. 목동이자 도살자, 시인이자 야수. 킨드레드는 하나이면서 둘이었다. 삶의 마지막에 이른 누군가의 목에서 맥박 소리가 뿔피리보다 더 요란하게 울릴 때 그들의 사냥은 시작된다. 양의 은빛 활시위가 당겨지는 것을 보며 고요히 죽음을 맞이한다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화살이 단번에 목숨을 앗아갈 테지만, 양의 화살을 거부한다면 늑대에게 추격당해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 한다.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킨드레드는 발로란 어디에나 존재했다. 데마시아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운명의 뜻에 따라 양의 화살을 받아들이지만 녹서스의 어두운 뒷골목에서는 늑대가 도망자를 쫓는 일이 더 많았다.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프렐요드 산기슭의 어느 전사들은 전투에 임하기 전 늑대에게 입을 맞췄다. 늑대가 적을 추격해 물어뜯어 주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빌지워터에서는 매년 해로윙 다음날 모두가 모여 살아남은 것을 자축하고 양과 늑대에게 진정한 죽음을 선사받은 자들을 기렸다.

킨드레드를 거부하는 것은 곧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킨드레드를 피해 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이들에게는 남은 생을 악몽 속에서 보내는 가혹한 운명이 뒤따랐다. 그림자 군도에서 언데드의 육신에 갇힌 자들을 킨드레드는 무던히 기다리고 있다. 양의 화살로든 늑대의 송곳니로든, 결국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영겁의 사냥꾼 킨드레드의 존재를 형상화한 최초의 물건은 한 쌍의 고대 가면이다. 이름 모를 이들이 조각한 그 가면이 걸려 있던 묘지의 주인은 잊힌 지 오래이나, 양과 늑대는 오늘날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킨드레드로 남을 것이다.

3. 피할 수 없는 죽음

참혹한 전쟁터가 둘의 눈에는 축제처럼 비쳤다. 삶은 얼마나 달콤한가. 단번에 끝장을 내버릴 삶도, 추격해서 물어뜯어 버릴 삶도 너무나 많았다. 늑대는 푹신하게 덮인 눈밭 위를 이리저리 오갔다. 양은 날카로운 칼날과 뾰족한 창 위로 춤추듯 뛰어다녔다. 하지만 새빨간 살육의 흔적도 양의 새하얀 털에 얼룩 하나 남기지 못했다.

"용기와 고통이 동시에 느껴지네, 늑대. 많은 이들이 기꺼이 삶의 마지막을 마주할 거야." 양이 자세를 잡고 빠른 죽음의 활시위를 튕겼다.

그러자 무거운 도끼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쓰러졌다. 방패가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병사의 가슴에는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이는 하얀 화살이 꽂혀 있었다.

"용기 있는 놈들은 짜증 나."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뒤쫓던 거대한 늑대가 투덜댔다. "배고파. 사냥하고 싶어."

"조금만 참아." 양이 늑대의 북슬북슬한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늑대가 바짝 긴장하더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공포의 냄새가 나는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였다.

녹아 내린 눈과 진흙으로 엉망이 된 전장 저 멀리 소년 하나가 서있었다. 한 손에 검을 쥐긴 했지만, 전투에 나서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다. 아마 어느 기사의 시중을 들러 따라온 종자이리라. 소년은 킨드레드가 전장의 모든 이에게 표식을 남긴 것을 보았다.

"난 살이 연한 게 좋더라. 쟤 우리가 보이는 거지, 양아?"

"응. 저 아이는 이제 선택해야만 해. 네 먹잇감이 되든가, 나를 받아들이든가."

전투의 불길이 소년을 향하기 시작했다. 용맹한 자와 절박한 자가 한데 뒤섞여 몰려왔고, 소년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생애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새벽이 되리라. 그 순간 소년은 결정을 내렸다. 그냥 포기하지는 않기로. 마지막까지 도망치기로.

기쁨에 겨운 늑대는 새끼 늑대라도 된 듯 눈 속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래, 늑대야." 양의 목소리가 마치 진주 구슬을 매단 종소리처럼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사냥을 시작해."

늑대는 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올라 소년을 향해 내달렸다. 계곡 전체에 늑대 울음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어두운 그림자 같은 형체가 방금 쓰러진 시신과 산산조각이 난 채 나뒹구는 무기를 재빠르게 지나쳤다.

소년은 당장 돌아서서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해 뛰는 소년의 시야에 시꺼먼 고목들이 흐릿하게 휙휙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쉬지 않고 뛰었다. 시리디 시린 공기에 허파가 찢어질 듯 타 들어 갔다. 추격자를 확인하려 한 번 더 돌아봤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나무들뿐이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쇠사슬처럼 몸을 칭칭 휘감아오자, 소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제 달아날 곳은 없다는 것을. 그러자 갑자기 사방에 검은 늑대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냥이 끝난 것이었다. 늑대는 소년의 목에 날카로운 이빨을 꽂아 넣으며 삶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늑대는 고통에 가득 찬 비명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만끽했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양이 평온하게 웃었다. 그러자 늑대가 돌아서서 으르렁대며 물었다. "이 소리가 듣기 좋나, 양?"

"너한텐 그렇지." 양이 대답했다.

"또 하고 싶은데." 늑대가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을 핥아 올리며 말했다. "또 사냥하고 싶어, 양아."

"앞으로도 계속할 수 있을 거야." 양이 속삭였다. "우리 킨드레드만 남는 그날까지."

"그땐 너도 내게서 달아날 거야?"

양이 다시 전쟁터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네게서 달아나지 않아. 절대로."

4. 좋은 죽음[1]

매가는 열네 번째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또다시 상한 사과를 물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썩은 사과를 문 매가의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녀는 죽음의 춤사위를 시작하며 모든 관객에게 잘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아,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꿈인가? 너무 늦어버렸구나! 이제야 겨우 삶의 무수한 진풍경을 보기 시작했건만!”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반짝이는 가루가 날리는 가운데 킨드레드가 무대 위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킨드레드는 전통적으로 한 사람이 가면 두 개를 쓰고 나와 연기했다. 하얀 양의 탈 쪽을 매가에게 보이며 킨드레드로 분장한 배우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들어라! 내 날카로운 화살을 부르는 소리인가? 꼬마야 이리 온. 심장의 온기가 망각의 차가운 품으로 사라지게 두려무나.”

열세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매가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연기도 전과 달라진 부분이 거의 없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매가의 비명에 묻혀 버렸다. 이를 신호로 양은 바로 뒤돌아 늑대 가면을 드러냈다.

늑대가 으르렁댔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저는 불쌍하고 어린 처녀일 뿐이에요. 제발, 당신의 네 귀에 제 간절한 외침이 닿도록 해 주세요.”

관객은 오펠럼 메커니컬 극단의 연극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했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재앙과 전쟁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다 보니 사람들은 죽음이 나오는 비극에 열광했다.

양과 늑대를 연기하는 덴지가 어린 처녀로 분한 매가 위에 올라타 나무 이빨을 어색하게 드러냈다. 매가가 목을 드러냈다. 늑대가 물려는 찰나, 매가가 블라우스 옷깃에 꿰매놓은 장치를 작동시켰다. 빨간 천으로 만든 리본이 피처럼 흐르는 가운데 관객들은 환호와 함성을 보냈다. 관람료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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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커니컬 극단이 마차를 이끌고 니들브룩을 향하여 출발했을 때, 밤하늘에는 별 하나 없었다. 별 대신 구름 떼가 끝없이 이어졌다.

니들브룩에는 언제나 열성적인 관객이 많다고 극단장이자 유일한 극작가인 일루시안이 다시 한 번 설명했다. 그는 파르가 지역 주민들한테서 훔쳐온 술과 자화자찬에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렸다.

밤이 깊어갔다. 단원들은 말다툼을 시작했다. 트리아와 덴지는 줄거리가 시시하다며 일루시안에게 혹평을 늘어놓았다. 비극이 처녀를 덮치고, 죽음이 처녀를 찾아오고, 죽음이 처녀를 데려가는 구조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었다. 일루시안은 복잡한 줄거리는 좋은 죽음 장면의 힘을 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단원 중에서도 가장 어린 매가는 트리아와 덴지의 말에 동의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이 유랑극단의 마차에 몸을 싣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살고 있었으리라. 메커니컬 극단은 최근 여러 배우를 잃었다. 예술의 전권을 고집했던 일루시안 때문이었다. 그의 고압적인 태도와 변변찮은 능력 때문에 신인들의 씨가 말라 버렸다. 오펠럼 메커니컬 극단원들은 앞으로의 모든 연극에서 죽는 역할을 도맡아 할 배우로 매가를 기용하는 데 동의했다. 매가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덴지와 트리아의 말을 곱씹던 일루시안이 마차꾼 파르에게 손짓을 하더니 그만 멈추고 야영을 하자고 했다. 술에 취한 위대한 작가 일루시안은 의기양양하게 마차 옆에 자신의 이부자리를 펼쳤다. 그러더니 나머지 이부자리를 근처 무성히 자란 풀밭에 던지고는 내뱉었다.

“배은망덕한 연기자들은 거친 들판에서 자도록 해. 그곳에서 예의범절을 좀 찾으면 좋겠군.”

나머지 단원들이 불을 피우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덴지와 트리아는 곧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뭐로 지을까, 서로의 귀에 속삭이다 꼭 껴안은 채 잠들었다. 그들은 언젠가 극단이 잔델이라는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에 멈추면 유랑을 멈추고 정착해 아이를 키우겠다는 얘기를 늘어놓곤 했다.

매가는 불꽃이 이는 불 앞으로 더 다가갔다. 탁탁 튀는 불꽃의 소리로 성가신 다른 단원들의 애정행각을 묻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매가는 계속 뒤척이며 자신의 목에서 피가 흘렀을 때 관객들이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예쁘장한 처녀가 순수함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일루시안이 짜낼 수 있는 유일한 극적 장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소름 끼치는 장면을 갈망했다.

매가는 한참을 뒤척이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숲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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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가가 도달한 곳은 비석 몇 개가 세워진 나지막한 풀 무덤이었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는 읽을 수 없었으나 낯익은 그림을 손가락으로 식별해냈다. 킨드레드의 쌍둥이 탈이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의 땅, 아주 오래된 묘지였다.

뒷목에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매가는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즉시 알아챘다. 밤마다 무대에서 만나는 존재이니만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여운 덴지의 조잡한 탈은 이렇게 매가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무덤의 아치길 위에 웅크리고 앉아 매가를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양이었다. 양의 옆에는 그녀의 충직한 동반자 늑대가 있었다.

“심장 소리가 들려!” 늑대가 검은 눈을 기쁨으로 반짝이며 말했다. “저거 내가 가져도 돼?”

양이 대답했다. “글쎄. 무서워하는 거 같군. 아름다운 아이야, 말을 하렴. 우리에게 네 이름을 말해줘. ”

“머… 먼저 그쪽 이름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공포에 질린 매가가 슬그머니 뒷걸음쳤다. 그러나 이를 놓칠 늑대가 아니었다. 늑대는 번개 같은 속도로 매가 뒤에 불쑥 나타나 그녀를 멈춰 세웠다. 늑대의 숨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가깝게 느껴졌다.

늑대가 매가의 귀에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이름이 많아.”

양이 말했다. “서쪽에서 늑대는 아니, 나는 이나라고 해. 동쪽에서 늑대는 울료, 나는 파랴라고 해.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나 킨드레드라고 불리지. 나는 언제나 늑대의 양이고, 늑대는 언제나 양의 늑대야.”

늑대가 뒷발로 서더니 킁킁댔다.

“쟤 지루한 놀이를 하고 있네. 이런 지루한 거 말고 쫓고 달리고 물면서 신나게 놀아 보자.”

양이 대답했다. “늑대야, 쟤 지금 노는 거 아니야. 자기 이름도 잊어버릴 만큼 무서운 거지. 아니면 이름이 나오기 무서워 입안에 숨고 있는 건가? 아이야, 걱정하지 마. 네 이름은 내가 알고 있단다. 네가 우리를 아는 것처럼, 우리도 너를 알아, 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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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탁이에요. 오늘 밤은 별로 좋지 않은 것…” 매가가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커다란 붉은 혀를 주둥이 한쪽으로 길게 늘어트린 늑대가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두들겨 패기에 안 좋은 밤이란 없어.”

양도 거들었다. “물론 낮도 다 좋아. 빛이 있어 표적을 제대로 맞힐 수 있으니까.”

“오늘 밤엔 달이 없잖아요!” 매가가 외쳤다. 그녀는 일루시안이 가르쳐준 대로 뒤에서까지 자신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동작을 크게 했다. “달이 구름 이불 뒤에 숨어 우리 눈을 피하잖아요. 달 없이 제가 마지막으로 뭘 볼 수 있겠어요?”

“우린 달 보이는데?” 양이 전설이 돼버린 자신의 활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달은 언제나 저기 있어.”

“별이 없잖아요!” 매가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이번에는 동작도 작아지고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쇼가 안 보이잖아요. 늑대와 양을 만나는 때라면 이런 아름다운 경치는 한 번 봐야지요!”

“요 매가 녀석이 새로운 놀이를 하고 있네. 질질 끌기 놀이 말이야.” 늑대가 으르렁거렸다. 움직임을 멈춘 늑대가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옆으로 뻗은 주둥이를 매가 쪽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매가 녀석 쫓다가 물어뜯기 놀이를 하면 안 돼?” 늑대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면서 위협적인 소리를 내었다.

양이 대답했다. “매가에게 한 번 물어보자. 매가, 늑대가 너를 쫓는 게 낫겠니, 내 화살이 낫겠니?”

매가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주변의 사소한 부분까지 잘 보고 기억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생을 마감하기에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 풀밭과 나무가 우거졌고, 오래된 오솔길도 있었다.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거친 껍질로 둘러싸인 나무들을 바라보며 매가가 대답했다. “양의 화살이 낫겠어요. 어렸을 때처럼 가장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라간다고 상상하겠어요. 이번에는 오르는 걸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야겠지만요. 당신들과 가는 건 이런 느낌인가요?”

양이 말했다. “아니, 오늘은 아냐. 네 생각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무서워하지 마, 어린 아가씨. 우린 그냥 널 조금 놀렸을 뿐이야. 오늘 밤엔 우리가 너한테 온 게 아니라 네가 우리한테 온 거니까.”

“매가 녀석을 쫓을 수 없다니.” 목소리에 실망한 기색을 띤 채 늑대가 말했다. “그렇지만 근처에 다른 것들도 있겠지. 쫓고 물어뜯기 알맞은 것들 말이야. 양, 서두르자. 나 배고파.”

“오늘은 우리가 네 연기에 만족했다는 것만 알아둬.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지켜볼 거야.”

늑대가 매가를 지나 무성한 잔디밭에 구불구불한 모양을 그리더니 이내 숲 속으로 사라졌다. 매가가 오래된 무덤 쪽을 돌아보았다. 양도 온데간데없었다.

매가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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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지로 돌아간 매가 앞에 폐허가 펼쳐졌다. 이제 겨우 집이라고 부르게 된 마차는 누군가 샅샅이 뒤지고 난 후 까맣게 타버리고 연기 나는 껍질만 남아 있었다. 찢어진 옷가지와 망가진 소도구 몇 개가 야영장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매가는 덴지가 자던 곳 근처에서 덴지의 시체를 발견했다. 트리아의 시체는 그의 시체 뒤에 있었다. 덴지는 트리아를 보호하다 죽은 것 같았다. 핏방울 자국으로 추측하건대 둘 다 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듯했다. 서로를 끌어안으려고 했는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서로의 손길을 느끼고자 했는지, 그들의 손가락은 얽혀 있었다.

바짝 탄 일루시안과 파르의 시체가 마차 안에 있었다. 일루시안이 죽인 듯한 도적 두 명의 시체도 근처에 있었다.

손댄 흔적 없이 멀쩡한 것이라곤 덴지가 쓰던 늑대와 양 가면뿐이었다. 매가는 그 가면들을 집어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양의 탈 쪽이 앞으로 보이게 가면을 썼다. 늑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가 녀석 쫓아가자.”

매가는 니들브룩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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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원형극장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의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흥분에 가득 차 벨벳커튼만 쳐다보고 있었다. 왕도 왕비와 신하들과 함께 극장에 앉아 연극이 시작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검은 커튼이 열리고 배우들이 등장하자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매가는 무대 밑 분장실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객석에 침묵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젊음의 눈부신 빛이 눈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머리에는 백발이 넘실거렸다.

“선생님!” 무대 담당자가 말했다. “옷 아직 안 갈아입으셨네요?”

“그래, 얘야. 나는 등장 바로 직전에 갈아입는단다.”

오펠럼 메커니컬 극단 시절부터 매가와 함께했던 늑대와 양 가면을 든 채 어린 무대 담당자가 말했다.

“이제 진짜 갈아입으셔야 해요. 오늘 밤 공연도 잘 되시기를 빌어요.”

매가가 무대에 나갈 준비를 했다. 가면들을 머리 위에 썼다. 오래전 음침한 무덤가에서 느꼈던 음산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대 위로 미끄러지듯 등장한 매가는 양의 우아한 몸짓을 재현하며 관객을 사로잡았고, 늑대의 장난기 섞인 난폭함을 연기하며 관객에게 스릴을 선사했다. 그녀는 이 쌍둥이 죽음의 화신이 되어 동료 연기자들의 고통을 달래주거나 그들의 목덜미에서 고통을 물어뜯어 버렸다. 연극이 끝나자 관객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정말 그랬다. 관객들은 좋은 죽음 장면에서 만족을 느꼈고, 그중에서도 매가의 죽음은 최고였다.

왕과 왕비까지 일어나 그녀의 연기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매가는 박수 소리를 듣지도, 일어난 관객들을 보지도 못했다. 발밑의 무대도 온데간데없었다. 함께 손잡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동료 연기자들의 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것이라곤 가슴의 날카로운 고통뿐이었다.

매가가 객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객석에는 양과 늑대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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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소아테스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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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쓴 타놀드는 연극이 망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배우들은 무대 공포증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극본 때문인지, 죽은 작가의 미완성 작품을 공연하는 것에 대한 미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든 배우가 하나같이 아마추어라도 된 듯 어설프게 행동했다.

철학자 역할을 맡은 아틀로는 계속해서 죽어 가는 연기만 했다. 양과 늑대로 알려진 한 쌍의 섬뜩한 영혼 옆에서 말없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연기를 할 때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숨을 꺽꺽거렸다. 이번에는 네니가 어찌나 크게 웃음을 터뜨렸는지 쓰고 있던 양 가면이 벗겨졌을 정도였다. 가면은 쩍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에밀은 늑대 가면을 벗었다. 날카롭고 들쭉날쭉한 가장자리에 턱살을 심하게 쓸린 에밀이 통증에 움찔거렸다. 타놀드는 에밀이 또다시 약을 바르겠다고 말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 타놀드가 말했다.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었다. 무언극 전용 원형 극장은 입장료를 반만 내고 처마에서 관람하는 관객에게도 아주 작은 한숨 소리까지 또렷이 전달될 정도로 울림이 뛰어났다.

성주의 언덕 위 성채 근처에 있는 이 오래된 극장에서는 어두운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늘처럼 연회가 열리는 밤이 되면 거나하게 취한 귀족들이 무언극을 감상하기 위해 성주의 저택에서 내려오곤 했다. 술에 취해 불만을 표출하는 귀족 관객은 연극을 망쳐서 당하는 굴욕보다 더 끔찍했다.

배우들은 자세를 풀고 고개를 돌려 타놀드를 바라봤다.

타놀드는 손가락으로 콧등을 문지른 후 무대 옆을 쳐다봤다. 정갈한 검은색 옷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돌로 된 층계에 기대어 있었다.

"두아르테." 타놀드가 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에게 말했다. "시간을 최대한 끌어 줘."

두아르테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신호할 때까지 관객을 붙들어 두지."

"설령 레이디 에르힌이 병환을 떨치고 일어나서 연극을 보겠다고 하더라도 절대 방해하면 안 돼. 이제 거의 막바지야, 두아르테. 다 같이 합이 맞아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그럴 거야, 타놀드.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하면 뭔들 안 되겠어?" 행운을 빌며 입을 맞춘 손바닥을 층계에 올린 두아르테는 곧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더니 극장을 나갔다. 육중한 빗장이 큰 소리를 내며 걸릴 때까지 극장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해가 저물어 가며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형 극장이 틈 하나 없이 봉쇄되자 타놀드는 울화통을 터뜨렸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불을 건넬 녀석이군. 죽는 연기는 한 번이면 충분해, 아틀로." 타놀드는 네니를 돌아봤다. "스카고른의 딸, 아무리 아틀로가 멍청한 짓을 했다지만 그만 웃어.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웃음기 빼고 차가운 죽음의 기운을 발산해 보라고." 마지막으로 타놀드가 에밀을 가리켰다. "뺨에 피가 흐르잖아. 두드려서 닦아."

"이 망할 늑대 가면 안에 뭐라도 덧대야겠어요."

"그 고통을 연기에 투영해 봐! 소아테스가 죽어 가면서 킨드레드 이야기를 쓸 때 아프다고 불평했을 것 같아? 아니야.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소아테스의 가보에 뺨이 쓸렸잖아."

"가면이 안 맞아요." 네니가 무대에 떨어진 양 가면을 주우며 말했다. "계속 흘러내린다고요."

"그럼 끈을 써!" 타놀드가 허리띠를 풀어 네니의 발치에 던졌다.

끊임없이 연습했건만 극단은 소아테스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극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타놀드는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알더버그의 최고이자 유일한 극장을 책임지고 있는 극작가로서 소아테스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암울한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수원의 양'은 소아테스가 최후의 광기를 쏟아 낸 작품이야. 소아테스의 마지막 불꽃이 여기, 우리 손에 있는데... 너희는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연기하면서 소아테스의 유산을 모독하고 있어. 소아테스는 죽음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또 버텼지. 소아테스가 이 장면을 쓰다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이 덧없고 비극적인 일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배우들은 침묵을 지켰다. 반성하는 것도 같았다. 그때 목을 가다듬은 아틀로가 목소리를 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요." 멀쑥한 데마시아인 아틀로가 입을 열자 타놀드는 그 말뜻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고 또 시작이냐는 듯 눈을 굴렸다. "애초에 미완성 작품을 남이 완성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요."

타놀드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 얘기를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신성한 작품을 모독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이야?"

"극본에 깃든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엔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부족한 것 같아? 때는 이미 늦었어!" 타놀드는 극장의 나무 벽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 줄기를 가리켰다. 햇빛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한기가 타놀드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우리가 아는 부분만 무대에 올리고 미완성 부분은 그냥 두는 게 어때요? 소아테스를 기리려면 그편이 낫지 않겠어요? 인정 좀 하세요." 아틀로가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해선 방법이 없다고요!"

아틀로의 말이 맞았다. 극단은 소아테스가 쓴 다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불꽃을 재현하는 데 실패했다. 소아테스에게 심취한 극단의 병든 후원자는 미완성 작품을 끝내 달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해 왔다. 절박함을 느낀 타놀드는 자르반 2세가 있는 서쪽의 위대한 도시로 두아르테를 보내 소아테스가 소장했던 연극 가면들을 찾게 했다. 가면들은 아주 오래되어 가격이 상당히 나갔다.

머리를 푹 떨군 타놀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바닥에 드러누워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더 거세게 뛰었다.

"공연을 취소해야 해." 이마를 문지르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손에 땀만 묻어나올 뿐이었다. "그러면 환불을 해 줘야 할 텐데." 타놀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돈은 이미 다 써 버렸어!"

"이런 때 말하긴 좀 그런데, 양 가면이 깨졌어요."

타놀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뭐?"

"얼굴에서 떨어질 때 깨졌어요. 사고였어요!" 네니가 깨진 가면 조각을 들어 보였다. 나무로 된 귀 한쪽이 부러져 있었다. "잘하면 묶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환장하겠군." 타놀드는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돈을 다 쓴 게 그 가면 때문인데. 그건 소아테스가 소장했던 가면이야. 심지어 대출까지 해서 산 거라고!"

"사고였다잖아요." 에밀이 말했다.

"생각을 해 보자." 타놀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훑어보았다. 층진 원형 극장은 수 세기 동안 자리를 지켜 왔다. 돌로 된 층계는 원형 극장의 토대라고 할 수 있었다. 원형으로 우뚝 솟은 판돌은 녹머치에 사람이 살기 훨씬 전부터 극장 자리에 서 있던 것이었다. 요 몇 년 사이에는 극장에서 진행하는 연극과 의식이 관객에게 더 잘 보이도록 위에 설 수 있는 나무 단까지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배우들과 가수들은 기둥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신성한 극장에 자신만의 표식을 남겼다.

힘든 시기에 극장은 타놀드의 집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타놀드가 관리하는 극장은 모든 슬픔의 근원이었다.

"깨진 가면을 보니 두 가지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중앙 발코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부유한 귀족들이 앉는 곳이었다. 타놀드는 혼자 있을 때도 감히 그 자리의 고급 쿠션에 머리 한 번 기대어 본 적이 없었다. "가면 제작자의 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세 가지겠지만... 그 이야기는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요."

"연습할 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타놀드가 배우들에게 말했다.

"저 여자는 내내 여기 있었어요. 저희는 작가님이 데려오신 분인 줄 알았죠." 네니가 말했다.

'내내 여기 있었다고?' 그럴지도 몰랐다. 타놀드는 몇 주 동안 불면증에 시달린 상태였다. 타놀드가 황금 좌석에 있는 여자를 휙 돌아보았다. 그 좌석은 레이디 에르힌이 앉을 자리였다. 두 해 전에는 자르반 2세의 꼬마 후계자가 저 벨벳 쿠션에 앉아 타놀드가 연출한 '모든 물고기의 왕'을 관람했다. 그 후계자는 마지막 커튼이 내려갈 때까지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누구십니까? 밝은 곳으로 나오세요."

여자가 앞으로 나왔지만, 밝은 곳에서도 여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낼 순 없었다. 여자의 눈은 마치 안개 너머 먼 곳에서 빛나는 별 같았다. 게다가 으스스한 반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가면 위에 특이하게 꼬인 가지가 싹처럼 돋아 있었다. 그 가지에는 색이 어두운 잎 하나가 붙어 있었다. 여자의 우아한 걸음걸이에서 귀족 특유의 태도가 느껴졌다. 타놀드는 마침내 여자의 옷에 장식된 문장을 알아봤다.

여자는 병환을 떨치고 일어난 극단의 후원자였다.

"레이디 에르힌, 몰라뵈었습니다! 절 용서해 주십시오." 타놀드가 예의를 차리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쓰고 계신 가면이 뭔지 여쭈어도 될까요? 어쩐지 익숙한데 기억이 안 나서 말입니다."

"엘드록으로 만든 가면이에요." 레이디 에르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지만 말은 뚜렷하게 들려왔다. "엘드록 나무에서 자른 목재는 그 어머니 나무가 살아 있는 한 계절에 따라 계속해서 함께 꽃을 피운다더군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둘 사이의 끈은 끊기지 않는다고 하죠."

"정말 굉장하군요."

"제가 방해한 모양이네요." 레이디 에르힌이 배우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제안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타놀드가 손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무대 옆과 무대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배우들도 이번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후원자분이 해 주시는 조언은 언제나 환영이지요."

"소아테스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모든 배우가 가면을 썼어요. 모두 가면을 쓰면 소아테스가 밤의 품에 안기며 미친 듯이 펜을 휘갈길 때 죽음의 문턱에서 본 이상한 영혼들과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거 괜찮네요! 가면을 넣어 둔 트렁크가 어디 있죠? 거기 다른 가면도 있었는데요." 아틀로가 무대 뒤로 사라지며 외쳤다.

"잠깐, 일단 얘기를—"

타놀드는 엘드록 가면을 쓴 수척한 여인이 두 손을 마주 잡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레이디 에르힌의 모습이 어쩐지 이상했다.

타놀드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틀로가 자신의 키만큼 긴 트렁크를 끌고 무대로 돌아왔다. 트렁크 옆에는 길게 'Q. W. 소아테스'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타놀드는 문득 낡은 트렁크의 모습이 관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틀로가 무거운 트렁크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죽은 시인의 냄새가 나는 것 같네요."

'말하는 것하고는...'

녹슨 경첩이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굶주린 개의 울음소리처럼 극장 안을 울렸다. 나머지 배우 둘은 목을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레이디 에르힌이 입을 열었다. "가면을 고르기 전에 잘 들으세요. 시간이 늦었어요. 곧 연극을 시작해야 하죠. 모두 각자에게 맞는 가면을 고른다면 오늘 밤은 진정으로 기억에 남을 밤이 될 거예요. 우리가 연기하는 영혼이..."

"우리 안에 깃들 테니까요." 에밀이 말을 마무리했다.

"배우들의 신조네요." 네니가 말했다.

아틀로는 씩 웃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해야지 어쩌겠어요. 작가님도 오세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으니 다 같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연극을 선보여야죠."

"대담하군요." 레이디 에르힌이 말했다.

타놀드는 레이디 에르힌의 얼굴에서 이상한 미소를 감지했다.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아르테가 떠날 때 귀족들이 앉는 발코니는 비어 있지 않았던가? 분명히 극장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지금 보니 레이디 에르힌도 평소와 어딘가 달랐다. 수척하다 못해 뭔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병환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서서히 극장을 메웠다.

"레이디 에르힌, 건강을 되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망토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이 정도는 되어야 잊힌 시인을 기리는 가면이라고 할 수 있죠." 아틀로가 말했다.

손을 흔들어 타놀드의 제안을 거절한 레이디 에르힌은 아틀로를 돌아봤다. "불길한 가면을 선택했네요. 독수리는 남은 것을 쪼아 먹고, 남은 게 하나도 없으면... 아주 멀리 날아가서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후 다음 식사를 기다리죠."

"소아테스의 유산을 쪼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주 기대되는데요?" 아틀로가 몸을 돌려 얼굴에 쓴 가면을 과시했다. 길게 굽은 부리가 달린 백골 가면이었다. 사체를 먹는 새의 모습 같았다.

수척한 모습의 레이디 에르힌이 무대로 다가갔다. 아주 오래된 존재 같으면서도 건강하고 우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피부는 살이 아니라 매끄럽게 굳은 석고를 떠올리게 했다. 밤을 옮겨 놓은 듯한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리며 바깥으로 퍼졌다. 타놀드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둘을 헷갈릴 수 있었을까?

"당신은 레이디 에르힌이 아니군요."

배우들은 타놀드의 깨달음을 알지 못했다. 타놀드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배우들의 말도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랑 가면 바꾸자." 네니가 에밀에게 말했다. "넌 피부가 약해서 이런 가면 쓰면 안 돼. 차라리 피부가 거친 내가 쓰는 게 낫겠어."

"굳이 이 아픈 걸 쓰겠다면야..." 에밀이 네니에게 늑대 가면을 건넸다. "그 예쁜 광대뼈까지 까지게 생겼네."

두 사람이 맞바꾼 가면을 얼굴에 썼다.

벽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나며 원형 극장에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덧문은 덜컥거리며 닫혔다. 타놀드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바람 사이로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심장 소리가 들려, 양아."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타놀드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배우들뿐이었다. 배우들은 타놀드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그때 왼쪽 귓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노래했다.

"빛의 파편이

어둠 속에서 춤추며

끊임없이 움직이네..."

그 말에 타놀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대 위에서는 가면을 바꿔 쓴 네니와 에밀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때 둘의 입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 에밀이 한껏 높아진 가성으로 말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경쾌한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늑대야, 이제 네가 보이는구나."

"아아아." 네니가 안도하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기분이 나아졌어, 양아." 네니는 네발로 기듯 자세를 바꾸더니 몸을 아래로 쭉 늘리며 기지개를 켰다. 도저히 사람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냥 놀이를 할 시간인가?"

"장막이 걷히면

할퀴고 물어뜯으렴.

화살을 쏜살같이 날려 다음 막으로 넘어가자."

타놀드가 수척한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극장을 가로질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제발 우리를 내버려 둬요!"

여인이 타놀드를 돌아봤다. "난 당신의 후원자가 아니에요."

타놀드는 가면을 쓴 배우들을 바라봤다. "다들 무대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 연극은 끝났어."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빗장이 걸린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두아르테!"

"타놀드..." 레이디 에르힌인 줄 알았던 여인이 돌아서서 커다란 눈을 빛내며 타놀드를 바라봤다. 두 눈은 엘드록 가면 뒤에서도 어둠에서 태어난 듯한 빛으로 반짝였다. 타놀드는 그 으스스한 안광에 정신을 빼앗겼다. 이 여인을 알면서 알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여인이 무서운 동시에 여인에게 이끌렸다. 여인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어리석으면서도 합리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타놀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다들 가면 벗어. 당장. 제정신이 아니군... 이건 저주받은 연극이야! 모르겠어? 소아테스가 단순히 극본을 쓰다가 죽은 게 아니라 '과수원의 양'을 썼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 이 이야기 자체가 저주나 마찬가지라고!"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수척한 여인도, 네니의 늑대도, 에밀의 양도 아니었다. 아틀로, 혹은 아틀로의 입을 통해 말하는 무엇인가가 날카롭게 긁는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틀로는 시체를 먹는 새처럼 두 팔을 높이 벌리고 한 다리로 서 있었다.

"소아테스는 내 부리를 기다리고 있지." 아틀로가 말했다. 아틀로의 입꼬리가 쩍 갈라졌다. "소아테스는 완전히 죽었어... 이제 소아테스를 예전처럼 기억하는 자는 아무도 없거든." 팽팽하게 당겨진 아틀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 목소리에 타놀드의 심장이 잠잠해졌다. 타놀드는 걸음을 멈췄다. "소아테스는 곧 사라지고 잊혀서 나와 함께 날아갈 거야. 그저 종이의 글, 바람에 실린 이름이 되어... 일부만이 남겠지."

"소아테스의 일부도 여전히 소아테스예요." 수척한 여인이 말했다.

"저자가 연극을 중단했어..." 가엾은 아틀로의 입을 통해 말하는 존재는 아틀로의 몸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틀로의 팔이 앞으로 격하게 비틀리며 펴지더니 앙상한 손가락이 비난하듯 타놀드를 가리켰다. "그런데 혼자 가면을 쓰지 않았군..."

"당신은 소아테스에게 거의 다 왔어요." 여인이 타놀드에게 말했다. "가면을 골라 소아테스의 마지막 장면을 직접 확인해 봐요."

타놀드는 극장에서 도망칠까 생각했다. 언덕 위에 있는 성주의 성채나 마을로 달아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레이디 에르힌의 집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타놀드는 수척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해가 거의 다 저물어 있었다. 다가오는 밤을 반기며 울어 대는 곤충과 밤새 소리가 묘한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소아테스의 마지막 순간, 마지막 장면을 상상하며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모두가 가면을 써야 해요." 여인이 말했다.

입을 떡 벌린 타놀드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엘드록 가면에 붙은 어두운 잎이 알 수 없는 바람에 흔들렸다.

"꼭 가면을 골라야 한다면, 저 트렁크나 무대에 있는 가면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타놀드는 잠시 경직되어 움직이기 힘들었던 팔다리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수척한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내 가면을 쓰고 싶나요? 잘 결정했어요, 타놀드. 역시 창의성과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은 다르군요. 와서 직접 가면을 벗기도록 해요."

"당신의 가면을 가져가 당신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연기하는 영혼이..."

"...우리 안에 깊숙이 깃들기를." 여인이 마무리했다.

살아 있는 엘드록 가면을 가져가 얼굴에 쓴 타놀드는 마침내 소아테스가 쓴 미완성 작품의 진정한 결말을 보았다. 완벽하고 끔찍하며 생명이 차오르는 동시에 숨이 멎는 듯한 결말이었다.

타놀드가 입을 열었다. "각자 자리로 이동해라. 우리의 이야기는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다 같이 합을 맞춰 하나가 되고, 목숨을 바쳐 한목소리로 노래하자."

"목숨을 바쳐서." 양, 늑대, 독수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함께 연극을 시작했다.


두아르테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레이디 에르힌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하루 종일 타놀드에게 숨기는 데 성공했다. 에르힌 가문의 새 주인은 동트기 전 레이디 에르힌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극단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 타놀드는 유독 힘들어할 게 분명했다.

슬픔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비극에 그저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디 에르힌이 죽기 직전 극단에 재산을 넘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타놀드에게 재산의 영구 소유권을 넘긴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술에 취한 귀족들은 기다림에 지쳐 갔다. 심기가 뒤틀린 성질 나쁜 귀족들이 조롱하거나 폭언을 퍼부을지도 몰랐다. 심하면 극장 활동에 제재를 걸 가능성도 있었다.

두아르테가 레이디 에르힌을 애도하느라 칙칙한 무채색 옷을 입고 모여든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문을 열라는 타놀드의 신호가 들려왔다.

두아르테는 문으로 달려가 육중한 빗장을 풀었다. 앞다투어 안으로 들어간 관객은 이내 검은 줄기가 달린 시든 장미로 뒤덮인 무대에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배우들을 보고 멈춰 섰다. 그 섬뜩한 장면에 기대감으로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관객은 입을 다물고 각자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이동했다. 극장에서 빈자리는 레이디 에르힌의 자리뿐이었다.

모두 소아테스의 오래전 잊힌 미완성 걸작이 시작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동안 배우들은 힘들어 보이는 자세를 미동 없이 유지했다.

타놀드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개막 첫날에 출연진만 달랑 내보내다니 타놀드답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타놀드는 관객을 맞이한 후 포도주 한 병을 들고 무대 옆으로 가 연극을 지켜보곤 했다.

두아르테는 고개를 돌려 무대 위 배우들을 살펴봤다. 네니와 에밀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늑대 가면을 쓴 네니는 손에 든 화살로 에밀의 옆구리를 찌른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에밀의 두 손은 네니의 목에 감겨 있었다.

철학자 역할을 맡은 아틀로는 어찌 된 일인지 죽음의 까마귀를 닮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양팔을 커다란 날개처럼 펼치고 소품 나무 꼭대기에 걸터앉아 다른 두 배우를 내려다보는 모습이었다. 팔에는 죽은 꽃들이 깃털처럼 달려 있었다.

배우들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관객은 연극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두아르테는 무대 뒤로 가서 타놀드의 지정석을 확인했다. 포도주 병도, 타놀드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과수원의 양' 극본이 놓여 있었다.

두아르테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이야기는 여전히 미완성이었지만 타놀드의 글씨로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가면을 쓰지 않는 자는 끝을 볼 수 없다. 그녀가 보여 준 끝은 정말 아름다웠다.'

[1] 배경은 자르반 3세의 치세 이전의 데마시아로, 소환사들이 전쟁학회를 만들기 전이라 데마시아녹서스 사이에 한창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