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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특공부대

제66특전대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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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제66특전대대2.2. 제606특공부대2.3. 제27특공부대2.4. 해체
3. 여담4. 관련 문서5.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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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존재했던 대테러/경호 부대.

2. 역사

2.1. 제66특전대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후, 대한민국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제6대대[1]를 모체로 제66특전대대를 창설하여 대통령 경호 등의 임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66특전대는 1977년 12월 12일에 창설된 666특공대에 잠정 편성되었다가 1978년 6월 1일 한국 최초의 대테러부대606부대로 개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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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기록물

같은 숫자가 연속된 특유의 네이밍 센스는 역시 같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창설된 경호실 작전부대들인 제33헌병경호대, 제55경비단, 제88경호지원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2.2. 제606특공부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독일 연방경찰 소속 GSG-9 부대가 1977년 10월에 발생한 민항기 루프트한자 납치 사건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대테러부대의 필요성을 느껴 부대 창설을 지시했고, 특전사령부에서 대통령경호실[2]에 작전 배속되었던 제66특전대대로부터 분리하여, 1978년 6월 1일에 한국 최초 대테러 부대인 제606부대가 창설되었다. 대통령경호실에 따르면, 제606부대의 전신인 특전사 66대대는 1977년 12월 12일에 창설된 666특공대에서 잠정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20명으로 조직된 후, 1978년 3월 11일에 57명으로 증편되었다. 당시만 해도 666특공대와 대통령경호실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지 못했다.

오늘날 경찰특공대(SOU) 등 대테러부대들이 입는 검은 전투복(흑복)의 기원은 606부대원의 복장이다. 한국군 중에서 이 606부대가 최초로 흑복을 입었고, 이후에 생긴 대테러쪽 부대들도 이런 흑복을 입는 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606부대원들은 매일 대테러에 특화된 무술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부대원 모두가 격투기 복싱 태권도 합기도 유도등 무술 고수들로 구성되었기에 무술 개발에 큰 어려움없이 개발하게 된것이다. 이 무술은 일격필살 살상무술 불렸으며, 특공무술은 606특공부대를 특공대라 불리고 지휘관을 특공대장이라 칭하였고 특공사격 특공장애물등 특공부대이니 특공무술이라하는게 좋겠다 하여 지휘관을 비롯한 특공대부대들의 의견을 수렴 하여 연무관에서 시범을 보인후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보고하고 경호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를 수락하여 무명이 특공무술이 되었다 현재 특전사 및 군에 보급된 특공무술이 바로 이것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특전사 내에 자신을 보호할 친위 경호부대 창설를 지시한다. 특전사를 지목한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수특전단 초창기 멤버였으며 훗날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역임한 영향이 크다. 이후 606부대가 27부대로 개칭되고 청와대에 배속돼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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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 선발은 전원 특전사 소속으로 특전사 예하 각 여단에서 무술 고단자와 사격 특기자를 중심으로 뽑았다. 이들은 공군항공의료원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고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쳐 606특공부대로 전입했다. 606부대는 편제상 특전사 소속이었지만 청와대 경호실에 예속돼 경호실장의 지휘를 받았다.[3] 초대 부대장은 김택수 중령.

김 중령은 김포공항 주변을 물색한 끝에 공군 부대의 유류저장고가 있는 낮은 구릉지대를 부지로 선정했다. 김포공항에 가까운 지역을 고른 것은 부대의 주임무가 항공기 납치사건 해결인 만큼 공항 주변에 있는 폐(廢)비행기를 훈련대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부대 막사는 현대건설이 지었다. 비행기 모양의 2층 건물이었다. 장교와 부사관은 영외거주자로 출퇴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606부대원들은 대부분 부대에서 기숙했다. 야간훈련이 많았기 때문이다. 야간훈련이 많다 보니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또 훈련 양이 많은 까닭에 식사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창설 당시엔 1개 특공대만 있었으나 1년쯤 후 1개 더 늘어 모두 2개 특공대로 구성됐다. 각 특공대는 장교 4명과 부사관 44명으로 구성됐다. 장교는 특공대장인 소령과 위관장교 3명으로 구성됐고, 부사관 중에는 중사가 가장 많았다.

그밖에 지원부서 병력이 20여 명 됐다. 지원부서는 인사, 작전, 정보, 군수팀과 수송부로 구성됐다. 지원부서엔 병이 많았는데, 특히 정보팀엔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병사들이 배치됐다. 당시 606부대에 배속된 프랑스어 특기병은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의 아들이었다.

606부대 창설 요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특전사 대원이 모였기 때문이다. 특히 장교들의 경우 경쟁이 치열했다. 진급에 유리한 데다 청와대와 가깝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우도 좋았다. 606특공부대원 전원에게 급여 외에 경호수당으로 매월 10만원이 지급됐다. 1970년대의 10만원이면 상당한 액수였고, 특히 부사관에게는 큰 돈이었다.[4] 식사도 잘 나왔고 피복 지급 상태도 좋았다.

2.3. 제27특공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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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차지철이 피살된 이후, 606부대는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의 경호를 위해 606부대가 경호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통령경호원들은 최규하 대통령을 경호해야 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경호를 맡을 수 없었고, 그러던 차에 606부대가 전두환의 경호를 맡게 되면서, 대테러가 임무였던 606부대에 경호업무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1979년 12.12사태 이후 606부대원의 절반 정도는 경호실에 남고, 나머지는 김포공항에 주둔하였다. 경호실에 있었던 부대원들은 본격적인 경호업무로 전환하여, 대통령․안기부장․보안사령관 등의 숙소 경호를 수행하게 되었다.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일 때 경호를 하던 606부대가 특전사로 원대 복귀하면서 경호실 배속에서 빠졌다가, 1980년 5월에 오형근[5]이 부대장이 되면서, 제606부대가 제27부대[6]로 명칭을 바꾸고 경호부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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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해체

1981년 4월 17일 707특임대가 창설되면서 대테러 임무를 이관하고 대통령 경호 임무만 수행하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전사 내에 충정교육을 폐지하고[7], 27부대가 맡고 있던 대통령 경호 임무 일부를 경찰특공대로 이관시키면서 1994년 친위부대 성격이 짙은 27부대를 해체시킨다.

3. 여담

4. 관련 문서

5. 참고 자료

한국군 최초 대(對)테러부대 606부대 秘史 - 신동아
한국의 대테러부대 어떻게 시작됐나 - 아시아경제
특공무술의 개발과 발전에 관한 경호사(警護史)적 함의[9]


[1] 현재는 여단 특임대이다. 6대대 → 특임대 → 정찰대 → 특임대 순으로 명칭이 바뀌어왔다.[2]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저격 사건 전까지 대통령경호실의 업무는 군대와 조직적으로 연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 이후에 101경비단(경찰), 22특경대(경찰), 33헌병대, 55경비대, 66특전대, 88지원대 등의 부대가 들어와서 경호와 경계 업무에 참여하기 시작했다.[3] 참고로 현 대통령경호실 소속 군부대들도 이런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제상 소속은 군(수방사, 국통사), 지휘계통은 경호실.[4] 당시 라면 1봉지가 50원, 택시 기본요금이 200원, 밀가루 1포대가 770원, 대졸초임 신입사원의 연봉이 40만원이 안되던 시절이었다.[5] 육사 22기, 606부대장이었던 김택수의 후임으로 1980년 5월부터 27특공부대에 부임했다.[6] 김택수 중령의 육사시절 럭비부 등번호 27에서 유래 했다는 설이 있다.[7] 단, 충정계획은 1989년부터 상록수계획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김대중 정부 때부터 쿠데타 방지를 위해 군 지휘관의 자의적인 병력 이동을 금지시키는 등 대폭 수정하였다.[8] 1983년 10월5일 치안본부(현 경찰청) 제2부 경비과 산하에 창설되었다. 부대명 KNP868(Korea National Police 86/88)은 '86 아시아게임'과 '88 서울올림픽'에서 나온것이다.[9] 한국경호경비학회지, 2008, 제15호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 강사 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