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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46:34

장징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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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경요.jpg
중화민국 호남독군
만주국 평진 2집단군 총사령
정체 張敬堯
간체 张敬尧
한국식 독음 장경요
영문 Zhang Jingyao
훈신(勳臣)
출생 1881년[1] 청나라 안휘성 사구현
사망 1935년 5월 8일 중화민국 톈진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만주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학력 바오딩 군관학교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호남에서의 통치2.3. 구장운동과 몰락2.4. 말년
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안휘군벌의 주요 일원으로 호남독군을 지냈으나 탄옌카이, 자오헝티 등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화북분리공작을 실행하던 일본의 주구가 되었다가 남의사에게 암살된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1년 안휘성 영주부 사구현 출신이다. 1896년 북양신군에 입대, 바오딩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1911년 북양군 제6진 11협 22표통을 지냈고 1912년 6진이 6사단으로 개조되자 6사단 11여단 22단 단장을 지냈다. 1913년 계축전쟁이 일어나자 강서성에서 혁명군을 진압했으며 그 공으로 11여단장 겸 난창위수사령에 임명되었다. 1914년 3혼성여단장에 임명되어 백랑기의 진압에 참여했고 그해 9월 7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2로군에 소속되어 사천성에서 호국군과 교전했으며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의 일원이 되어 악예환노 사성변경초비독판에 임명되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벌어지자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정책에 호응하였고 11월 돤치루이 내각이 호남, 사천전선의 패배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게 되자 주춤하였으나 3월에 주전파 독군들의 시위로 왕스전 내각이 사퇴하고 돤치루이 내각이 재출범하면서 다시 활약하게 된다. 부총통 자리 등을 약속하며 직예군벌을 포섭한 돤치루이는 차오쿤, 우페이푸 등이 지휘하는 정예군을 호남에 투입하였으며 장징야오에게도 7사단을 주어 악주를 정면공격하게 하였다.

1917년 3월, 16만명을 동원한 북양정부의 대공세에 호법군이 참패하여 철수하였고 호남성은 북양정부의 손에 들어왔다. 호남전선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3사단장 우페이푸였지만 돤치루이는 자파의 세력 확대를 위하여 3월 27일, 장징야오를 일방적으로 호남독군 겸 성장에 임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직예군벌과 안휘군벌의 사이는 극심하게 갈라지게 된다. 결국 불만을 품은 우페이푸는 6월 들어서 정전을 선언하고 더 이상 호법군과 싸우기를 거부한다. 이 때문에 당황한 장징야오는 일시적으로 호남독군에서 사직을 청하기도 했지만 자파 세력을 확대한다는 돤치루이의 방침에 따라 자리를 보전하게 된다.

2.2. 호남에서의 통치

호남성은 계속된 내전으로 황폐화되어 있었으며 호법군과 대치하는 남부 지역은 우페이푸의 직예군이 점거하고 있어서 장징야오가 장악한 지역은 제한적이었지만 일단 장징야오는 7사단과 11사단을 동원하여 창사, 평강 지역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여기에 1919년 7월, 상남 지역에서 경쟁자 청첸을 제거한 탄옌카이가 군정부의 명의로 호남독군 겸 상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호남성은 1성 2독의 상황이었다.

장징야오의 호남에서의 통치는 억압적이고 반동적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당을 짓게 하고 총통 선거나 큰 토목공사를 기공할 때마다 점을 쳐서 날짜를 정하였다. 또한 자신이 주둔한 창사에서 마구 재물을 약탈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였으며 성농회, 성공회, 성교육회, 성의회 등에 측근을 심어 어용단체화하고 교육경비를 멋대로 군비로 사용하는가 하면 성의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상은행(裕湘銀行)을 설립, 닥치는대로 지폐를 남발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남발된 지폐를 회수한다는 명목으로 호남은행정리처를 설립하여 새롭게 은양 5원권 200만장을 발행하였는데 이를 각현에 할당량을 부과하여 강제 인수하게 하여 막대한 차익을 추구했다. 여기에 호남성 소유의 아연광산을 마구 팔아치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호남 사람들은 치를 떨며 그를 호랑이, 늑대만큼이나 무서운 '장독'이라고 불렀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주장이 무시되고 독일령 산동반도를 일본이 먹어치우는 결과가 나오자 분노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이 벌어졌는데 호남성의 학생들도 1919년 5월 7일 반일시위를 거행했다. 하지만 장징야오는 군경을 풀어 시위를 가혹하게 탄압하고 해산시켰다. 그리고 호남성의 언론을 탄압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등을 하지 못하게 했는데 이때 폐간시킨 신문이 마오쩌둥이 발간하던 <상강 평론>도 있었다.

2.3. 구장운동과 몰락

결국 1919년 말부터 장징야오의 계속된 학정에 분노한 호남성민들이 들고 일어나 호남 각계에서 장징야오를 축출하자는 구장운동이 일어난다. 5.4운동으로 촉발된 분노는 반일 애국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장징야오 정권에 대한 투쟁으로 차차 발전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복건성에서 일본군과 중국인들 사이의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에 12월 2일 창사에서 다시 항일시위가 열렸고 상인들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에 장징야오는 자신의 동생이자 참모장 장징탕을 시켜 기마대를 풀어 학생과 상인들의 시위를 진압하고 이들을 토비로 비난하였다. 결국 신민학회와 호남학생연합회가 12월 3일, 긴급회의를 소집, 12월 6일부로 동맹휴업을 선포하고 북양정부에 장징야오 소환을 요구하였다. 구장운동은 호남인들이 거주하던 상하이를 비롯하여 외지에도 퍼져나갔다. 허나 돤치루이가 장악한 북양정부는 장징야오를 비밀리에 조사하겠다고 입장을 밝힐 뿐 장징야오를 소환하거나 징계하지 않았다.

1920년 5월 16일, 창사에서 호남인민선언문이 발표, 다음과 같이 장징야오를 공격했다.
장징야오는 병(兵)을 이끌고 호남에 와서 시민, 학생들과 싸우고, 그 악질 측근들이 장사를 누비며 암살과 착취를 일삼았다. 장징야오가 하루라도 빨리 죽지 않으면 우리 호남인은 하루도 살수가 없다. 호남인의 이같은 비참함에 이른 이유를 따져보면 그 원인이 군벌에서 비롯되어 우리 인민을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깨닫는다. 호남은 현재와 미래의 호남지역에서 정당한 직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호남이다. 호남의 일은 마땅히 전체 호남 인민들이 자결해야 하니, 이 자결을 돕는 자는 호남인의 친구이고 이 자결을 방해하는 자는 호남의 원수라고 할 것이다.

호남 민중들은 호남에 주둔하던 우페이푸, 펑위샹에게도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안휘군벌과 사이가 좋지 않던 직예군벌들도 구장운동을 지지, 후원하며 장징야오를 간접적으로 압박했다. 5월 25일, 우페이푸가 베이징의 돤치루이와 맞서기 위해 북상을 실시하자 탄옌카이가 지휘하는 상군이 북상하여 요충지를 차례로 접수했다. 장징야오는 2사단장 오신전(吳新田)과 1사단장 전수훈(田樹勛)을 보내 이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오신전은 도주하고 전수훈은 전사하는 등 완전히 패배했다.

결국 장징야오는 6월 11일, 창사를 버리고 악주로 도주했고 6월 12일 상군이 창사를 점령함으로 호남독군직에서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징야오의 부하들이 미국 선교사를 살해하여 미 해군 함정이 무력시위를 하는 등 상황은 최악으로 돌아갔다. 탄옌카이는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며 호남공화국론을 주장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자오헝티가 호남성 헌법을 제정,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연성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호북성으로 달아났던 장징야오는 6월 29일 돤치루이에 의해 해임되고 상하이로 떠나 한동안 그곳에서 지낸다.

2.4. 말년

1920년 안직전쟁이 터지면서 안휘군벌이 몰락하자 장징야오는 재빠르게 장쭤린봉천군벌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우페이푸차오쿤직예군벌이 승리하자 장징야오는 다시 직예군벌에 붙었으나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장쭤린과 결탁하여 북경정변을 일으키자 펑위샹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이후 장쭝창이 지휘하는 직로연군에 들어가 2군 군장을 지냈으며 1926년 장쭤린에 의해 2군단 부사령에 임명, 국민혁명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1928년 관동주로 도주했다.

1932년 만주국으로 망명한 장징야오는 1933년 평진 2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한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3년 열하사변이 개시된 이후 관동군 부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화북의 장제스 정부를 배제하기 위해 반장파 군벌에 대한 포섭공작을 펼쳤는데 이때 관동군과 결탁한 것이 우페이푸의 부하 백견무, 서북군벌 스여우싼 그리고 장징야오였다. 장징야오는 관동군으로부터 공작금 30만원을 제공받은 후 베이핑에 거주하면서 일본군을 위해 각종 공작활동을 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남의사에서 암살자를 보낸다. 결국 장징야오는 1933년 5월 8일에, 톈진 동교민항의 육국호텔[2]의 욕실에서 목욕을 하다가 남의사의 암살자에게 총을 맞아 암살된다.

3. 참고문헌


[1] 진지양의 군신정권은 1880년생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판초프의 마오쩌둥 평전은 1881년생으로 기술.[2] 현재의 베이징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