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구 문벌(朝鮮 國舅 門閥) 壯洞 金氏 (壯洞 金門) 장동 김씨 (장동 김문) | |
관향 | <colbgcolor=#fff,#191919>서울특별시 종로구 |
시조 | 김선평(金宣平) |
중흥조 | 김조순(金祖淳) |
분파 | 문정공파(文正公派) 문충공파(文忠公派) |
집성촌 | 서울특별시 종로구 |
[clearfix]
1. 개요
장동 김씨(壯洞 金氏)는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의 분가(分家)로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이다.[1]2. 역사
신 안동 김씨는 신라말 고창군 성주로서 고려 태조를 도와 전공을 세워 대광(大匡)에 오른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조선 후기인 1801년(순조 1) 김조순(金祖淳)이 순조의 국구가 되면서 세도가문의 길을 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부원군 3명, 왕비 3명, 후궁 1명, 부마도위 2명, 종묘공신 6명, 정승 15명, 판서 35명, 당상관 140여 명 등 많은 고관대작을 배출하며 명문가 반열에 올랐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한일합방에 앞장선 자들에게 천황의 칙령인《조선귀족령》에 의거해서 조선귀족 작위를 수여하였는데 장김의 후손들 중 상당수가 이에 해당하였다.[2]3. 분파
문정공파(文正公派), 문충공파(文忠公派)를 분파로 하고 있다.4. 후손
<rowcolor=#FFFFFF> 성명 | 출생 | 문벌 | 국가 직책 | |
김조순(金祖淳) | 1765년 | 문정공파 | 부원군 | |
김조근(金祖根) | 1793년 | 문정공파 | 부원군 | |
김문근(金汶根) | 1801년 | 문정공파 | 부원군 | |
순원왕후(純元王后) | 1789년 | 문정공파 | 순조의 왕후 | |
효현왕후(孝顯王后) | 1828년 | 문정공파 | 헌종의 왕후 | |
철인왕후(哲仁 王后) | 1837년 | 문정공파 | 철종의 왕후 | |
김수항(金壽恒) | 1629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창집(金昌集) | 1648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흥근(金興根) | 1796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좌근(金左根) | 1797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병학(金炳學) | 1821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병국(金炳國) | 1825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병시(金炳始) | 1832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석진(金奭鎭) | 1843년 | 문정공파 | 영의정 | |
김상헌(金尙憲) | 1570년 | 문정공파 | 좌의정 | |
김이소(金履素) | 1735년 | 문정공파 | 좌의정 | |
김홍근(金弘根) | 1788년 | 문정공파 | 좌의정 | |
김상용(金尙容) | 1561년 | 문충공파 | 우의정 | |
김달순(金達淳) | 1760년 | 문정공파 | 우의정 | |
김이교(金履喬) | 1764년 | 문충공파 | 우의정 | |
김병덕(金炳雲) | 1825년 | 문충공파 | 우의정 | |
김창협(金昌協) | 1651년 | 문정공파 | 고위관료 | |
김창흡(金昌翕) | 1653년 | 문정공파 | 고위관료 | |
김창즙(金昌楫) | 1662년 | 문정공파 | 고위관료 | |
김희순(金羲淳) | 1757년 | 문충공파 | 이조판서 | |
김응균(金應均) | 1801년 | 문충공파 | 예조판서 | |
김보근(金輔根) | 1803년 | 문충공파 | 병조판서 | |
김병필(金炳弼) | 1839년 | 문정공파 | 예조판서 | |
김명순(金明淳) | 1759년 | 문충공파 | 이조참판 | |
김온순(金蘊淳) | 1776년 | 문충공파 | 예조참판 | |
김매순(金邁淳) | 1812년 | 문충공파 | 예조참의 | |
김병운(金炳雲) | 1814년 | 문정공파 | 한성판윤 | |
김병기(金炳基) | 1814년 | 문충공파 | 형조참의 | |
김창업(金昌業) | 1658년 | 문정공파 | 고위관료 | |
영빈 김씨(寧嬪 金氏) | 1669년 | 문정공파 | 숙종의 후궁 | |
23세(根) | ||||
김수근(金洙根) | 1798년 | 문정공파 | 배향공신 | |
김성근(金聲根) | 1835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
24세(炳) | ||||
김병익(金炳翊) | 1837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
김병원(金炳鵷) | 1880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25세(均/圭) | ||||
김옥균(金玉均) | 1851년 | 문충공파 | 급진개화파 | |
김병규(金炳奎) | 1874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서규(金瑞圭) | 1875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호규(金虎圭) | 1911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
26세(鎭) | ||||
김학진(金鶴鎭) | 1838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
김석진(金鶴鎭) | 1843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가진(金嘉鎭) | 1846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독립운동가 | |
김영진(金英鎭) | 1876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경진(金慶鎭) | 1895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성진(金晟鎭) | 1905년 | 문충공파 | 보건사회부장관 | |
김성진(金聖鎭) | 1931년 | 문정공파 | 문화공보부장관 | |
김좌진(金佐鎭) | 1889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동진(金東鎭) | 1891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종진(金宗鎭) | 1901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익진(金翼鎭) | 1896년 | 문충공파 | 검찰총장 | |
김덕진(金德鎭) | 1954년 | 문정공파 | 고위관료 | |
27세(漢) | ||||
김종한(金宗漢) | 1844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
김덕한(金宗漢) | 1874년 | 문정공파 | 조선귀족 | |
김영한(金榮漢) | 1857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창한(金榮漢) | 1870년 | 문충공파 | 중추원참의 | |
김복한(金復漢) | 1860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의한(金毅漢) | 1900년 | 문충공파 | 독립유공자 | |
김증한(金曾漢) | 1920년 | 문충공파 | 문교부차관 | |
김두한(金斗漢) | 1918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
김흥한(金興漢) | 1924년 | 문충공파 | 고위법관 | |
김혜경(金惠京) | 1966년 | 문정공파 | 이재명 당대표의 부인 | |
28세(東) | ||||
김명동(金明東) | 1903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
김을동(金乙東) | 1945년 | 문충공파 | 국회의원 | |
29세(顯) | ||||
김세현(金始顯) | 1895년 | 문충공파 | 조선귀족 |
5. 항렬
<rowcolor=white> 세수 | 항렬자 |
22世 | 순(淳) |
23世 | 근(根) |
24世 | 병(炳) |
25世 | 규(圭)/균(均) |
26世 | 진(鎭) |
27世 | 한(漢) |
28世 | 동(東) |
29世 | 현(顯) |
30世 | 년(年)/기(基) |
31世 | 일(鎰)/종(鍾) |
32世 | 구(求) |
33世 | 모(模) |
34世 | 연(然) |
35世 | 배(培) |
36世 | 선(銑) |
37世 | 원(源) |
38世 | 영(榮) |
39世 | 사(思) |
40世 | 준(浚) |
41世 | 선(善) |
42世 | 택(澤) |
43世 | 식(植) |
44世 | 환(煥) |
45世 | 철(喆) |
6. 참고문헌
7. 참고기사
[1] 김번(金璠, 1479~1544)의 후손들이 한양 인왕산 근처 장동(壯洞)에 세거하였기에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동 김문(壯洞 金門)이라고도 칭한다.[2] 자작 2명(김성근; 김호규), 남작 6명(김가진, 김병익, 김종한, 김학진; 김덕한, 김세현). 이 중 김가진은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작하였으나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동단 총재, 임시정부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여 남작 작위가 수작 불능 처리되었다. 한편 김석진은 1910년 남작 작위가 수여되자 이를 거절하고 며칠 후 자결하였고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