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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6 19:41:07

오다 사쿠노스케

오다사쿠에서 넘어옴
織田作之助
1913년 10월 26일 ~ 1947년 1월 10일(향년 33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Sakunosuke_Oda.jpg

1. 개요
1.1. 매체에서

1. 개요

일본의 소설가. 현재의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노지구 출신.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무뢰파(無賴派)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오다사쿠(織田作)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1913년 오사카 덴노지 근처 뒷골목 튀김집의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1931년 제3고등학교(현 교토대학)에 입학하녀 5년간 재학했으나 졸업시험 도중 객혈하여 졸업하지 못한 채 중퇴하고, 1934년 오사카를 떠나 전지요양에 나선다.

처음에는 극작가를 희망하여 희곡을 발표했지만,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의 영향을 받아 소설가로 전향했다. 1938년 단편 「비」를 발표하며 데뷔한 이후 오사카로 돌아와 기자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꾸준히 소설 집필을 이어간다. 1939년 발표한 「속취」가 최고권위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지명되고, 이어 7월 발표한 장편「부부단팥죽」이 제1회 가이조샤 문예추천작에 당선되며 소설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오사카를 배경으로 아옹다옹하며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소설로,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그는 왁자한 오사카 풍경과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고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권선징악」 등 역작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장편 『청춘의 역설』이 반군국주의 작품으로 발매금지 처분을 당했다. 1946년에 패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상을 묘사한 단편을 발표했으며,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 등과 함께 사회통념, 기성 사상 일체에 반발하며 고유의 직관을 추구하는 '무뢰파' 작가로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 또 사소설의 전통에 결별을 선언한 평론 「가능성의 문학」을 집필했다. 그 실험적 작품이라 여겨지는 장편 『토요부인』을 요미우리신문에 8월부터 연재했다.

그러나 1946년 12월 결핵으로 인한 대량 각혈을 일으켜 도쿄병원(現 '도쿄지케이카이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용태가 점점 악화되어 이듬해 1월 10일 만 33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한편 「수필 오사카」, 「오사카의 얼굴」, 「오사카의 발견」 등 오사카의 감수성을 유쾌하고도 시니컬한 필체로 써내려간 산문을 다수 남겼다. 모든 사상이나 체계에 대한 불신, 옛 전통에 대한 반역을 목표로 삼았으며 고유의 감각과 직관에 바탕을 둔 스탕달풍의 템포가 빠른 작풍을 보여줬다.

빠르고 경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와 희극을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돋보이는 오다사쿠의 작품은 7년밖에 안 되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오다 사쿠노스케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깔끔하고 담담한 문체로 7년간의 짧은 작가생활 동안 많은 산문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메오토젠자이(夫婦善哉)』[1]외에도「천의무봉(天衣無縫)」 등이 있다.

2007년, 전쟁통의 혼란 속에 발표하지 못한 유고 단편 「부부단팥죽 속편」 원고가 사후 60년 만에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받기도 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소설로는 부부단팥죽, 방랑, 권선징악, 애드벌룬(이상 <부부단팥죽>), 부부단팥죽 속편, 나무의 도시, 육백금성(六白金星), 세태, 경마, 향수(鄕愁)(이상 <부부단팥죽 결정판>), 비, 속취(이상 <일본 무뢰파 단편소설선> 수록), 눈 내리는 밤(<일본, 문학으로 만나다>), 만우절(<일본의 문학상이 된 작가들>)이 있고,[2] 에세이 중에는 가을 달무리(<작가의 계절>), 오사카의 우울, 가을에 오는 것(<슬픈 인간> 수록)이 소개되었다.

여담으로 1946년 12월 어느 날, 긴자의 단골 바 '루팡'[3]에서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긴자의 바에서 유명 사진작가 하야시 다다히코[4]에게 촬영을 맡겨 셋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9일 후 지병인 결핵으로 대량의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한 달이 못 가 사망했다. 이때 찍은 사진은 꽤 유명한 사진이 된다. 하야시의 전기에 따르면 오다의 사진을 먼저 찍었는데, 찍던 중에 술 취한 다자이가 '오다사쿠만 찍지 말고 나도 좀 찍어줘!'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그가 누구인지 몰랐던 하야시가 사카구치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아직도 저 친구를 모르느냐? 요사이 뜨고 있던 작가 다자이 오사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에 하야시는 다자이의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마침 오다의 사진을 다 찍고 난 후라 카메라에 남은 필름이 한 컷밖에 없었는데, 마지막 남은 플래시 벌브(전구)를 사용하고 실내가 좁기에 화장실을 열고 그곳에 들어가 변기 위에 엎드려 찍었다고 한다.# ##

1.1. 매체에서




[1] '부부 단팥죽'이라는 뜻이다. '夫婦; 메오토'는 '부부'를 뜻하고 '善哉; 젠자이'는 간사이 지방(작가가 오사카 출신) 등에서 '단팥죽'을 뜻한다.[2] 여러 선집에서 중복되는 작품은 제외했다.[3] 주인이 괴도 루팡에 경도되어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4] 이 에피소드에 언급되는 인물들 외에도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시가 나오야 문호 사진 시리즈를 촬영했다. 가장 유명한 사진은 역시 다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