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일 언하트
, NASCAR
요약 영상 |
1. 발단
2001년 2월 18일 데이토나 인터내셔널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데이토나 500에서, 데일 언하트는 마이클 월트립과 데일 언하트 주니어[1]가 1/2위를 지키도록 3위 자리에서 스털링 마를린의 추월 시도를 막고 있었다. 상위권 순위는 그 상태로 유지되어 있었고, 마지막 랩의 4번째 코너에서 마를린의 40번 닷지에게 후미를 받히게 된다.차가 살짝 위로 꺽이자 언하트는 차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슈레이더의 차량에게 그대로 우측면을 들이받혔고, 250km/h가 넘는 속도로 벽을 들이받고 만다.[2] 이후 추가 충돌 없이 슈레이더의 차량이 언하트의 차량을 미는 형태로 유유히 피트로드와 트랙 사이의 풀밭으로 빠져나갔다.
슈레이더는 다행히 경미한 부상만 입고 차를 빠져나왔고, 언하트의 상태를 보러 다가간 순간 언하트가 죽었음을 직감했다[3]. 일반적으로 피트까지 자력으로 주행하지 못할 수준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당시의 나스카 규정상 보고 후 주변 병원으로 이송되지만, 언하트는 사고 직후 바로 구급차를 타고 핼리팩스 메디컬 센터로 이송되었다. 그의 소생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5시 16분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순위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2. 원인
상황으로써는 언하트는 아들 주니어와 같은 팀 선수의 순위를 지켜주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범프로 언하트는 오른쪽으로 차가 살짝 꺾였지만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차가 살짝 위로 꺽이자 언하트는 차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슈레이더에게 후미를 받힌다. 사실 처음에는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흘리면 슈레이더의 차가 언하트의 차량 오른쪽 후미를 치고, 이때 각도가 크게 틀어지면서 벽을 보게 되어 벽에 충돌한 것이다. 즉, 안전장치 문제이긴 하지만 위치상으로는 슈레이더가 없었으면 언하트는 살아있을 수 있었다.사실 이는 범프를 한 운전자의 문제도 있지만 기본적인 안전장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HANS(머리 고정장치)가 의무화가 아니였기 때문에 세게 충돌하면서 머리가 앞으로 쏠렸다. 설상가상으로 언하트의 헬멧은 전면부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4] 150~60마일의 엄청난 속도로 벽에 충돌하는 순간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며 두개골 골절로 사망한것인데, 사실 벽 자체가 충격흡수가 적용이 안되있어서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안전장치에 관한것은 NASCAR/레이스 카 문서를 참조.
3. 여파 밎 변화
이 사건으로 스톡카 레이싱의 안전 규정이 다시 한번 강화되었다. 팀들은 5점식 벨트를 6점식 안전벨트로 바꿔 달았으며, HANS의 도입에 관한 규정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으나 드라이버 43명 중 41명이 펩시 400 레이스에서 HANS를 달고 참전하였다. 그리고 헬멧 관련 규정도 얼굴을 완전히 뒤덮는 헬멧을 필수 착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Car Of Tomorrow'라는 이름의 새로운 섀시가 개발되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되었다. 자세한 변화는 NASCAR/레이스 카 문서를 참조.한편으로 데일 언하트와 직접 충돌한 스털링 마를린은 '언하트가 당신 때문에 죽었다.'라 주장하는 언하트의 극성 팬들에게서 혐오 메일이나 살해 협박을 지속적으로 받았고, 결국 데일 언하트의 아들 데일 언하트 주니어가 더 이상 마를린에게 책임을 묻지 말아 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물론 마를린도 2월 20일에 자신은 절대 고의적으로 그를 충돌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거기에 더해 언하트의 차에 들어가는 안전벨트를 납품한 심슨 퍼포먼스 프로덕츠의 빌 심슨도 데일 언하트의 팬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야 했다.
언하트는 나스카에서 모든 커리어를 다 쌓아올린 전설적인 드라이버였지만 유독 데이토나 500에서는 고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1990년 데이토나 500에서 200랩 중 155랩을 리드하고 파이널 랩에서 플랫 타이어로 인해 우승에 실패한 것이 대표적이다. 언하트는 끝끝내 1998년 데이토나 500에서 우승을 차지해 한을 풀었고 성대한 축하를 받았으나 그의 끝 또한 데이토나 500이 되었다.
2001 데이토나 500은 폭스 스포츠에서 중계한 사상 첫 공식 경기로, 나스카 팬들에게 익숙했던 간판 중계진 마이크 조이, 대럴 월트립, 래리 맥레이놀즈가 합을 맞춘 첫 경기다. 대럴 월트립은 200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드라이버 출신인데 컵 챔피언만 세 번, 데이토나 500마일 우승 1회 포함 84승을 거머쥔 전설적인 드라이버이자, 언하트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다. 월트립은 은퇴 후 출범한 폭스 스포츠 온 나스카에 해설위원으로 데뷔해 2019년까지 나스카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일 경기 우승자인 마이클 월트립은 성씨만 봐도 알 수 있듯 대럴의 동생인데, 1986년에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내 이때까지 개근했지만 이 경기 전까지 우승한 경기는 하나도 없었고 잊을만 하면 대형 사고를 내는, 형의 실력을 못 따라가는 드라이버였다. 그러던 그가 2001년 시즌부터 데일 언하트, Inc.로 팀을 옮겨 시즌을 보내게 됐는데, DEI 소속으로 출전한 첫 경기에서 마침내 첫 우승을 가장 상징적인 데이토나 500에서 거둔 것이다. 팀의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데일 언하트가 소유한 팀이었으며[5], 이날 경기에서 2위를 차지한 그의 아들 또한 DEI 소속이었다.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언하트의 팀에 들어와 자신의 형이 중계 부스에서 지켜보는 첫 경기에서 우승하게 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으나, 언하트의 사고로 인해 비극적인 순간이 되었다.
마이클 월트립은 경기 후 빅토리 레인에서 축하를 하던 중 언하트의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후에 그가 말하길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최악의 순간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많은 사연이 얽힌 감격스런 첫 우승에도 소식을 듣자마자 착잡해져 더이상 축하를 받을 만한 상황이 아니게 되었고, 결국 마이클은 2년 뒤 2003년 데이토나 500에서 우승해 한을 달래야 했다.
팬들은 처음에는 언하트의 사고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일단 어디까지로나 겉으로는 얌전한 사고 같아 보였고, 결정적으로 1996년 탈라데가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에서 걸어나오는 등[6] 숱한 사고에도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이스 관계자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심각한 사고였으며, 특히 자신의 동생이 마침내 첫 우승을 거머쥐어 눈시울을 붉힌 대럴 월트립이 언하트의 걱정을 그 순간에도 입 밖으로 냈을 정도였다.
[1]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데일 언하트의 아들이다. 참고로 데일 언하트는 세번의 재혼을 했는데 데일 언하트 주니어는 그가 두번째로 재혼을 한 이후 얻은 아들이다. 그리고 후술하는 제프리 언하트가 바로 데일 언하트가 처음 결혼했을 때 태어난 아들.[2] 이 충격으로 조수석 뒷바퀴가 차체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본넷 고정장치가 파손되어 전면 윈드실드에 본넷이 수차례 부딪혔다.[3] 위의 동영상에서도 나온 바와 같이, 레이스를 마친 아들 데일 주니어도 아버지의 사고소식을 듣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4] 이때는 규정 위반이 아니였다.[5] 정작 본인은 리처드 차일드레스 레이싱 소속이었다.[6] 사실 걸어나올 몸 상태는 전혀 아니었다. 단지 실려 나오면 팬들이 걱정할까봐 무리해서 걸어나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