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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5:11:19

야규 무네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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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제자4. 유파5. 일화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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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柳生宗矩, ruby=やぎゅう むねのり)]

1571년 ~ 1646년 5월 11일.

일본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 검술가. 야규 무네요시의 5남으로 무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워 석고 1만 2500석의 야규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비록 영지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검호로서 유일하게 다이묘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다.[1] 에도 막부를 연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검술 지도역으로서 쇼군 가문의 어유파 야규신카게류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생전에 종5위의 타지마노카미을 역임했으며, 사후 종4위로 추증됐다.

검호로서도 무장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다이묘로서도 모두 유명하며, 내정면으로도 몇 번 부교 역을 맡아 성공하였고, 검술과 지모 양쪽에 모두 통달했기에 에도 시대 문무양도를 겸비한 무장으로 항상 야규 무네노리를 최고로 뽑았으며, 영지에 욕심이 없었으며 막부에는 충성하여 에도 시대 가신의 모범으로서도 상찬받았다. 카츠 카이슈도 야규 무네노리를 신하의 모범으로 극찬하였다. 심지어 오륜서와 함께 일본사 100대 명저 중 하나로 뽑히는 <병법가전서>를 저술하여 "활인검" 등의 개념을 주창, 이론적으로 검술(劍術)을 검도(劍道)로서 승화시켰고 이 공로로서 현대 전일본검도연맹에 특별히 현창되었다. 당대에는 천하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에도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현재에도 일본 내에 가장 많은 회원이 가입한 야규 신카게류를 부흥시켰으며, 실력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심지어 문학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일본 최고의 검술가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네노리의 자식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야규 미츠요시인데 이 사람이 바로 8천석을 받은 하타모토인 '애꾸눈 야규 쥬베이'다. 이 인물에 대해서도 수많은 일화가 있는데, 정작 야규 무네노리는 야규 쥬베이의 성격 등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많이 고민했던 일화들이 다수 남아있다.

2. 생애

1571년 야마토국 야규쇼에서 야규 무네요시의 5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큰형 요시카츠,[2] 넷째 형 무네아키와 함께 아버지 밑에서 검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 상으로는 이 당시 무네노리의 행적이 특별히 알려진 바 없다.

무네노리의 아버지 무네요시는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신카게류의 영향을 받아 야규신카게류를 창시하였다.[3] 그리고 2000석 규모의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서 야마토국의 권력자였던 미요시 나가요시, 마쓰나가 히사히데, 츠츠이 준케이 등에게 몸을 숙이기도 하고 다른 호족들과 연합하여 대립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츠츠이 준케이를 따르게 됐다. 그러다가 노부나가가 죽고 천하를 차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한 이른바 '태합 검지' 때 전답을 숨겨 규모를 축소했다는 혐의로 영지를 몰수당하여 낭인이 됐다.[4]

졸지에 낭인이 된 무네요시는 일가를 이끌고 교토에 정착하여 은거에 들어갔다. 그런데 무네요시와 무네노리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겼던 다이묘 구로다 나가마사가 159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소개시켜줬다.[5] 무네요시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오의 무토도리(無刀取り)[6]를 선보였고 이에 감탄한 이에야스가 자신의 검술지도역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당시 무네요시가 66살의 고령이었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고 대신 함께 방문한 무네노리를 추천했다. 이로써 무네노리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200석의 하타모토, 즉 이에야스의 직속 가신이 됐다.[7] 그리고 폐적당한 큰형 요시카츠를 대신해서 가장 결격사유가 없었던 무네노리가 가독을 이어받았다.

이 야규 가문의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남 요시카츠는 1572년에 츠츠이 준케이를 따라서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싸우다가 총탄을 맞고 젊은 나이로 불구가 됐고,[8] 요시카츠의 장남인 야규 구사부로 스미요시는 김술에 재능이 있었고 20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아사노 요시나가에 임관하여 500석의 봉록을 받으나,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1597년에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시 말해서 장자 상속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밑으로 내려가면 둘째와 셋째는 재능이 없다고 무네요시가 일찌감치 절로 보냈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넷째 무네아키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어 대를 이을 만했으나 이에야스가 동생 무네노리와 함께 초빙했을 때 이를 거절하고 무사 수행에 나섰다.[9] 정리하면 첫째는 불구, 둘째와 셋째는 속세를 떠난 승려, 넷째는 자리 욕심이 없었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던 조카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요절했다.

상황이 이러니 최종적으로 요시카츠가 남은 자식들을 무네노리에게 부탁하고서 장자 자리를 양보하게 된 것이다.[10] 여담으로 요시카츠는 이후 동생인 무네노리와 아들인 토시요시가 대립했을 때 어떤 의견도 개진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 정도로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외부 기록은 물론이고 야규 가문의 기록에서도 행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1][12] 아무튼 그렇게 당주가 된 무네노리는 도쿠가와 가문의 하타모토로서 봉사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주군의 명령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 친분이 있는 호족들을 외교로 포섭하여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활약을 펼쳐 아버지가 빼앗겼던 야규 영지 2000석을 포상으로 받았고 다음 해에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지도역이 되면서 1000석이 가증되어 3000석이 됐다.

1603년에 훗날 오와리 야규류를 개창하는 조카 토시요시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으로 독립하였다.[13] 그로부터 3년 후, 아버지 야규 무네요시가 사망했다.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타다를 수행했으며 모리 카츠나가, 사나다 노부시게의 결사 돌격으로 진중에 난입한 7명의 무사들을 베어 주군을 지켰다.[14] 참고로 무네노리 자신이 직접 검을 들고 적을 벤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이것이 유일하다.

1616년, 4만 3468석의 다이묘이자, 무네노리의 친구였던 사카자키 나오모리(坂崎直盛)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내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와 관련된 사건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15] 구전된 이야기에 따르면 사정은 다음과 같다. 오사카 성이 함락됐을 때 이에야스가 손녀의 목숨을 걱정하여 "누가 센히메를 구해올 것인가!"라고 말하자 나오모리가 자신이 센히메를 구해온다면 결혼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야스가 이를 승낙하여 목숨을 걸고 센히메를 구출해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얼굴에 화상을 입어 추한 용모가 됐고 이에 센히메가 나오모리와 결혼하는 것을 거부하고 미남으로 유명했던 도쿠가와 사천왕 혼다 타다카츠의 손자인 혼다 타다토키와 재혼했다. 이에 격분한 나오모리가 타다토키의 영지로 향하는 센히메가 탄 가마를 납치하려다가 부하의 밀고로 들켜 처벌당하게 생기자 봉기했다는 것이다.

드라마로 영상화되면서 유명해진 일화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실제로는 오사카 성이 함락됐을 때 도쿠가와 측의 외교적 노력으로 성이 함락당하기 전 이미 히데요리가 센히메를 이에야스에게 인도했다. 이후 과부가 된 센히메를 이에야스가 공가와 결혼시키라고 유언을 내려 쇼군이자 센히메의 아버지인 히데타다가 나오모리에게 명령을 내려 결혼시킬 공가를 알아보게 했다. 이때 거의 결혼 성사직전까지 갔던 걸로 보이나 센히메가 이를 거절하고 결국 미남으로 유명했던 타다토키와 재혼했다. 나오모리는 자신의 명예에 손상이 갔다며 격분. 센히메가 탄 가마를 탈취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전에 들켰고, 반역혐의를 쓴 나오모리는 자신의 에도 저택을 걸어 잠그고 막부측에 항거하게 된 것이다.[16]

도쿠가와 막부가 막 출범하여 아직 쇼군과 다이묘 사이의 상하관계가 완전히 성립되기 이전에 쇼군이 거하는 에도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자 히데타다와 가신들은 어떻게든 일을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하고자 했고, 이에 부하들을 배신시킨다 등등 몇몇 계략이 나왔으나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나오모리의 친구였던 무네노리를 시켜 "사카자키 나오모리가 책임을 지고 할복하면 사카자키 가문과 영지는 그대로 자식에게 이어질 것이다."라고 설득하는 책략을 입안하였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무네노리가 직접 나오모리를 찾아 설득하였고 나오모리가 이 말을 믿고 할복했다. 그런데 막부는 약속을 어기고 사카자키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는 개역 처분을 내렸다. 막부가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무네노리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무네노리는 이 사건에 대한 공로 후시미의 저택과 사카자키 가의 무구들을 포상으로 받았다. 한편 무네노리는 나오모리의 장남과 가신 중 두 사람을 등용하여 각각 200석 씩을 주어 사카자키 가문을 이어가게 했다.[17]

1621년, 훗날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검술 사범이 되어 이에미츠에게 신카게류를 전수했다.

1629년, 쇼군이 된 이에미츠로부터 종5위하 타지마노카미를 제수받았다. 이에미츠는 무네노리를 문무 양면에서 매우 신임하였으며, 대부분의 중대사를 무네노리에게 물어서 처리했다고 한다. 무네노리가 시마바라의 난 등 대소사를 정확히 예측했다는 기록이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 기록인 덕천실기에 남아있다.

1632년, 3000석이 가증되고 막부의 감찰 역을 맡았으며, 1636년에는 다시 4000석이 가증되어 1만석의 다이묘가 됐다. 만년에 500석을 다시 가증받고 차남이 2000석을 받았다가 사망하면서 최종적으로 12500석의 다이묘가 됐다. 이때 무네노리의 검술은 고령임에도 실력이 그다지 쇠퇴하지 않았으며 단순한 기술보다는 하나의 도(道)에 달해 있었다.

1646년,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5세. 죽기 전 이에미츠가 병문안을 왔을 때, 무네노리는 자신의 영지와 가산을 모두 반환하였고, 이에 이에미츠가 무네노리의 장남인 야규 쥬베에에게 8천 300석, 삼남에게는 4천석, 막내에게는 200석을 배분했다.[18] 이에미츠는 무네노리의 죽음에 크게 비통하였으며, 이후에도 "무네노리가 살아있었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할지 물어봤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는 말들이 덕천실기에 남아있다. 사후 이에미츠의 영에 따라 종 4위로 추증됐다. 1만석의 소 다이묘로서 종4위에 봉해지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3. 제자

제자들의 사는 지역들을 죽 늘어놓으면 에도의 쇼군가가 일단 중심에 있고, 위로는 동북의 츠가루와 다테 가문이 다스리는 센다이 번부터, 서남쪽의 호소카와 가문의 구마모토 번, 나베시마의 사가, 사츠마까지 일본 전체 지도가 완성된다. 심지어 와타나베 코안이나 아라키 마다우에몽 등 야규 무네노리의 제자를 자칭했던 인물들도 있을 정도.

제자의 숫자가 너무 숫자가 많기 때문에 대 다이묘 이상 급의 제자만 서술하면 우선 쇼군이던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있고 그 밑으로 호소카와 타다모토와 호소카와 미츠나오,[19] 나베시마 번의 당주였던 나베시마 카츠시게와 모토시게가 있다.[20] 그외에도 타카하시 나오츠구, 시마즈 번의 시마즈 타다츠네의 아들이자 시마즈 가문의 당주였던 시마즈 미츠히사(島津光久), 홋타 가의 당주인 홋타 마사모리, 쿠츠키 타네츠나 등이 있으면 여기에 다이묘에는 미치지 못해도 이름있는 무사들까지들 더하면 배로 늘어나 그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당대의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제자들의 명단을 자랑한다.

4. 유파

야규 무네요시가 창시한 야규신음류는 야규 무네노리에 의해서 천하의 야규류로 불리는 등 크게 융성하게 된다. 그러나 무네노리와 조카 야규 토시요시가 절연할 정도로 사이가 크게 나빠지는 일이 일어난다. 일단 현재의 야규류에서는 야규 무네노리가 야규 토시요시의 재능을 질투하여 무네노리가 토시요시를 내쳤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근거가 없다.

야규 가의 기록인 옥영습유(玉栄拾遺)나 야규번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은 다름아닌 결혼 문제 때문이다. 무네노리의 형 요시카츠, 즉 토시요시의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자녀 3남 3녀의 미래를 동생이면서 야규 가문의 당주인 무네노리에게 부탁했다. 무네노리는 형의 부탁에 응해서 토시요시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었으며, 요시카츠의 딸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질녀들 시집까지 책임졌다. 그런데 무네노리가 이가의 야마자키 가문에 시집갔다가 파혼당하고 돌아온 질녀를 토시요시에게 묻지도 않고 자신의 가신 사노 슈메(佐野主馬)와 재혼시키면서 갈등이 생겼다.

요시카츠 가문의 후계자이자 오빠인 토시요시에게 알리지도 않고 여동생을 멋대로 시집보내려던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노 슈메가 야규 번 기록에 의하면 타국에서 온 자로 본래 성씨는 알 수 없는(然る所、主馬は他国人で氏も知られていない)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기록 옥영습유은 슈메가 조선에서 온 자였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伝に曰く、主馬者朝鮮国の種也)출처[21][22][23] 당시 토시요시는 오와리 번에서 검술 사범을 지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무네노리와 절연하고 따로 오와리 야규류를 세웠다. 아규류가 무네노리가 이끄는 에도 야규류와 토시요시가 이끄는 오와리 야규류로 나뉜 것은 바로 이런 뒷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파가 갈라진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과연 누가 정파(正派)로 인정받았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만 2500석의 다이묘이자 쇼군의 스승이었던 무네노리를 계승한 에도 어유파와 집안 계승 구도에서 쫓겨난 일개 다이묘의 가신, 봉록 500석의 토시요시를 계승한 오와리 어유파 중에서 당연히 12500석 쪽이 정파가 되겠지만. 문제는 현대에서 벌어졌다. 에도 야규류는 무네노리가 사망한 이후, 장남인 쥬베에와 3남인 무네후유의 자식들로 이어졌지만 실력이 점점 쇠퇴하다가 16대 당주 무네히사를 끝으로 대가 끊겼다. 반면 오와리 야규류는 사범의 지위에서 잘리는 등 위기가 있었지만 메이지 시대까지 대가 끊기지 않고 19대 당주 겐슈(厳周), 20대 당주, 21대 당주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아예 도쿄로 본거지를 옮겨 황궁경찰이나 장교들, 궁내성에도 오와리 야규류를 전파하였고 일제 멸망 이후에는 아예 도쿄에서 동경야규회(東京柳生会)를 발족, 활동을 시작하여 현대의 야규 신카게류를 잇고, 활발하게 야규 신카게류를 전파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도 야규 신카게류 가입자가 있을 정도. 어쨌든 요약하자면, 현대에는 에도의 야규류는 이미 멸망했고, 오와리 야규류만이 남아서 융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에도 시대 문무양도, 신하의 모범으로 상찬받았던 야규 무네노리는 흉계로 조카인 토시요시를 쫓아낸 야비한 인간이고 인가장도 못 받았는데 정치꾼이라서 에도 야규류를 세웠다는 왜곡이 생겼다.

반면에 야규 토시요시는 야규 무네요시가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인가장에 일국일인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으며, 무네요시가 자신의 영지인 500석을 토시요시에게 따로 수여해줬으니, 야규류의 후계자는 무네요시가 직접 임명한 토시요시이며 오와리 야규류가 야규류의 정파(正派)라는 주장이 현대 야규류의 입장이 됐다. 실제로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공식 기록인 덕천실기나 에도 시대 편찬된 격검총담, 혼쵸부게이쇼덴 등에서 야규 무네노리를 정파로 놓고 있다. 또한 무네요시가 요시카츠를 폐적하고 무네노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기록이 버젓이 남아있으며 토시요시 측의 주장인 야규 토시요시가 따로 무네요시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무네노리는 인가장을 안 받았다[24]는 등의 주장은 기록상으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객관적인 근거로 무네노리가 진정한 후계자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어쨌든 당사자인 야규 가문이 "우리가 사료를 검토하니 무네노리가 나쁜놈 맞는 것 같다, 후손이 조상님 없는 잘못을 만들어내겠냐?"라는 논리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무네노리의 잘못이 있다고 하면 자손을 잘못 둔 게 무네노리의 죄라고나 할까.

5. 일화

흔히 가장 출세한 검호라는 평가되지만, 영지 규모로만 비교하면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었던 츄조류의 토다 시게마사가 1만 3240석으로 좀 더 많았다. 물론 권력의 크기야 쇼군의 총애를 받고 정식으로 관직까지 제수받았던 무네노리와는 비교가 안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검호라는 명성과 입신 양명이 목표이던 당대의 모든 검호들에게 질시를 받았던 입지 탓에 각 유파마다 "사실 우리 유파의 개조가 당대 천하제일 무네노리를 이겼다! 그러니까 우리 유파가 최고다!"라는 역사적 근거라곤 전무한 전승이 내려온다.

예를 들어 미야모토 무사시가 죽고 100년도 넘게 지나서 출간된 그의 전기 이천기에서는 무사시가 무네노리의 훼방 탓에 쇼군가의 사범이 되지 못했다고 쓰여져 있으나, 실제로 무사시는 에도 자체를 방문하지 않았고 클래스 차이가 낭인과 다이묘로 현저했기 때문에 쇼군 가와 면식 자체가 없었다. 이천기 이외의 다른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니텐기의 원 사료인 무공전에서조차 존재하지 않는 일화. 뭐 니텐기 자체가 다 이런 식이지만... 이외에도 츄조류의 토다 시게마사와의 승부를 무네노리가 회피했다던가, 시현류의 토고 시게타다의 제자가 무네노리의 제자를 상대로 이겼다던가, 혹은 무네노리가 보고서 님 검술을 보니까 자기 실력이 부족하다며 승부도 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했다던가 등등...

같은 막부의 검술사범이었던 오노파 일도류의 오노 타다아키와의 일화들도 많은데, 오노 타다아키가 야규 무네노리 도장에 쳐들어가 수제자들을 박살내고, 무네노리는 이에 자식인 야규 쥬베에에게 상대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쥬베에가 상대가 안된다며 버로우했다는 일화[25]가 있다. 그리고 무네노리가 자기 자식 교육을 걱정하자 이에 오노 타다아키가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는 게 최고라며 죄인들을 벨 것을 조언하자 무네노리가 앞에서 적당히 그거 좋다고 맞장구쳤지만 막상 실행은 안했다는 일화도 있다.[26] 타다아키와의 일화는 두 사람 모두 도쿠가와 가문에서 함께 벼슬을 살았고 실제로 자주 만났던 만큼 무네노리를 전투력 측정기로 정도로 소비하는 일화보다는 실화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역시 다른 기록들은 전무하기에 오노파 일도류 쪽에서의 미화가 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외에 무네노리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을 살피면 엄청나게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검호(劍豪)치고는 놀랍게도 매우 선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당대의 검호들 중 진검 승부를 했다던가, 혹은 검술을 사사로이 이용한 기록이 전무한 몇 안되는 검호이다. 실제 무네노리가 저술한 병법가전서에는 검 두 개가 맞부딪치는 건 작은 병법으로서 이기든 지든 득실(得實)이 적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활인검 개념을 정리[27]하여 "사람을 베는 건 나쁜 일이지만 한 사람의 악을 베어 만인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선이다.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살인검이 필요하고 그 이후에 살인검이 활인검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사람을 베는 일 역시 좋아하지 않았던지 타다아키의 말을 듣고도 자식들에게 죄인을 베도록 시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타다아키의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사람을 베는 게 제일이라는 조언을 듣고 "츠치기리"를 하려던 도쿠가와 이에미츠를 목숨걸고 막았다던가, 나오모리의 적자를 등용하여 가문을 잇게 만들고, 사망한 친구의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던가 등등의 품성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승려인 타쿠앙 소호와의 우정도 유명하며, 타쿠앙에게 불교, 유교적인 가르침을 많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병법가전서 역시 신토와 불교, 유교의 가르침이 혼합되어 있는 내용.

엄청난 골초라서 타쿠앙이 심지어, 담배를 피면 연기때문에 가슴의 병에 걸린다고 조언을 한 서찰이 남아있다. 이에 무네노리는 곰방대의 길이를 늘린 후에 "이러면 연기가 몸에 안닿을 테니 괜찮다!"라고 주장하며 길이를 늘린 담배를 계속 폈다고 한다.

자식들의 교육에도 열성적이었는데 저 놈의 자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타쿠앙에게 보낸 서찰이 현재도 남아 있다. 위의 타다아키의 일화 중 하나도 자식들의 검술 지도에 관한 일화. 특히 야규 쥬베에의 성격이 건방지고 침착하지 못했던 편이라 이를 좀 마음에 안들어 했다고 한다. 뭐 사실 야규 쥬베에도 전설적인 검호이긴 하나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한 일이 전무하고, 그저 수많은 전설들만 남긴 채로 44살의 나이로 요절한 걸 생각하면 무네노리의 혜안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추가로 야규 쥬베에에 관하여는 무네노리가 짱돌을 던져서 쥬베에가 맞고 애꾸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쥬베에도 창작물 등에서 외눈의 검사로 등장하나 실제로 척안(隻眼)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6. 대중매체에서

현대 무네노리에 관하여 현대의 야규류 등에서 주장하는 왜곡된 인상들 + 정보 감찰 역을 했으니 닌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망상 덕분에 대체적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국정원장 같은 포지션으로 많이 나오며, 악역이나 모사꾼 정도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실제로 병법 가전서에서 그가 했던 고찰이나 역사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

악당 무네노리라는 현대의 이미지와 과거의 문무양도, 가신의 모범 등의 과거의 이미지를 가장 잘 버무린 현대의 작품이 KOEI사의 게임인 전국무쌍 시리즈. 전국무쌍에서 무네노리는 현대에 묘사되는 것처럼 음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인을 구하기 위해서 악당을 쓰러트리려고 하는 활인검의 신념을 관철한다.

6.1. 드라마

시대극에서는 풀네임보다 그의 관직인 타지마노카미(但馬守), 줄여서 타지마라 부른다. 자기 자식이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가족에 대한 정이 거의 없으며 막부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냉혹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인다. 모든 작품에서 아들인 쥬베와 사이가 매우 안 좋은 것으로 묘사되며 주로 막부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쥬베를 이용하는 등[28] 흑막이자 만악의 근원으로서 사사건건 대립하는 것이 특징.

특히 무라카미 히로아키 판 드라마인 야규 쥬베 7번 승부 시즌 1~2에서는 이 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아무 죄도 없고, 막부에 해가 되지 않을 인물들이라도 만약을 대비해서 죽이라고 하는 점도 그렇지만 쥬베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절대로 손을 대지 않으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인물을 제거하게 만든다.

1-2시즌에 등장하는 반 막부파의 인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과거의 사건으로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하나같이 무네노리가 주모자로 관여했기 때문에 쥬베 개인에 호의를 품은 자들조차도 결국 쥬베와 싸우게 되는 등, 진정한 만악의 근원이다. 특히 시즌 2에서는 막부에 대한 충심이 지나친 나머지 시마바라의 난에 막부에 반하는 낭인이나 다이묘, 백성들이 결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후에는 대납언이었던 공경 엔조지 나리히라(円造寺業平)[29]를 위시한 조정이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조정의 음모에 어디 한번 동참해볼까?"라며 대놓고 분쟁을 조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장면에서 아들 마타쥬로[30]가 아버지의 광기에 식겁했을 정도.

그러나 종국에는 정치적 동반자로 여겼던 로주(老中) 마츠다이라 이즈노카미 노부츠나(松平伊豆守信綱)토사구팽으로 실각하는 것이 이 인물의 최후로 묘사된다.

타지마를 연기한 배우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치바 신이치 판 야규 쥬베 시리즈의 나카무라 킨노스케[31]로 자식의 죽음에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막부에 대한 충성에만 몰두하며 가문과 막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친구는 물론 충성을 바친 부하조차도 거리낌 없이 배신해 버리는 냉혹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확립했다. 창작물에 등장하는 타지마의 음험한 이미지는 모두 이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2007년의 무라카미 히로아키 시리즈는 나츠야기 이사오(1939-2013)가 연기했는데 나카무라 판과 캐릭터성은 변함 없지만 여기서는 상술한 것처럼 온갖 사건의 만악의 근원이란 설정이 붙은데다 자기 가족과 부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권력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을 보이는 등 막부에 대한 충성심을 광기에 가깝게 표현하여 인간으로서는 역대 최악의 타지마를 연기해냈다. 그래서인지 2시즌 마지막회에서 실각했을 때는 그간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게 오히려 불쌍해 보일 정도.[32]

6.2. 슈팅 게임 V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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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が剣にかかれる事を光栄と思え!
You have had the honor of being behead by my sword!
내 검에 베이는 걸 영광이라 생각해라!
-첫 등장시
貴様の剣は目障りだ、消えてなくなるが良い!
That darn sword of yours! Get out of here!
네놈의 검은 거슬린다! 사라져 없어져라!
-제2형태 합체 직후

성우는 하야미 쇼. 5번째 스테이지 단독 보스.[33]

보라색 인간형 갑옷 메카에 탑승하여 플레이어에게 덤빈다. 제1형태에서는 레이저 도를 휘두르면서 공격해 온다. 그리고 기관총으로 공격.

1형태를 반파시키거나[34]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제2형태로 합체, 거대 로봇 퍼펙트 무네노리(가칭)가 된다. 오른손(좁은 대형탄)→왼손(넓은 소형탄)→5웨이 산탄공격→오른손→왼손→추적공격.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으면 등 뒤에 장착한 비트로 공격. 비트→대형 전방위 산탄 구체의 패턴이다.

비트의 탄환은 플레이어를 향해 날아오기 때문에 미리 읽고 피하면 수월하다. 이후에는 비트+대형산탄의 파상공격 패턴.

체감 난이도는 4면 보스 혼다 타다카츠의 폭격기보다 조금 쉬운 수준.

6.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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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검호면서도 지력과 정치력이 높아 전 검호 중 능력치 1위다. 검호들 중에서는 지력, 정치력 1위. 천도 기준으로 통솔 41 무력 92 지력 81 정치 66.

6.4. 전국무쌍 시리즈

야규 무네노리(전국무쌍) 문서 참고.

6.5. Fate 시리즈

야규 무네노리(Fate 시리즈) 문서 참고. 여기서는 진명이 관직을 끼운 야규 타지마노카미 무네노리로 되어 있다.

6.6. 은혼

야규 코시노리 문서 참고.

6.7. 기타



[1] 석고 자체는 1만 3240석의 마에다 가의 토다 시게마사가 더 높았다. 그렇지만 시게마사는 다이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에다 가의 가신이었다. 에도 시대 당시 일본 전토에 다이묘는 300명도 되지 않았다.[2] 유파에서 후술하겠지만 이 야규 요시카츠의 차남 야규 토시요시가 오와리 야규류라는 분파를 세워 무네노리의 에도 야규류와 오와리 야규루 중에서 어느 쪽이 진정한 야규류인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3] 야규 가문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츠나의 최고 수제자였다고 한다.[4]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5] 영지를 빼앗긴 것이 1594년이라는 설을 따른다면 거의 영지를 몰수당하자마자 소식듣고 바로 중개해줬다는 소리가 된다.[6] 양 손바닥으로 칼의 옆면을 합장하듯 눌러 칼을 막는 기술.[7] 이에야스는 이와 별개로 무네요시에게도 따로 500석의 영지를 수여했다.[8] 야규번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요시카츠는 1552년생으로 이 당시 고작 20살이었다.[9] 그리고 이후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가신으로 있다가 히데아키의 요절 후 나카무라가의 가로인 요코다 무라아키의 간청으로 객장 신분으로 신세를 졌다. 영화 세키가하라에서도 이 일화가 나오는데 이에야스가 무네아키를 소개시켜줬다는 설정. 이후 요코다 무라아키가 모살당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가세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고 만다.[10] 양보한 것은 어디까지나 '야규 가문'의 당주 자리고 '야규 요시카츠 가문' 비유하자면 야규씨 요시카츠파 당주 자리는 왜란에서 전사한 스미요시 대신 둘째 아들인 야규 효고노스케 토시요시가 이었다.[11] 야규 가문의 기록 자체가 상당히 부실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워낙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요시카츠의 일생은 미스테리로 남이았다. 오와리에서 야규 신카게류를 개척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다.[12] 유능한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물려줬다는 점에서 이방우-이방원 관계와 비슷하다. 야심이 넘치는 다섯째가 형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든가,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난 장남이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않고 은거했다든가.[13] 기록상으로는 토시야시가 이때 영지 500석을 받았는데 오와리 야규류를 계승한 현대의 야규 가에서는 실질 3000석이라고 주장한다.[14] 몇몇 창작물에서는 "할복해야겠다!"고 외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무슨 이런 일가지고 할복입니까!"라고 외친 뒤 난입한 7명의 무사들을 처리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히데타다를 수행하고 있을 벌어진 일이다.[15] 나오모리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사촌 형제로 집요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성격에 좀 장애가 있었다고 여겨졌는데, 우키타 가문에 있을 때 당주인 히데이에와 다툼을 벌여 문제가 생겼다가 이를 이에야스가 직접 중재하여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왔다.[16] 참근교대가 명확하게 시행되기 이전이나 다이묘들이 눈치껏 에도에서 저택을 마련해서 기거 중이었기에 에도에 있었다.[17] 이 사건에 대하여 무네노리를 음흉한 계략가로 묘사하는 현대의 일부 드라마에서는 이 사건으로 친구 팔아 출세한 놈이라는 악명까지 덧붙여졌다고 하지만 실제 에도 시대의 야규 무네노리의 기록에는 그러한 비판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최근에 덧붙여진 평가인듯 하다. 이 최근에 덧붙여진 이유에 대해서는 유파에서 후술.[18] 차남은 무네노리보다 먼저 죽었다.[19] 일각에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호소카와 가의 검술 사범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무사시는 그냥 손님이었고 스승은 야규 무네노리였다.[20] 나베시마 가에는 특히 병법 가전서까지 전수했다.[21] 조선인이 일본에서 알아주는 검호 다이묘의 질녀와 결혼했다는 야사가 워낙 흥미롭다 보니 소설가 조풍연이 위에 나오는 센히메를 구출했다고 알려진 나오모리를 사철령이라는 조선인 청년, 사노 슈메는 좌준이라는 조선인 소년으로 설정한 역사소설 유성검을 쓰기도 했다. 유성검에서 두 사람은 외사촌 간으로 울산에서 왜군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온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고증을 적당히 무시해서 임진왜란 종전 즈음에 소년이었던 좌준이 오사카 성 전투 이후에도 여전히 소년으로 그려지고 슈메 = 좌준의 상대가 무네노리의 질녀가 아닌 손녀로 나온다.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담이 잠시 그려지는데 결혼하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않고 탱자 나무 아래서 잠시 헤어지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여담으로 유성검은 1970년대에 소년잡지인 새소년에 연재되었고 이후 클로버문고 152권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주로 사카자키 = 사철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사철령이 할복으로 사망한 이후 사노 슈메 = 좌준을 주인공으로 한 남해의 왕자가 잡지 새소년에 연재되었다. 무협작가 좌백이 한국무협사를 연재하면서 거론하기도 했다.좌백의 한국무협사, 걸작을 찾아서 4[22] 일본의 소설가인 아라야마 토오루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노 슈메의 본명은 박주말로 임진왜란 때 나베시마 군에 투항하였고, 재능을 간파한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카츠시게가 자신들의 스승인 야규 무네노리에게 박주말을 소개하였고, 이에 박주말이 이름을 사노 슈메로 바꾸고 야규 무네요시에게서 검술을 배운 후, 후에 재능을 감탄한 야규 무네노리가 결혼시키고 일족으로 삼은 후 야규 슈메로 이름을 바꿨다고 설정했다.[23] 물론 짧은 사료만 보고 슈메가 정말로 조선인이었는지 조선인이 맞다면 어쩌다가 야규 가문의 가신이 됐고 무네노리의 눈에 들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사노 슈메는 야규 가문의 여식과 결혼하여 야규 가문의 데릴 사위로 들어와 성씨까지 받아 어엿한 사족이 됐고, 자식도 순탄하게 낳아서 후에 자식도 무사로 임관하였으며, 본인은 야규 가문의 일족 묘에도 안장되어 묘가 현재까지 남아있으니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어서 외국인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신원미상의 무사치고 굉장히 출세한 셈이다.[24] 이는 오와리 야규의 세 번째 당주였던 야규 요시노부(厳延)의 저서로도 반박되는 주장으로, 그는 무네노리가 인가장을 받았음을 기록했다.[25] 다만 이 기록에는 신빙성이 부족하다. 단순한 마을 도장도 아니고, 무려 장군가의 검술 사범역인 가문이 도장 깨기를 당했다는 대사건임에도 했다고 주장하는 측만 있을 뿐, 정작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26] 야규류에서 오노파 일도류를 까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기록이나, 오노측에서 내려오는 기록이다. 오노 타다아키도 참..[27] 실제로 활인검 개념 자체는 신카게류의 노부츠나부터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사실 검술 중흥의 시조 이이자사 이에나오부터도 나름의 평화주의를 주창하기도 하였고.[28] 쥬베가 아버지인 무네노리를 호칭할 때, 아버님(親父殿)이라고 호칭은 하는데 이건 제3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높이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네노리도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을 반영해서인지 쥬베를 자네(お主)로 호칭하는데, 보통의 부자지간이라고 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단적인 예로 쥬베의 동생인 야규 마타쥬로한테는 너라고 호칭하는 등 무네노리와 쥬베의 사이는 그냥 혈통상 부자라는 점 외에는 거의 남남으로 묘사된다.[29] 대납언이란 관직은 율령제 하의 영내관 서열 3위인 관직이지만, 엔조지 나리히라 자체는 가공의 인물이다.[30] 훗날의 야규 무네후유(柳生宗冬, 1613~1675). 훗날 형 쥬베에가 급사한 이후, 번주의 자리를 승계하여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의 충신으로 종사하다 사후에는 종5위하 히다노카미(飛騨守)를 제수받았다. 형 쥬베에가 주인공인 사극에서는 대부분 무네노리의 아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인간미 넘치고 순박한 모습이 돋보이는데 반해, 아이러니하게도 한 세대 이후의 시대상을 다룬 TV드라마 초시치로 에도일기에서는 대배우인 탄바 테츠로가 연기를 맡으면서 배우 특유의 카리스마 덕분에 아버지가 순한 맛으로 보일 정도로 냉혹하고 뒷공작에 능한 정치가로 등장한다. 초시치로 에도일기는 도쿠가와 타다나가의 서자(극중에서는 코노에 가의 적녀 소생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증손녀(노부나가의 손자, 노부요시의 딸)가 타다나가의 정실.)이자 당대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조카, 마츠다이라 초시치로 나가요리(松平長七郎長頼)를 주인공으로 한 찬바라 시대극으로 무네후유는 초시치로의 검술 스승이지만 동시에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다. 초시치로가 언젠가 아버지 타다나가가 그랬던 것처럼 차기 쇼군의 자리를 노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초시치로 주변에 다수의 밀정들을 심어놓아 수시로 감시하고, 소동에 휘말린 초시치로를 사사건건 방해하거나 각종 음모를 꾸미는 등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밟는 모습으로 그려진다.[31] 원피스킨에몬의 모티브가 된 배우이다.[32] 무라카미 시리즈에서 타지마를 연기한 나츠야기는 치바 신이치 시리즈에서는 도쿠가와 타다나가의 가신 벳키 쇼자에몬을 연기했었다. 그리고 치바 신이치 시리즈에서 타다나가를 맡았던 배우 사이고 테루히코는 무라카미 시리즈에서는 마츠다이라 이즈노카미 노부츠나를 맡아, 지혜 이즈라는 역사 속의 이명에 걸맞게 쇼군 이에미츠를 보좌하면서 타지마의 상관으로서 온갖 명령을 내리다가 시즌 2 말미에는 그를 숙청해 실각시켜 버리는 냉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3] 중간 보스와 메인 보스의 역할을 다 해먹는다.[34] 반파시키면 폭탄과 잔기를 준다[35] 이에 대한 무네요리의 의도가 전혀 나오지 않아 추측도 어렵다.[36] 단순히 갇힌 게 아니라 발가벗긴 후 눈을 가리고 팔을 결박하고 목에 쇠사슬을 묶어 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