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 Alonso de Guzmán y Sotomayor, VII duque de Medina Sidoni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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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 Alonso de Guzmán y Sotomayor |
| 출생 | 1550년 9월 10일 |
| 스페인 제국 카디스주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 |
| 사망 | 1619년 7월 26일 (향년 68세) |
| 스페인 제국 카디스주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 | |
| 아버지 | 후안 클라로스 페레스 데 구즈만 |
| 어머니 | 레오노라 데 수니가 이 소토마요르 |
| 누이 | 마리아 안드레아 코로넬 데 구즈만 |
| 배우자 | 아나 고메스 데 실바 이 데 멘돈사 (1572년 결혼 / 1610년 사망) |
| 자녀 | 마누엘, 아폰소, 미겔, 미겔 제로니모, 레오노르 |
| 직위 |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스페인 대공, 아프리카의 카사사 후작, 제12대 산루카르 영주.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공작, 군인.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을 이끈 인물이다.2. 생애
1550년 9월 10일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태어났다. 조부 후안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은 제6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고, 조모 아나 데 아라곤 이 데 구레아는 사라고사 대주교 알론소 데 아라곤 이 루이스 데 이보라의 사생아다.[1] 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데 구즈만 이 데 아라곤은 니에블라의 제9대 백작이며, 어머니 레오노르 데 수니가 이 소토마요르는 제2대 아야몬테 여후작, 제3대 베하르 여공작, 제4대 바냐레스 여백작, 제2대 지브랄레온 여후작으로, 당시 스페인에서 매우 강력하고 부유한 여성이었다. 누이인 마리아 안드레아 코로넬 데 구즈만은 사촌인 제6대 베자 공작 프란시스코 디에고 로페스 데 수니가 이 멘도사와 결혼했다.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데 구즈만은 1556년 사망했기에, 1559년 조부 후안 알폰소 페레스가 사망한 뒤 당시 9살이었던 알론소 데 구즈만이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작위와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가 물려받은 재산은 유럽 귀족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1569년 초대 에볼리 공 루이 고메스 다 실바와 아나 데 멘도사[2]의 4살된 딸 아나 고메스 데 실바 이 데 멘돈사와 약혼했고, 1572년 교황청으로부터 결혼을 성사하기 위한 면제를 받은 뒤 결혼했다.
1581년 무슬림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해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같은 해에 황금 양털 기사단과 롬바르디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587년 드레이크의 카디스 습격 때 잉글랜드군이 육지로 상륙해 카디스를 공격하는 걸 막기 위해 기병 300명과 보병 3,000명을 도시로 데려와서 수비했지만, 드레이크가 육지에 상륙하지 않고 배만 불태운 뒤 철수하면서 무산되었다.
1588년 2월 9일, 잉글랜드를 향한 대규모 함대의 원정을 준비하던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이 리스본에서 급사했다. 이에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는 2월 14일에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함대 총사령관이자 안달루시아 해안 선장으로 임명했다. 펠리페 2세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매우 높은 사회적 지휘, 겸손한 태도와 자신에 대한 깊은 충성심, 그리고 훌륭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명성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규모 함대의 원정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세세한 간섭을 하던 왕은 자기 지시를 철저히 따르는 지휘관을 원했을 것이고, 해상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와 미겔 데 오켄도 등에게 지휘권을 넘겨주면 자기 말을 잘 안 따를 거라고 여기고 그를 선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자신에게 대규모 함대를 이끌 깜냥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펠리페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군사 경험이 지극히 부족하고, 잉글랜드군이나 스페인의 전쟁 계획에 대한 정보가 부실하며, 건강이 자꾸 나빠지고 뱃멀미에 시달리며, 재정상의 문제도 심각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고위 명문 출신만이 총사령관에 어울린다고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펠리페 2세는 유능한 해군 장성인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를 보좌역으로 선임했다.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플란데런 전선에 배치된 스페인군을 실어서 잉글랜드로 옮기는 원정이 매우 벅차다는 걸 눈치챈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임무를 거부하기 위해 왕실 비서 후안 데 이디아케스나 크리스토발 데 모우라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고 스페인의 전쟁 계획에 대해 무지해서 원정을 이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두 비서 모두 펠리페 2세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서신을 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는 출발을 늦추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펠리페 2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대함대가 집결한 리스본으로 향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1588년 2월부터 5월 30일까지 석 달 동안 제한된 자원 내에서 매우 탁월한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함대를 재편하여 보급품과 대포의 혼란스러운 분배를 합리화했고, 함포당 발사 수를 30발에서 50발로 늘렸으며, "인디언 경비대"의 카스티야 갤리온선을 무적함대에 추가하도록 왕실의 허가를 받아 최전선 전투력을 사실상 두 배로 늘렸다. 또한 선원들이 이전에는 항상 선상에 머물러 있어 선원들의 건강과 사기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던 것과 달리, 해안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가했다. 여기에 항해에 필요한 돛을 추가로 조달했고, 함대 제독들과도 친분을 다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정 준비에 차질이 여러 번 생기자,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에게 원정 성공 가능성이 회의적이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궁정 신하들이 하느님이 함대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며 서신을 국왕에게 전달하길 거부했고, 결국 당대 최대 규모의 해상 원정이 감행되었다.
1588년 5월 30일,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갤리온선 산 마르틴에 올라 탄 뒤 리스본에서 출항하여 130척에 달하는 함선과 선원 8,050명, 군인 18,973명, 갤리선 노예 2,088명, 장교, 귀족, 성직자, 의사 총합 1,389명을 통솔했다. 그의 임무는 네덜란드 전선에서 활약하던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지휘를 받는 플란데런 전선 스페인군 2만 6천 명을 실어서 잉글랜드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부대를 이끈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자신이 주도해서 원정을 이끌기보다는 왕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고, 고문과 부하 선장들의 의중에 의존했다. 이 때문에 원정대에 속한 선장들은 그를 은근히 경시했고, 이는 파국으로 이어지는 단초로 작용하게 된다.
스페인 대함대가 영국 해협에 접근했을 때, 스페인의 여러 제독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현재 가지고 있는 군대만으로도 잉글랜드를 제압하는 게 충분하니 굳이 네덜란드까지 가지 말고 조수를 타고 항구를 습격한 뒤, 하륙 후 런던으로 진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펠리페 2세가 반드시 파르마 공작과 합류한 뒤 그의 군대를 잉글랜드로 수송하라고 엄격하게 지시했다며 거부했다. 그 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잉글랜드 해군과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휘 경험이 부족한 총사령관으로서 모범적으로 행동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장거리에서 포격을 가하자, 그는 고문을 맡은 디에고 플로레스의 충고를 귀담아듣고 함대를 초승달 대형으로 배치해 적의 포격으로부터 방어를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했고, 가장 튼튼하고 무장을 잘 갖춘 전함들을 가장자리에 두고 장거리 포대를 배치했다. 또한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의 지휘 아래 최정예 함선들로 구성된 선봉대를 적군 가까이에 배치했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접근하든, 선봉대는 방향을 돌려 공격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머지 함대는 대형을 유지하고 서로 도우면서 예정된 진로에 따라 이동하게 했다. 그 결과,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배 3척만 잃고 대다수의 전력을 유지한 채 카페 항구에 정박했다.
영국 해협을 순조롭게 돌파한 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자신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자세히 설명하는 서신을 파르마 공작에게 보냈다. 그는 작전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조만간 도착할 예정이니 근처 육지로 이동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보낸 전령의 도착이 지연되어서, 파르마 공작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때는 이미 칼레 해전이 벌어진 뒤였다. 게다가 파르마 공작은 됭케르크에서 잉글랜드 함대와 유스티누스 반 나소 중장이 지휘하는 네덜란드의 플리부트 30척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대함대의 도착 예정지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다. 파르마 공작은 스페인 대함대가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기 위해 가벼운 선박인 파타치(patach)를 대거 파견해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혹시라도 적이 기습하는 걸 막기 위해 이들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1588년 8월 7일 밤, 잉글랜드 해군 사령관 찰스 하워드는 화공선 8척을 동원하여 불을 붙인 뒤 적 함대 사이로 바람을 타고 흘려보냈다. 이 화공선 중 3척이 스페인 감시정에 발각되어 도중에 끌려갔지만, 나머지 5척은 스페인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기함 및 주요 전함들은 위치를 고수했지만, 나머지 함대는 공포에 질려서 가만히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닻줄을 끊고 뿔뿔이 흩어졌다. 스페인 함선들은 화공선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신하는 과정에서 초승달 대형이 무너졌고, 마침 불어온 남서풍에 너무 멀리 등지고 있었기에 제 위치를 회복할 수 없었다. 여기에 거의 모든 닻을 도주하는 과정에서 끊어버렸기 때문에, 도로 돌아와서 정박하는 게 불가능했다.
8월 8일 새벽,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화공선을 피하느라 흩어진 함대를 재집결하려 애썼지만, 함대가 워낙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도로 모으는 데 막대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여기에 네덜란드군이 바다 표식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플랑드르 앞바다로 항해했다가 암초에 걸려 좌초될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프랑스 국경과 가까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항구 도시 그라블린에 임시로 정박하기로 했다. 그 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함대를 수습하느라 분주히 움직였을 때, 잉글랜드 함대가 들이닥쳤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기함과 다른 4척의 함선이 대규모 잉글랜드 함대와 대적하게 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사정거리 밖에 머물면서 스페인의 포격을 유발했다. 그 후 바짝 접근해 일제 사격을 가하여 적 함선에 손상을 줬다. 많은 스페인 포병이 잉글랜드군의 일제 사격에 죽거나 다쳤고, 대포를 다루는 임무는 종종 그걸 할 줄 모르는 보병에게 떠맡겨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후, 몇 척의 스페인 함대가 적군에게 공격받는 자국 함선 5척의 양쪽에 날개를 형성하기 위해 접근했다. 8시간 후, 잉글랜드 함선들은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일부 포수들은 대포에 사슬과 같은 물체를 장전해 발사했다. 오후 4시경, 잉글랜드군은 마지막 총격을 가한 뒤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5척의 스페인 함선이 무력화되었다.
전투 다음 날, 무질서하고 기동성이 없는 스페인 함대는 바람 때문에 제일란트의 모래사장으로 돌진할 위험에 처했지만, 나중에 바람이 남풍으로 바뀌면서 북쪽으로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는 적군이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추격했지만, 스페인 함대는 바람을 타고 빠르게 북상했다. 8월 12일, 찰스 하워드는 스코틀랜드 앞바다의 포스만 부근에서 추격을 중단했다. 이제 플란데런 항구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돌아서 대서양이나 아일랜드 해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과 아일랜드 해안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강력한 폭풍에 2차례나 직면하여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스페인 함대의 손실은 분명하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44~51척이 실종되었고, 11,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후안 데 빅토리아 수도자를 비롯한 당대의 여러 역사가는 이 참패의 모든 책임이 우유부단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며, 근본적인 문제는 펠리페 2세가 지휘관들에게 비현실적인 계획을 강요한 것과, 고문을 맡은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가 공작에게 잘못된 조언을 한 것에 있다고 본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식량과 물이 바닥나고 좁은 배에 갇혀서 고난을 거듭하는 동안 중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고, 귀국 후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을 오래 앓아서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백성들은 그의 무능 때문에 원정이 실패했다고 비난했지만, 펠리페 2세는 차마 그를 비난하지 못하고 그의 직위를 유지하고 병마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595년 건강을 회복한 후 궁정에 복귀한 그는 1596년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카디스를 습격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베헤르, 헤레스, 아르코스, 메디나 시도니아, 푸에르토 레알, 차클라나에서 차출된 지원군 5,000명을 이끌고 카디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카디스를 어찌 지킬 지를 놓고 페드로 데 기아 대위와 행정관 안토니오 히론을 상대로 심각한 의견 대립을 벌였고, 결정이 즉흥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군은 그 덕분에 카디스에 입성한 뒤 약탈을 자행했다. 사원, 가옥, 그리고 사람들이 약탈당했지만, 주민들, 특히 여성들의 신체에 손을 대지 않았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푸에르토 레알에 숨어 있던 스페인 선박들이 적에게 탈취될 것을 우려해 함대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갤리선과 인도 함대의 함선을 포함해 32척이 스페인군에 의해 자침 되었다. 사람들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느린 대응으로 인해 잉글랜드군이 도시를 약탈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고 비난했다. 그 후 조용히 지내다가 1619년 7월 26일 고향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아나 고메스 데 실바 이 데 멘도사(1560~1610): 에볼리 공 루이 고메스 데 실바와 아나 데 멘도사 데 라 세르다의 딸.
- 마누엘 알론소 페레스 데 구스만 엘 부에노 이 실바(1579~1636): 제13대 산루카르 영주, 제11대 니에블라 백작, 제8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제6대 아프리카 카자자 후작. 그의 딸 루이사 프란시스카 데 구즈만은 브라간사 공작 주앙과 결혼했는데, 1640년 남편이 스페인 제국에 반기를 들어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등극하는 걸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포르투갈 왕비가 되었다.
- 알론소 페레스 데 구즈만(1594~1676): 서인도 제도 총대주교.
- 미겔 데 구즈만(1595~1619): 제2대 빌라베르데 백작 텔로 데 구즈만 이 톨레도의 딸인 막달레나 프란시스카 데 구즈만과 결혼헀지만, 1619년 8월 22일 튀르크인 노예와 함께 파스트라나 근처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에 맞아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 미겔 제로니모 페레스 데 구즈만: 칼라트라바의 기사. 형 미겔 데 구즈만의 미망인인 막달레나 프란시스카와 결혼했다.
- 레오노르 데 구즈만: 제3대 파스트라나 공작 루이 3세 고메즈 데 실바 멘도사 이 데 라 세르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