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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8:58

싸울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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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역사3. 고증과 분석4. 매체에서의 인용5. 여담6. 관련 작품

1. 개요

싸울아비는 '무사(武士)', '싸우는 사람'을 뜻하는 한국어고어·순우리말로 잘못 알려졌던 어휘이다.

2. 역사

1980년대는 환빠유사역사학이 본격적으로 준동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해동검도 같은 신흥 무예도 이때 유행했으며 중국 신화치우한민족의 조상이라는 낭설이 유포되기도 했다.

싸울아비라는 어휘의 내력이 제대로 된 문헌 고증도 없이 '순우리말'로 세탁된 것도 이 시기였는데 1999년 국립국어원표준국어대사전이나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 등에 "무예를 익히고 군사(軍事)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등재되거나 사무라이의 어원이 싸울아비라는 괴담까지 돌았다. 심지어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에서는 "싸울아비는 무부(武夫) 혹은 무사(武士)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라는 정체불명의 예문까지 들어갔으며 후에 국어학자 김형주 등이 감수한 순우리말 오류 사전(2022)에서 이를 정정한 바 있다.

3. 고증과 분석

이 어휘의 어근을 분석하면 '싸우다'에서 나온 '싸울-'과 '사(士)', '사람'에 대응하는 '아비'의 조합이지만 옛 문헌이나 전승 등에서 발견되는 단어가 아니며 이렇게 조합된 어휘가 실제 사용되었다는 근거는 전무하다.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연원을 알 수 없으나 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b0016211_4d9b2f38605a2.jpg
옛날 武士(무사)를 "싸울아비"라는 현대어로 바꾸어놓은 것만도 선생 아닌 작가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고 자랑 아닌 겸손을 앞세우고 있다.
동아일보 1962년 11월 20일자 5면

사실관계만을 따져 보면, 가장 널리 알려진 조어자는 1960년대 배화여고 교사였던 김영곤으로 그가 언어 순화 운동을 하면서 '무사(武士)'를 순화시켜 만든 조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인 1935년에도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이광수의 소설 《이차돈의 사(異次頓의 死)》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도 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1]
…이 광경을 보고 거칠마로를 따라 온 두 싸울아비가 한꺼번 에 이차돈을 범하였으나, 이차돈은 칼이 한번 번득이매 두 사람은 목과 가슴에서 피를 뿜고 쓰러졌다. …(중략)… 그러나 거칠아비도 이름 난 싸울아비라 만만히 적의 앞에 무릎을 꿀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해서라도 이차돈의 빈 틈을 타려 하나 탈 수가 없었다.
이광수 《이차돈의 사(1935)》 중

다만 위 두 자료보다 오래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일찍 잡아도 19세기 이전에 존재했던 어휘라 상고하기는 어렵다. 이광수 개인이 만들어낸 용어인지, 민간에서도 쓰인 말인지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민간에서도 널리 사용했다면 문자로 기록되었거나 지역 사투리에서라도 그러한 말을 사용하는 화자 집단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한 내용은 알려진 바 없다. 상술한 김영곤의 발언을 보면 1962년 시점에도 이미 해당 어휘가 새롭게 현대어로 바꾼 것이라 간주되었을 정도로 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이 어휘가 중세 한국어에서도 쓰였다면 당시 '싸우다'는 '사호다' 또는 '싸호다'이므로 싸울아비의 옛말은 '사홀아비'나 '싸홀아비'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역시 조선시대 문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싸울아비 대신 무절(武節)이나 수사라 부른다는 주장도 있는데 역시 근거는 전혀 없다.[2] 그나마 수사는 다른 나라의 관직명으로 기록이라도 있지 무절은 그런 것도 없다.

한국사는 일본 문화가 급격하게 보급되던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특히 강점기 후반에는 아예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해 강제로 각종 문화와 정보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 반대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사무라이라는 그럴 듯한 명칭[3]을 한국에서 싸울아비로 고쳐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일단 한반도 내 역사서에서 일제강점기 에 쓰인 명칭이고 일제강점기에 한창 활동하던 소설가가 일제강점기에, 그것도 한창 민족 말살 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 혼자서만 썼다는 걸 고려해 보면 이쪽에 더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이후에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한 김영곤의 주장에 대한 진실은 어디까지나 본인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김영곤의 주장도 사실상 끼워 맞추기 수준이라 그 근거가 빈약해 전통적으로 쓰이던 옛말이라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해 일제강점기에 이미 이런 용어를 쓰던 이광수의 글을 김영곤이 보게 되어 그냥 그런 용어가 있는가 보다 하고 썼는데 주변에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이 전무했고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말하다 보니 그냥 나도 남이 쓰던 거 따라 쓴 거라고 하기는 좀 그래서 저런 식으로 구색을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이런 사실도 많이 알려져서 진지하게 백제의 무사 명칭이 싸울아비라고 주장하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삼국시대 배경의 컨텐츠 창작자들에게는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에 대응하는 개념으로는 여전히 쓰이는데 일종의 예술적 허용인 셈이다. 삼국시대는 봉건제와 유사한 사회였기에 백제에도 엘리트 무사 계급이 있기는 있을 테지만 기록이 부족하여 그 정확한 이름이 뭔지 알 수 없으니 현대에 나름 고풍스러운 조어법으로 만든 백제 무사들의 명칭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 매체에서의 인용

5. 여담

6. 관련 작품



[1] 조선일보 1935년 12월 25일 5면[2] 고구려의 지방 관직으로 수사(守事)가 있긴 했다. 중국의 송나라에서도 군사를 담당하는 지방 관직으로 같은 명칭이 있다.[3]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상처가 크고 때문에 광복 이후 몇십년가 정부 차원에서 일본 문화 수입 금지 조치가 이루어졌기에 이런 분위기가 덜 했지만 당시 일본과 접했던 타국은 정 반대 분위기였다. 지금도 서구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낭만을 아는 중세 기사와 동급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전사로 여겨 환장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다만 오히려 지금보다 당시에 더 환상이 큰 편이었다. 당연히 아직 해방 전의 한반도도 크게 다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장 박정희만 해도 일본의 군인을 동경하여 일본군에 입대 한 이력이 있을 정도다. 당시 일본군이 가장 강조하던 게 바로 사무라이 정신이었다는 점을 생각 해보면, 외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문화 컨텐츠가 바로 사무라이였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 상당히 못 살았고 피지배 계층 입장이었던 한반도 주민이 이런 것을 동경하고 부러워 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