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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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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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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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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숭선군파의 역대 종주
숭선군가 역사 시작 1대 숭선군 이징 2대 동평군 이항
}}} ||
숭선군파 초대 종주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인조의 왕자
숭선군 | 崇善君
파일:IE001859675_STD.jpg
숭선군묘 전경
출생 1639년 11월 11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별실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사망 1690년 2월 14일 (향년 51세)
묘소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재위기간 조선 숭선군
1647년 1월 30일 ~ 1690년 2월 14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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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징(澂)
부모 부왕 인조
모친 귀인 조씨
형제자매 부왕 기준 6남 1녀 중 5남
모친 기준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영풍군부인 평산 신씨[1]
(永豊郡夫人 平山 申氏, 1639 ~ 1692)
자녀
2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이효순(李孝順, 1659 ~ ?)
장남 -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 1660 ~ 1701)
차녀 - 이철순(李哲順, 1661 ~ ?)
3녀 - 이희순(李喜順, 1663 ~ ?)
4녀 - 이종순(李終順, 1667 ~ ?)
차남 -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 요절)
징지(澄之)
군호 숭선군(崇善君)[2]
시호 효경공(孝敬公)
}}}}}}}}} ||
1. 개요2. 생애3. 사망4. 대중매체에서5. 가족과 후손
5.1. 역대 종주(宗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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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인조와 그의 후궁 귀인 조씨의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이다. 이복형제는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이었으며 동복형제로는 친누나 효명옹주, 친동생 낙선군이 있었다.

2. 생애

1639년(인조 17년) 10월 17일[3]에 한성부 창경궁 별실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46년(인조 24년)에 '숭선군(崇善君)'으로 봉해지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받았다.[4] 1648년(인조 26년)에 간택을 통해 신익전[5]의 딸 신씨와 혼인했다.

1649년(인조 27년)에 아버지 인조를 잃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복 형 효종은 비록 생모 귀인 조씨와 사이가 좋진 않았으나, 그 소생인 이복 동생들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가엾게 여겨 재위 초반에는 노비를 150명씩 내려주는 등, 잘 대해줬다. 그러나 평소 숭선군의 정실 영풍군부인 신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어머니 귀인 조씨가 누나 효명옹주의 몸종인 영이를 숭선군의 첩으로 들이자, 신씨는 시어머니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 믿고 이모인 장렬왕후한테 달려가 울며 하소연을 했다.

분노한 장렬왕후는 영이를 불러내 문초를 했는데 겁을 먹은 그녀는 귀인 조씨가 대비 마마를 저주한다며 털어놓았고, 여러 명의 관련자들이 연일 나오면서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가 김자점 내외와 결탁해 저주를 하고 역모를 모의한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처음엔 그저 옹주의 여종이 왕자의 첩이 된 것에 대한 문초가 정말 뜻밖에도 김자점의 옥사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던 셈이다. 어머니인 귀인 조씨는 인조가 사망한 지 불과 2년 만인 1651년(효종 2년)에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사사되었다.

역적의 가족인 숭선군과 그 형제들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6] 처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작위만 삭탈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대신들의 상소가 계속되어 1년 뒤 숭선군 형제는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귀양을 가고, 한동안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과 함께 지냈고 3년 뒤엔 누나 효명옹주도 교동으로 와서 같이 살게 된다.

효종이 영풍군부인 신씨에게 유배간 남편을 따라가도록 명하면서 신씨도 유배지로 따라갔으나 숭선군 입장에선 물론 신씨야 전혀 의도치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기 이모에게 고자질을 해서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데 이어 자신도 이 꼴로 만드는데 한몫 한 부인에 대한 분노가 당연히 커서 평소엔 네 이모 빽을 믿고 날 그리도 업신 여기더니 왜 따라왔느냐며 그녀를 몹시도 냉대하였다.

그러나 홍우원, 송시열, 이경여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호소하여 4년 뒤인 1656년(효종 7년) 18세 때에 풀려난 뒤 관작이 복구되었고,그 후 부인 신씨 사이에서 총 2남 4녀를 터울 없이 본 걸로 보아 시간이 지나서 냉담했던 관계를 많이 회복한 걸로 보인다.

이후에는 사옹도제조(司饔都提調)[7]를 맡고, 신덕왕후 강씨의 부태묘사(副太廟事)로 모든 종친을 거느리고 3차례나 상소를 올린 끝에 윤허를 받아 역사를 원만히 집행하는 등,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에 주로 참여했다. 1680년(숙종 6년) 42세 때는 조카손자 숙종에게서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에 봉해졌다.

3. 사망

1690년(숙종 16년) 1월 6일[8]에 향년 52세로 별세했다. 숙종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앞으로 3년 동안 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을 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파일:IE001859675_STD.jpg
<colbgcolor=#94153e> 숭선군 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9] 종산 해좌에 있으며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지방기념물 제6호로, 신도비 좌대 귀부(龜趺)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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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의 숭선군
2013년 JTBC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는 송민재(유아기), 오은찬, 정택현(10대)이 연령대에 맞게 나눠서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실제 역사를 비틀어 소용 조씨(김현주 분)가 두 번째 출산에서 딸을 낳자 아이를 버리고 평민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이를 두고 전주 이씨 숭선군파 종친회에서는 법원에 명예훼손으로 대응했으나 법원에서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결국은 JTBC 측에서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그 외에도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에 대해서도 인조의 딸이 아닌, 조 소용이 입궁 전에 정을 통한 가공의 인물 남혁(전태수 분)[10]의 딸로 설정해 놓았다.

5. 가족과 후손

정실부인 영풍군부인 신씨 사이에서만 2남 4녀를 두었다. 영풍군부인 신씨는 앞서 서술했다시피 신익전의 딸이자 장렬왕후의 조카로, 고모부 중 한 명이 민회빈 강씨의 친오빠인 강문성이다.

장남은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이며, 차남은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인데, 동성도정이 아주 어린 아기 때 사망하여 실질적으로는 동평군이 독자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숭선군파는 전부 동평군의 자손들이다.[11]

장녀는 해평 윤씨 윤세정, 차녀는 파평 윤씨 윤정호, 3녀는 순흥 안씨 안수정, 4녀는 양주 조씨 조명봉과 결혼했다.

큰아들 동평군에 관한 내용은 동평군 문서 참조.

5.1. 역대 종주(宗主)

1. 숭선군 이징(崇善君 李澂).
2.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 - 숭선군파 1대 봉사손. 사손(嗣孫)의 댓수는 종주의 댓수에서 '-1' 하면 된다.
3. 반양도정 이소(潘陽都正 李炤).
4. 학성군 이경(鶴城君 李坰).[12]
5. 이진악(李鎭岳).
6. 이병수(李秉洙).
7. 이형중(李馨重).[13]
8. 이민응(李湣應).
9. 이재기(李載冀).[14]
10. 이덕용(李悳鎔).
11. 이해성(李海晟).
12. 이완주(李完柱).
13. 이우종(李愚宗) - 현재 봉사손.

[1] 장렬왕후의 큰언니인 조수임의 딸로, 장렬왕후의 조카이다. 따라서 숭선군에게 장렬왕후적모임과 동시에 처이모가 된다.[2] 봉호는 경상북도 선산군의 옛 지명이었던 숭선군(崇善郡)에서 유래했다.[3] 양력 11월 11일.[4] 1644년에 일어난 심기원 등의 모반을 평정하고 그 공으로 책봉된 공신의 직책. 아니 근데 10살도 안된 애가 무슨 공신이야. 왕자니까 그냥 받은 거지.[5] 효종 대의 도승지를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선조부마 신익성의 동생.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언니를 아내로 맞는 등, 왕실과 겹겹히 인척 관계에 있었다.[6] 보통 남자 왕족이 역모에 연루되면 어린이고 뭐고 간에 가차없이 사형을 요구하던 조선시대 왕실 역사를 생각하면 숭선군은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숭선군보다도 나이가 어려 역모를 주도하긴 커녕 제 앞가림도 못하는 어린아이인데다가 혐의 자체도 어거지나 다름없었던 영창대군계축옥사에 휘말리자, 단지 반역의 수괴라는 이유로 곽재우이덕형같은 법도를 중시하는 강직한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이 광해군의 서슬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앞다투어 사형을 주장했다.[7] 조선 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인 사옹원의 총책임자. 실무 책임자는 아니다.[8] 양력 2월 14일.[9] 이때 그의 아들 동평군이 지관을 보내 숭선군의 묘자리를 검색하다가 지관이 이곳을 추천하여 동네주민들과 싸움을 벌인 끝에 숙종은 동평군의 편을 들어주며 여기에 묻힌다.[10] 하지원의 동생.[11] 동성도정의 경우는 1872년 고종의 명으로 군(君)으로 추증받았고, 사후양자로 능원대군의 증손자인 낙신군 이인환(樂新君 李人煥)으로 지명했다. 낙신군에게 아들이 없어서 조카인 학림군 이후성(鶴林君 李厚星)을 들여서 대를 잇게 했다.[12] 생부는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이방의의 11대손 이홍서(李弘緖)이다. 반양도정에게는 첩에게서 난 자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실 출신 양자를 들여온 것이다.[13] 생부는 성종의 12남인 무산군(茂山君)의 10대손인 이창록(李昌祿)이다. 1900년에 편찬된 선원속보 무산군편에서는 이름이 주중(柱重)으로 적혀 있다.[14] 생부는 성종의 12남인 무산군의 12대손인 이병석(李炳錫)이다. 가계상으로 이형중하고 종조손(從祖孫)관계로 공통조상이 진사(進士)를 지낸 이용진(李龍鎭, 무산군의 9대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