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13:56:16

송나라-서하 관계

서하-송나라 관계에서 넘어옴
서하 관련 문서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ece5b6> 역사 역대 정난군절도사 | 서하/왕사
정치 황제 | 역대 서하 황제 | 서하 시기 비황족 황제 추존자
외교 송나라-서하 관계
행정구역 흥경부
문화 서하어 | 서하 문자 | 서하왕릉
민족 탕구트
기타 송원시대
수나라&당나라 · 오대십국 · 청나라 · 대만 | 중국 }}}}}}}}}

송나라의 대외관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고려(북송) 고려(남송) 서하 베트남
당나라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인민공화국 }}}}}}}}}


1. 개요2. 역사
2.1. 성립 및 초반2.2. 중후반2.3. 종결
3. 관련 사건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송나라서하의 대외관계에 대한 문서. 편의상 북송남송 모두 포괄하며, 서하 건국 이전의 관계도 포함한다.

2. 역사

2.1. 성립 및 초반

탕구트는 서하를 세우기 전부터 수나라, 당나라 등에 의해 복속되어 내부로 이주되거나 조공을 바치기도 했었다. 당나라 멸망 후 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으로 탕구트는 독자적 세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탕구트 족장이었던 이계천과 이덕명은 송나라와 화친을 맺으며 조공을 바쳤으나 이원호 때부터 독자적으로 독립을 하려고 했으며, 송나라와의 갈등 끝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전투가 호수천 전투이다.

2.2. 중후반

송나라는 탕구트와 전쟁을 벌였으나 크게 패배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지금의 간쑤성과 닝샤 지역, 산시성(섬서성), 칭하이 북부 일부에 독립되어 서하가 건국되었다. 이후 송나라는 서하에게 송나라를 황제국으로 여기되 서하에 제물을 바쳐야 했다. 서하는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되 자신들의 문화도 유지하려 했으며, 대표적으로 서하 문자를 만들었다.

경력의 화의 이후 북송과 서하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066년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고 한기[1]는 더 나아가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고,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하고 말았다. 또한 충악[2]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데 이어 조정의 승인도 없이 수주성을 공략했고 이에 서하군이 반격하여 보안군이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다. 이에 송 조정과 송 신종은 수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곽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이처럼 경력의 화의 이후에도, 북송과 서하에는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1071년부터 1073년까지는 왕소가 하황 일대를 개척함으로써[4][5] 서하를 양면으로 협공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였다.[6]

1071년에는 충악이 나올에서 서하를 격파해 나올성을 수축하였고, 송은 수주성과 나올성을 거점으로 횡산 일대에서 무녕성과 여러 산채를 지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서하에 의해 선제공격을 받고 순녕채, 무녕성 등지에서 전쟁을 벌이나 서하가 승리했고 북송 정권은 그것들을 서하에 빼앗겼다.

1081년 서하에 내분이 발생하자 충악, 이헌[7], 고준유와 유창조, 왕중정 등을 필두로 하여 5개의 방면으로 서하를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또 군량 보급 문제가 심각하여, 오히려 역공을 당해 패하고 말았다.(오로벌하) 1082년에는 한 곳으로 통일하여 서하를 정벌하고자 하기 위해 영락성을 신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반드시 패할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서희는 이를 무시했고, 송 신종은 서희로 하여금 영락성 신축을 강행하였다. 결국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서희는 패사하였고[8] 영락성은 함락되었으며, 신종의 서하 정벌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서하도 백성의 생업이 파괴되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영락성 전투)

이후 구법당이 집권해 하황 일대를 토번에 넘겨주었다.
송 철종 시기 이를 다시 찾으려 하나, 토번과 서하가 연합해 북송에 저항했다. 송 철종은 구법당 인사들을 내쫓고 면역법과 보갑법, 청묘법 등 왕안석 시기 신법을 다시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킨 뒤, 서하에 대해 강경책을 폈다. 그는 장절의 건의에 따라 평하성과 영평채를 쌓았다. 이에 양태후[9]가 병사들을 총동원한 뒤 맹장 곽성이 지키는 평하성을 공격한다. 북송의 수비군이 이에 결사 항전하고 서하군을 기습 공격하는 등 서하군에 피해를 입힌다. 양태후는 후방이 북송군에게 차단당할 것을 우려해 철수하고 북송군은 이를 추격해 외명아매, 매륵도포 등의 장수들을 생포하고 3000명을 참했으며, 소와 양 10만 마리를 노획했다. 서하는 송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했고, 요의 간섭을 받는다. 이후 서하 숭종의 생모 양태후는 요의 사신에게 피살당한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북송도 농사철에 장정들을 징집하고 막대한 군수물자를 조달한 것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진다.

이후 송 휘종 시기에는 동관왕후[10]가 이끄는 군대가 하황 일대[11]를 수복하고 청당 일대[12]를 개척한 데 이어[13] 1108년 황두회흘까지 정복하여 농우도호부를 설치한 뒤, 동관이 이끄는 군대가 서하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정화 4년(1114년), 송군은 동관과 충사도의 지휘 하에 고골룡(古骨龍)이 서하군을 대파한 데 이어 선화 원년(1119년), 서하 횡산 땅을 함락시키고, 서하는 장벽을 잃고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서하 숭종(崇宗) 이건순은 송나라에 신복하였다. 여기서 동관이 유법으로 하여금 출병을 강요하는 바람에 유법이 출병하였으나,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전사하였고 충사도[14]의 군대가 겨우 막아냈다.[15] 북송도 관우 지역이 황폐화되는 피해를 보았으나, 서하의 경제적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1127년 정강의 변이 일어나자 서하는 생기를 얻어 송나라의 서북 영토를 점령하였고 이로써 북송과 서하와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2.3. 종결

서하는 송나라, 요나라 사이의 외교에서 중립이었으나 요나라와 동맹을 맺어 송나라를 위협하기도 했었다. 1125년, 요나라는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여 일부 백성들이 서쪽으로 달아나 서요를 세우고 여진족의 금나라가 세워지자 서하는 금나라와 동맹을 맺고 동시에 금나라에 복속되었으며 이 시기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들어서면서 북송과의 관계는 끝이 났다.[16] 이후에도 남송과 서하가 같이 존재했으나[17] 몽골 제국의 속국이 된 이후 몽골 제국이 서하를 침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돕지 않은 금에 원한을 품었고 여러 차례 금을 공략했으나 실패하고 많은 손실을 입었다. 여기서 금이 남송을 공격하던 때 서하가 남송 정권에 연합작전을 제의하여 남송과 함께 금을 공략하나, 실패한다. 그 뒤 몽골 제국에 의해 서하와 금나라가 멸망되었고, 훗날 남송도 1279년 멸망하면서 끝이 나게 되었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남송 시기 권신으로서 개희북벌을 주도한 한탁주의 증조부[2]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청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 충세형, 손자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3]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기도 했다.[4] 1068년 신종에게 평융책을 올려 서하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하, 황 2개의 주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 왕소는 토번 부족 중 강한 부족인 유용가 부족을 귀순시키고, 희, 하, 민, 첩 등의 6주를 수복하는 등 서하 남부의 토번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2천 리나 영토를 개척한다.[6] 왕소는 왕안석이 실각하자 그도 실각하고 만다. 1081년 사망.(속자치통감에는 1077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 환관이었고, 왕소와 함께 하황 수복에 참전했을 뿐 아니라 충악과 함께 강족 반란 진압에 참전하였다. 오로벌하 시기 난주를 수복했다. 이헌은 난주를 수복함으로써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헌이 환관이었던 데다가 그의 군대만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패착 중 하나였다.[8] 여기서 영락성을 신축하는 데 반대한 충악은 서하군의 영락성 공략을 방관하였고 서하군의 공성 와중 병사한다.[9] 서하 혜종의 생모가 아닌, 서하 숭종의 생모이다.[10] 왕소의 차남이다.[11] 신법당 실각 뒤, 구법당이 하황 일대를 토번에 넘겨주었다. 북송군이 이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서하와 토번의 연합으로 인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12] 칭하이성 시닝시 일대[13] 왕후는 1106년 사망.[14] 충세형의 손자로, 충가장의 일원이다.[15] 동관은 이를 승전으로 허위보고한다.[16] 북송 시기 북송군이 점령하였던 하황 일대는 서하와 금나라가 동시에 관할하게 된다.[17] 금나라가 몽골군의 남하로 인해 개봉으로 천도한 뒤 남송을 공략하나 실패했고 나중에 서하가 남송에 자신들과 연합하여 금을 공격하자고 제의한 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