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국왕에 대한 내용은 빌헬름 2세(뷔르템베르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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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DE34><colcolor=#323231> | |||
출생 | 1859년 1월 27일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왕태자궁 | |||
사망 | 1941년 6월 4일 (향년 82세) | ||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도른 | |||
재위기간 | 프로이센 국왕 겸 독일 황제 | ||
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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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알베르트[1] (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 ||
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 ||
형제자매 | 여동생 샤를로테, 남동생 하인리히, 둘째 남동생 지기스문트, 여동생 빅토리아, 막내 남동생 발데마어, 여동생 조피, 막내 여동생 마르가레테 | ||
배우자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1881년 결혼 / 1921년 사망) | ||
로이스그라이츠의 헤르미네 로이스 (1922년 결혼) | |||
자녀 | 장남 빌헬름 차남 아이텔 프리드리히 삼남 아달베르트 사남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남 오스카 육남 요아힘 장녀 빅토리아 루이제 | ||
종교 | 루터교회 (프로이센 교회 연합) | }}}}}}}}} |
공식 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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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제3대 황제 겸 프로이센 왕국의 제9대 국왕이자 독일의 마지막 군주.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강제 퇴위당했다. 패전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네덜란드 도른에서 사망했다.이웃나라이자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무려 67년이나 재위해서 잘 부각이 안 되지만 빌헬름 2세도 재위 기간은 30년으로 긴 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재위 기간을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심지어 퇴위당한 이후로도 23년이나 더 살아서 1941년에 사망했다.
카이저 수염의 어원이 된 사람으로, 특유의 수염 스타일로 유명하다.
뜻 자체도 황제지만, 근대 역사에서 '카이저'라고 하면 이 사람을 칭하는 고유명사 비슷한 것으로 굳어져 있다. 지리적인 의미의 독일이 통일된 후 3명의 카이저(황제)가 있었지만 전임 카이저들이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정치와 외교를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과 달리[2],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친정을 하여 외교 전면에 나섰으므로 존재감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국가들에서는 '카이저'가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칭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져 있다.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된 1889년에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광부들이 파업에 나서자 강경 진압을 주장한 비스마르크와 다르게 파업 문제에 온건책을 주장하면서 손수 중재를 해주었으며 이후, 총선에서 비스마르크파가 패배하자 이를 계기로 비스마르크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반사회주의자 법을 폐기하며 전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반영할 정도로 꽤나 유연했고 이후에 사회주의 견제에 나서기는 했지만 복지제도 증설에도 신경썼으며, 독일의 경제와 군사력도 건실하게 성장하여 세계 3위를 기록하는 등 내치 자체는 괜찮았지만[3] 외치에서 소탐대실해 전쟁을 말아먹으며 패전으로 초라하게 퇴위했다. 그런 점에서는 프랑스 제2제국의 나폴레옹 3세와도 유사하다. 다만 현대에 와서 재평가를 받는 나폴레옹 3세와 달리 빌헬름 2세는 여전히 평가가 안좋은 편이다. 다만 이는 빌헬름 2세 개인의 문제보다는 당시의 시대상이 제국주의가 당연하던 시절인지라 당대의 시대상이 부정적으로 재평가되면서 제국주의의 상징격인 인물이라서 실제보다 더 비판을 받고 있다.
2. 생애
크게 보면 황태손-황태자로 살던 청년기(0살~29살), 황제로 살던 중년기(29살~59살), 황제에서 퇴위한 노년기(59살~82살)로 삼등분할 수 있다.2.1. 어린 시절
아버지 프리드리히 왕세자와 함께.(1863년 촬영)[4]
1859년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왕자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4남 4녀 중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빌헬름 2세의 출생 당시 큰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프로이센의 국왕이었고,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왕세제,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 계승 2순위 왕자였다.
빌헬름은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의 장손이였고, 외조부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42명의 손주들 중 첫째였으며[5], 출생 당시 프로이센 왕위 계승 3순위[6], 영국 왕위 계승 6순위[7] 왕자였다.
빌헬름 2세의 출산 당시 문제가 생겼다. 출산 당시 역아로 태어났는데 왼쪽 팔이 어머니의 자궁에 걸렸고[8] 왼쪽 팔을 비틀어서 빼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왼팔이 오른팔보다 약 15cm나 짦았다.
어린 시절 빌헬름 2세.
어머니 빅토리아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아들을 보듬어주기보다는 냉대했고[9] 학대에 가까운 치료들을 끊임없이 행했다.[10] 이는 당연히 어린 빌헬름 2세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았고, 계속되는 어머니의 냉대에 성격이 비뚤어졌다.
이 꼬라지를 보다못한 친조부모인 빌헬름 1세와 아우구스타 황후는 황태자비로부터 빌헬름 2세를 데려와서 직접 양육했다.
1863년 첫째 외삼촌 에드워드 7세와 외숙모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이때 4살이던 빌헬름은 당시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하이랜드 드레스를 입고 장난감 더크(스코틀랜드 전통 단검)을 가지고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빌헬름이 심적으로 안절부절 못하자 둘째 외삼촌 알프레드 왕자는 조용히 하라고 말했다. 이에 화가 난 빌헬름이 장난감 더크로 외삼촌인 알프레드를 위협했고 이에 알프레드가 제압하려고 시도했을 때 빌헬름이 알프레드의 다리를 무는 소동이 발생했다. 정작 빅토리아 여왕은 이 소동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11][12]
빌헬름이 8살 때 어머니 빅토리아는 왕위 계승자로서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빌헬름에게 승마를 강제로 배우게 시켰고, 빌헬름은 힘들어했다. 몇 번이고 떨어지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다시 제자리에 앉았고, 몇 주 뒤에 겨우 승마를 그럭저럭 잘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훗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에게 "제발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빌헬름은 6살 때부터 39살의 게오르크 에른스트 힌츠페터라는 교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빌헬름 2세와는 꽤 가까운 교사였다.
10대 때 빌헬름은 카셀에 있는 프리드리히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1877년 1월 빌헬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살 생일 때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이면 아무나 다 받는 가터 훈장을 선물로 받았다.[13]
2.2. 결혼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부부.
이후 1881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했다. 빌헬름 2세는 원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아니라 이종사촌동생인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14]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거절당했고[15]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 결혼한다.[16] 정작 엘리자베트는 러시아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남편과 사별했고 이후 러시아 혁명으로 볼셰비키에게 살해당한 반면[17], 빌헬름 2세는 아내와 금슬도 좋았고 슬하 6남 1녀의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비록 폐위당했지만 많은 재산을 가지고 82세까지 천수를 누린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원래 프로이센 왕실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일국의 공주가 아닌 공녀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빌헬름 2세가 결혼하겠다고 밀어붙였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이 결혼으로 프로이센 왕실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며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빌헬름 2세의 자녀들.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슬하 6남 1녀를 두었다.
2.3. 황태손, 황태자 시절
빌헬름이 장성하자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빌헬름을 아들 부부의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군에 입대시켰다. 빌헬름은 군대를 매우 좋아했고, 이것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빌헬름은 무뚝뚝하고 무례했으며, 그의 부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좋아했다.
1888년 할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99일 만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사망하면서 황태자가 된지 99일 만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빌헬름 2세는 아버지가 사망한 건 다 어머니 때문이라며 어머니를 비난했다.
"영국 의사가 내 아버지를 죽였고 영국 의사가 내 팔을 불구로 만들었다. 이는 내 어머니의 잘못이다."
빌헬름 2세
빌헬름 2세
2.4. 황제로 즉위
1890년 초상화.
1888년 할아버지 빌헬름 1세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고 황제가 된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정책과는 반대로 움직였으며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자유주의적 유산을 지워나갔다. 어머니 빅토리아 황태후하고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06년 맏이이자 장남인 빌헬름 황태자와 맏며느리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장남인 빌헬름 황자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2.5. 정책 노선
그의 정책은 유럽을 안정시키고, 그 안정 속에서 균형자, 중재자로서 독일의 국익을 챙기는 것을 중시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는 정반대로 해외로 적극적인 진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정세의 주도권을 독점하던 대영제국에 버금가는 독일 제국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노선에 반대해 계속 진언을 했지만 빌헬름 2세는 듣지 않았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재상에서 물러난다. 비스마르크가 해임될 당시만 해도 독일 내 여론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 빼고 찬양 일색이었는데, 집권 말기에 독선적인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거의 모든 독일인들이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18]
아무튼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실각(1890년) 이후 팽창정책에 몰두했다. 덕분에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약간의 식민지를 얻기도 했지만, 해군을 육성하며 식민지를 팽창하는 정책으로 영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의 공화국과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싸운 보어 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 공화국들을 지지하는 전문을 발표하는데, 이 전문은 영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어서 영국이 발칵 뒤집혔다. 말만 앞세운 것은 아니라서, 보어인들이 캐낸 금과 다이아몬드가 독일산 총포로 바뀌는 걸 본 영국이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독일은 189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불협화음을 일으켰고 덕분에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평판은 악화일로를 달렸다. 결국 영국은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으로 대표되는 고립외교 노선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는 1902년의 영일동맹과 1904년의 영불 화친조약으로 현실화되었다.[19] 또한 빌헬름 2세는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과 더불어 진압군을 파견함으로써, 독일 또한 제국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전까지 비스마르크의 교묘한 외교 정책으로 독일에게 유리하게 유지되던 유럽의 균형은 빌헬름 2세의 이러한 대외 정책 때문에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1906년 영러협상으로 삼국 협상이 완성되며 삼국 동맹을 포위하게 된다.
반면 외치와는 다르게 내치에서는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펴기도 했었다. 비스마르크와 본격적으로 충돌했을 때가 루르 광산 파업 때였는데, 이 때 비스마르크가 강경 대응을 주장하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때려잡아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 반면에 빌헬름 2세는 파업을 중재하자는 의견을 보였다. 비스마르크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비스마르크가 금지시킨 사회주의 정당도 허용하고 사회 보장도 확충하고 만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지시키고 청소년과 여성들의 노동 시간을 규제시켰으며 노동 재판소를 설치해서 노동 관련 업무를 맡기게 하는 등 사회 안정을 위해서 노동자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폈고 비스마르크가 탄압에 나섰던 가톨릭 중앙당과도 어느 정도 화합을 이루기까지 하면서 재임 초기에는 노동 황제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었다. 나중의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의외지만 당시 독일에서 싹트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20] 그렇지만 재임 중기를 넘기면서 점차 보수화되기 시작해서 자유주의 성향의 총리로 평가받는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재상 재임을 시작으로, 비스마르크급은 아니었지만 국방 예산을 늘리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등 보수적인 행보를 보였다.
재위 시절 자신의 정치 슬로건을 "Deutschland über alles(그 무엇보다 독일)"로 내밀었다. 사실 이는 훗날 독일의 국가가 되는 노래인 '독일인의 노래' 1절의 가사 중 일부인데 여기서 슬로건을 따온 듯 하다.[21] 그리고 바로 이때부터 흔히 잘 알려진 군림하는 독일이라는 잘못된 번역이 돌기 시작했다. 독일인의 노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über alles는 '그 무엇보다' 라는 뜻이지 군림한다거나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22] 사실 처음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이 널리 퍼져있긴 했다. 아래는 빌헬름 2세의 초상과 그의 슬로건이 씌어 있는 선전 포스터.
정복욕은 우리를 몰아붙이지 못하며, 하느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영토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의지만이 우리를 고양시킨다.
Uns treibt nicht Eroberungslust, uns beseelt der unbeugsame Wille, den Platz zu bewahren, auf den Gott uns gestellt hat.
Uns treibt nicht Eroberungslust, uns beseelt der unbeugsame Wille, den Platz zu bewahren, auf den Gott uns gestellt hat.
2.6. 해군력 증강
독일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제국이다. 독일은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세계적인 교역지역이고, 우리들은 그 구역을 계속 넓혀갈 것이다. 독일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전함을 가져야 한다.
거함거포주의에 심취해, 해군을 열심히 육성했다. 해군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을 기용하고 1898년에 함대법을 성립시켜 해군 육성에 대한 예산과 법적 지원을 확실하게 보장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초반에 프랑스 해군에 의해 독일의 해안선이 봉쇄당하여 장기전을 갔을 경우에는 오히려 독일 본토에 프랑스군이 상륙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1898년의 시점에서 독일을 가상 적국으로 삼은 것이 확실해진 러시아 발트 함대와 프랑스 대서양 함대를 모두 대응할 수 있는 해군의 육성은 정말로 필요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영국을 자극하여 양국간 건함 경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영해가 좁은 독일이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을 따라잡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영국도 지속적인 건함경쟁은 부담이 되었고, 1913년에 육군 장관이던 홀데인을 파견하여 서로 건함 경쟁을 중지하자는 제안까지 했다. 그런데 황제와 티르피츠 제독이 이걸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영국이 두 손을 든다!" 착각하고 무시한 것이 문제였다. 1914년 영국과 독일의 군함 총배수량의 비는 약 2.2:1이었다. 결국 영국 따라잡기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영국과 싸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비스마르크가 만들어 놓은 동맹 관계를 말아먹고는 '처음부터 그 놈들은 필요없었으니, 이 참에 영국과 새로 동맹을 맺자!'며 정책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해군 육성을 추진해서 오히려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애초에 해군 육성을 건의했던 티르피츠 제독의 의도부터가 영국으로부터 독일과의 자발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23]
국내에서는 군함 덕후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고대 로마도 해군으로 카르타고를 찍어눌렀고 영국도 해군으로 세계를 제패했으니만큼 안목 하나는 뛰어났다. 문제는 아무리 해군력을 키워봤자 제정이 폐지되기 직전까지 영국을 해군력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산업이나 예산 면에서 그럭저럭 독일이 영국과 겨뤄볼 수는 있어도, 프랑스-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육군 예산을 뺄 수는 없었다.
2.7. 7월 위기와 제1차 세계 대전
"여러분은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1914년 8월.
삼국 협상과 삼국 동맹의 긴장이 커지는 가운데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오헝 제국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1914년 8월.
7월 위기 당시, 빌헬름 2세는 7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특사인 알프레트 폰 호요스와의 대담에서 "독일 제국의 완벽한 후원을 믿어도 된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지금과 같은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 후 자신의 개인 요트를 타고 노르웨이로 연례 휴가를 떠났다.
빌헬름 2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은 전제군주제 국가인 러시아 제국이 세르비아 왕실 인사 살해범을 돕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진 않을 것[24]이며, 중유럽의 유일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자제시킨다면 최악의 경우 오스트리아가 동맹에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을 것이란 판단도 있었다.[25][26]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빌헬름 2세의 예상과 달리 즉각 참전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도 정작 제대로 도와준 적이 없어 이번에도 세르비아를 도와주지 못하면 발칸반도의 유일한 동맹국 세르비아마저 잃어 지중해로의 확장이 완전히 무산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의 발칸 진출에 제동을 걸었을 때부터 독러관계는 악화되고 있었고, 러시아는 독일에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게 빌헬름 2세는 무려 캐롤라인 제도에 있었던 막시밀리안 폰 슈페가 지휘하는 동방함대까지 전쟁으로 불러들였다.
개전 후에도 빌헬름 2세는 전시지도자의 면모가 부족했다는 평을 받는다. 최고사령관이자 제국 총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는 황제로서 승리에 눈먼 장군들을 제어하거나, 아니면 전쟁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일찍 종결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전쟁사학자 존 키건이 지적했듯이, 황제는 전쟁 매커니즘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특히 전쟁 후반기에 황제를 뒷방으로 몰아넣고 폭주하는 제국군의 실권자 노릇을 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과감히 내쳤어야 했지만 그러한 단호함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1918년 1월 루덴도르프는 황제에게 하극상을 범했는데, 러시아와의 강화협상에서 러시아 측에 적은 영토를 요구했다는 이유였다.[27] 이때 루덴도르프가 황제에게 폐위시키겠다고 대놓고 고함을 치는데도 빌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전쟁에서 빌헬름의 위치는 대외적인 것과는 다르게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루덴도르프만 그런게 아니었는데, 루덴도르프의 후임이었던 빌헬름 그뢰너도 이런 제안을 하였었다.
2.7.1. 빌헬름 2세의 육성
1914년 8월 6일 전쟁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이다.영어번역한국어번역1한국어번역2 실제 연설을 녹음한 것은 아니고 1917년에 당시 연설 대본을 읽는 빌헬름 2세의 육성을 녹음한 것이다.An das deutsche Volk
독일 민족에게 고함.[28]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e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제국 건국 이후 43년 동안 세계의 평화와 평화적인 우리들의 힘찬 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나와 나의 조상들의 뜨거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들의 업적 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Alle offenkundige und heimliche Feindschaft von Ost und West, von jenseits der See haben wir bisher ertragen im Bewußtsein unserer Verantwortung und Kraft. Nun aber will man uns demütigen. Man verlangt, daß wir mit verschränkten Armen zusehen, wie unsere Feinde sich zu tückischem Überfall rüsten, man will nicht dulden, daß wir in entschlossener Treue zu unserem Bundesgenossen stehen, der um sein Ansehen als Großmacht kämpft und mit dessen Erniedrigung auch unsere Macht und Ehre verloren ist.
우리들의 동과 서,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모든 잠재적이고 비밀스러운 적대 세력들은 현재까지 우리의 의무와 힘의 의식속에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 적들이 사악한 침략을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방관을 고대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싸울 그들은 동맹의 이익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여금 굴욕과 함께 힘과 명예를 잃도록 할 것이다.
Es muß denn das Schwert entscheiden. Mitten im Frieden überfällt uns der Feind. Darum auf! zu den Waffen! Jedes Schwanken, jedes Zögern wäre Verrat am Vaterlande.
그러므로 칼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적은 평화시에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라! 무장하라! 주저하고 마다하는 모든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일 뿐이다.
Um Sein oder Nichtsein unseres Reiches handelt es sich, das unsere Väter sich neu gründeten.
우리 아버지들이 세운 우리의 제국의 존속을 위해.
Um Sein oder Nichtsein deutscher Macht und deutschen Wesens.
독일인들의 힘과 독일인들의 생존을 위해.
Wir werden uns wehren bis zum letzten Hauch von Mann und Roß. Und wir werden diesen Kampf bestehen auch gegen eine Welt von Feinden. Noch nie ward Deutschland überwunden, wenn es einig war.
우리는 사람과 말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적들의 세계를 대항해 이겨낼 것이다. 하나였던 독일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Vorwärts mit Gott, der mit uns sein wird, wie er mit den Vätern war.
하느님과 함께 전진하라.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독일 민족에게 고함.[28]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elung zu fördern. Aber die Gegner neiden uns den Erfolg unserer Arbeit.
제국 건국 이후 43년 동안 세계의 평화와 평화적인 우리들의 힘찬 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나와 나의 조상들의 뜨거운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적들은 우리들의 업적 달성을 방해하고 있다.
Alle offenkundige und heimliche Feindschaft von Ost und West, von jenseits der See haben wir bisher ertragen im Bewußtsein unserer Verantwortung und Kraft. Nun aber will man uns demütigen. Man verlangt, daß wir mit verschränkten Armen zusehen, wie unsere Feinde sich zu tückischem Überfall rüsten, man will nicht dulden, daß wir in entschlossener Treue zu unserem Bundesgenossen stehen, der um sein Ansehen als Großmacht kämpft und mit dessen Erniedrigung auch unsere Macht und Ehre verloren ist.
우리들의 동과 서, 그리고 바다 건너에 있는 모든 잠재적이고 비밀스러운 적대 세력들은 현재까지 우리의 의무와 힘의 의식속에 건재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려 한다. 적들이 사악한 침략을 위해 스스로를 무장하면서 그들은 우리로 하여금 방관을 고대하고 있다. 강대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싸울 그들은 동맹의 이익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으로 하여금 굴욕과 함께 힘과 명예를 잃도록 할 것이다.
Es muß denn das Schwert entscheiden. Mitten im Frieden überfällt uns der Feind. Darum auf! zu den Waffen! Jedes Schwanken, jedes Zögern wäre Verrat am Vaterlande.
그러므로 칼날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적은 평화시에 우리를 침공할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라! 무장하라! 주저하고 마다하는 모든 이들은 조국의 배신자일 뿐이다.
Um Sein oder Nichtsein unseres Reiches handelt es sich, das unsere Väter sich neu gründeten.
우리 아버지들이 세운 우리의 제국의 존속을 위해.
Um Sein oder Nichtsein deutscher Macht und deutschen Wesens.
독일인들의 힘과 독일인들의 생존을 위해.
Wir werden uns wehren bis zum letzten Hauch von Mann und Roß. Und wir werden diesen Kampf bestehen auch gegen eine Welt von Feinden. Noch nie ward Deutschland überwunden, wenn es einig war.
우리는 사람과 말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우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적들의 세계를 대항해 이겨낼 것이다. 하나였던 독일은 패배한 적이 없었다.
Vorwärts mit Gott, der mit uns sein wird, wie er mit den Vätern war.
하느님과 함께 전진하라.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2.8. 퇴위와 말년
결국 전쟁 막바지 킬 군항 수병들의 킬 군항의 반란으로부터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인하여 퇴위하였다. 처음에 빌헬름 2세는 군대는 끝까지 황제를 지지하며, 그 힘으로 시위대를 진압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군대도 더 이상 황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하여 "명령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겠다던 깃발의 맹세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한 장교가 대답하기를..."폐하. 오늘날, 깃발의 맹세는 한낱 단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해외로 망명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를 망명지로 선택하였고, 네덜란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영국제 커피를 마시며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망명지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주 도른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이 급격히 멸망으로 치닫던 11월 초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건강했는지 네덜란드 망명 직후 인플루엔자에서 완치되었고 회복했다. 독감으로 앓았던 날짜는 대략 열흘(10일) 정도였다.
본래 승전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빌헬름 2세를 처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이후 정치 활동을 일절 금하겠다는 빌헬름 2세의 약속을 받아낸다. 사실 1차 대전의 근본 원인은 빌헬름 2세보다 막 나가는 각국 군부 및 정계, 여론의 책임이 더 크긴 했다. 게다가 19세기적 마인드가 아직도 팽배하던 시절 황제를 전범으로 처벌한다는 건 너무나 불경하고 생소한 개념이었다.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몰락한 이후에 재산을 거의 다 빼앗기고 국외로 도망쳐야 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나 오스만 제국의 오스만 황가와는 달리 빌헬름 2세와 독일의 호엔촐레른 황가는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을지는 언정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하는데 성공했다.
망명하며 가지고 나온 재산으로 빌헬름 2세는 위트레흐트 인근에 해자와 29개의 방이 딸린 도른 하우스(Haus Doorn)라는 대저택을 60만 휠더에 구입하여 말년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독일에 있는 자신의 옛 황궁에서 가구와 책, 제복, 그리고 값나가는 예술품, 유물들을 58대의 화물차에 실어 도른 하우스로 옮기고 50명의 시종들이 묵을 숙소로 건물을 한 동 더 짓는 등 네덜란드에서 23년 간을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다만 네덜란드에서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라서 빌헬름 2세는 집에서 반경 10km 이내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멀리 여행하려면 지방 정부 관리에게 사전 통지해야 했다. 하급관리에게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게 싫어서 빌헬름 2세는 어지간해서는 멀리 여행가지는 않았다.
1931년[29] | 1933년 |
장작 패는 빌헬름 2세와 손자들. 왼쪽이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오른쪽이 빌헬름 왕자다.
네덜란드 도른으로 망명한 이후 나무꾼으로 전직한 듯 저택 근처의 숲에서 취미로 나무를 베면서 지냈다. 나무 베는데 일가견이 있는지 살면서 나무를 총 4만 그루나 베어넘겼으며, 이웃들에게 장작을 나눠주기도 했다.
네덜란드 도른에서 손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빌헬름 폰 프로이센 왕자, 빌헬름 2세 본인,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몰수한다. 결국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를 돌려주고 본가로 쓸쓸히 돌아갔으며 1956년 도른 하우스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해서 오늘날에 이른다. 2019년 기준 54,000명의 관광객이 도른 하우스를 방문했다.
빌헬름 2세의 묘소도 여전히 도른 하우스에 있으며, 2014년에는 빌헬름 2세의 현손이자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네덜란드 정부에게 도른 하우스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현재의 도른 하우스. 도른 하우스 앞에 빌헬름 2세의 흉상이 있다.
독일 제국 멸망 이후 본인의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제정이 폐지되고 다음 해인 1919년에 첫째 여동생 샤를로테 공주가 사망했고, 1920년에는 6남이자 막내아들인 요아힘 왕자가 실의에 빠져 지내다가 어린 외아들 하나만 남겨놓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빌헬름 2세의 부인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막내아들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았는지 병세가 악화되어 1921년에 사망한다. 1923년에는 고모인 바덴 대공비 루이제가 세상을 떠났고, 1928년에 고종사촌형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2세가, 1930년에는 고종사촌 여동생인 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가 세상을 떠났고, 1929년에는 첫째 남동생 하인리히 왕자, 둘째 여동생 빅토리아 공주가 세상을 떠났고 1932년에는 셋째 여동생인 그리스의 소피아 왕태후가 세상을 떠났으며, 1940년에는 장손인 빌헬름 황태손이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한다.
그럼에도 빌헬름 2세는 꿋꿋하게 장수했으며, 특별한 건강 문제 없이 오래 살았다. 언젠가 제정이 복고될 거라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고,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장수 유전자도 물려받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셈. 참고로 같은 동맹국의 황제였던 카를 1세는 폐위 후 실의 속에서 살다가 단명했으며, 메흐메트 6세는 환갑은 넘겼으나 빌헬름보다는 훨씬 일찍 붕어했다.
3대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빌헬름 폰 프로이센 전 황태자, 빌헬름 2세 본인, 장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전 황태손.
빌헬름 2세와 둘째 손자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 원래는 루이 페르디난트의 형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이 다음 후계자였으나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루이 페르디난트가 후계자가 되었다.[30] 이후 루이 페르디난트는 러시아의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31]과 결혼했다.
1938년 둘째 손자이자 공군 소위였던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왕자와 키라 키릴로브나 여대공의 결혼식이 열렸다. 장손 빌헬름 왕자가 귀천상혼한 반면 루이 페르디난트의 결혼은 동등결혼이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마지막 경사였다.
1939년 빌헬름 2세의 80세 생일 잔치. 형제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마르가레테와 헤센카셀 가문과 고명딸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와 하노버 가문, 손자 루이 페르디난트가 있다.
루이 페르디난트의 코를 만지는 빌헬름 2세.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처럼 장수해서 증손까지 보았다. 빌헬름 2세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루이 페르디난트의 장남이자 장증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939년생)이다. 1년 뒤에는 루이 페르디난트의 차남인 미하엘(1940년생)이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32]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에도 생존한 상태였다. 제정복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나치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히틀러에게 비스마르크의 역할을 맡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1차 대전의 책임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를 고깝게 여겼다. 정확히는 패망에 대한 100% 책임이 아니라 유대인의 간계에 놀아난 책임 때문이었다. 군대도 융커 귀족과 통일 이전 왕국들의 왕족들 중심인 독일 제국군에서 평민층의 국민군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 나치당은 국가'사회주의'를 내세운 집단답게 이렇게 계몽주의의 근대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히틀러 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크게 남아 있던 제국의 흔적을 철저히 제거했으며 히틀러가 빌헬름 2세를 고깝게 여긴 것을 직감해 그도 점차 폭주해가는 나치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1932~1934년 사이 빌헬름 2세는 매우 열심히 나치와 협상했고 헤르만 괴링이 2번이나 직접 빌헬름 2세를 예방하여 제정복고는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아부하는 등 한때 호엔촐레른-나치 합작이 성사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양자의 의견 차이가 심각하여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빌헬름 2세는 히틀러, 괴링, 룀 등 나치당 고위부에 고급 가구, 예술품, 명마를 조공으로 바치면서 이들에게 열심히 제정복고 로비를 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은 군주제 지지자인 척 입바른 거짓말을 하면서도 국민들이 아직 황제를 증오하기 때문에 '전설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두어 국민들의 분노가 진정되기 전에는 제정복고가 어렵다고 차일피일 확답을 주길 미루었다.
결국 1934년 쯤에 빌헬름 2세는 나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게 되는데 최후의 협상에서는 유대인 문제로도 나치와 충돌했다. 빌헬름 2세의 대표인 폰 돔메스 장군은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히틀러가 거품을 물면서 유대인들을 모조리 쳐죽여야 한다고 날뛰는 것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호엔촐레른 가문과 빌헬름 2세도 대단한 박애주의자, 사해평등주의자는 아니었고 빌헬름 2세는 죽는 순간까지도 국제적 프리메이슨이 독일을 핍박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신봉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는 유대계 신민들을 절멸시키자는 발상에는 미쳤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폰 돔메스 장군은 빌헬름 2세의 발언을 인용하며 군주는 모든 신민들을 하나로 결집할 의무가 있으며 유대인을 배제한다면 유대계 신민들의 공헌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을 했지만 히틀러는 콧방귀도 끼지 않고 호엔촐레른이 유대인들과의 피의 성전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 때문에 1930년에 열렬한 나치 지지자로 나중에 SA에 들어가는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호적에서 파버리며 외인 취급했다. 그외에 역시 나치와의 회동을 주저하지 않았던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는 자신이 나폴레옹 3세처럼 대통령이 된 다음에 제정복고를 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빌헬름 2세는 대통령은 공화국에 대한 충성서약을 해야 하는데, 지가 한 서약을 깨버리는 것만큼 비신사적인 행위가 어딨냐면서 대통령 출마하는 순간 호적에서 파고 상속에서 제외시켜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려 그의 출마를 저지시켰다.[33] 그렇다고 독일 황가에서 나치의 지지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매제인 헤센카셀 가문이나 빌헬름 2세의 둘째 부인 등은 나치를 열렬히 지지했다고 한다. 카이저는 1934년 왕당파 조직들이 해산되자 격노를 토로하면서 히틀러가 호엔촐레른 왕가에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날뛰었고, 1938년 수정의 밤 사건이 터지자 나치빠로 악명높았던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빌헬름 2세 앞에서 유대인놈들 잘 죽이고 있다고 헛소리를 나불댔는데, 격노한 빌헬름 2세는 아들을 질책하면서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깡패들의 난동으로 비난해야 한다고 했으며, 11월 13일, 영국의 메리 왕대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의 행패가 볼셰비즘 그 자체라고 몸서리쳤다.
하지만 히틀러의 유럽 정복이 성공을 거두면서 빌헬름 2세는 열렬한 히틀러빠가 되기 시작한다. 폴란드 침공 이후 그는 히틀러가 완벽한 프로이센 정신의 구현이며, 블뤼허, 클라우제비츠, 그나이제우처럼 싸운다고 칭송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점령당하자 빌헬름 2세는 이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열었으며 독일군이 베네룩스 3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조지 6세는 빌헬름 2세에게 영국 망명을 권유하지만 빌헬름 2세는 처칠놈과 같이 사진에 찍히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겠다고 거부했다. 이후 네덜란드를 정복한 독일군이 그의 거처에 나타나자 빌헬름 2세는 기쁨에 미쳐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 되었고, 프랑스 함락 이후에 그의 기쁨은 절정에 이르렀다. 독일군은 히틀러가 빌헬름 2세에게 보내는 친전을 전달하면서 도른 하우스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빌헬름 2세를 경호하기 시작했고 헤르미네 로이스는 빌헬름 2세가 그 순간 30년은 더 젊어 보였다고 기록했다. 히틀러는 빌헬름 2세에게 이제 독일로 돌아와서 원하는 곳 어디에서든지 살 것을 권유했지만 빌헬름 2세는 히틀러의 제안에 몹시 기뻐하면서도 거절했다. 헤르미네는 지금까지 어떤 독일의 당국자도 빌헬름 2세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는데 총통의 태도는 감격스럽게 그지 없다고 기록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썰도 있지만 서섹스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욘 뢸의 빌헬름 2세 평전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이때 빌헬름 2세가 "처음으로 독일인인 것이 부끄러워졌다."라고 했다는 썰이 있는데 이는 프랑스 침공을 보고 한 말이 아니라 수정의 밤 사건을 보고 한 말이다. 빌헬름 2세는 만약 자신이 영국에 갔다면 자신을 '핍박했던' 빌헬미나 여왕과 영국에서 마주했어야 하게 됐을 것이라면서 만약 그렇게 됐으면 그만한 촌극도 없을 것이라고 낄낄댔다.
덩케르크 전투 이후 빌헬름 2세는 또 다시 매우 기뻐했으며 파리가 함락되자 히틀러에게 축전을 보냈다.
프랑스의 항복에서 느껴지는 깊은 감동과 인상 속에서 나는 그대와 모든 독일군에게 신께서 주신 엄청난 승리를 빌헬름 1세께옵서 위대한 1870년에 남기신 말을 인용하여 축하하고자 하오. "신의 보우하심으로 이 얼마나 엄청난 성취인가!" 모든 독일인들의 심중은 로이텐 전투의 승자들이 불렀던 그 합창이, 위대한 왕의 병사들이 불렀던 그 노래로 가득하오. 우린 이제 우리의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오!"
히틀러는 한때는 상병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카이저마저 굽실거린다는 부분에서 기쁨을 느꼈으나 동시에 1차대전의 패전의 주역인 그가 뻔뻔스럽게 왕정복고를 요청하는 부분에서 분노를 느끼며 수행원인 하인츠 링에에게 빌헬름 2세를 멍청이라고 욕했다. 빌헬름 2세를 욕한 것과 별개로, 히틀러는 빌헬름 2세한테 '신중하게 작성한' 답전을 보냈다. 하지만 그 전보 내용이 현재 남아있지는 않다.
또한 카이저는 이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합중국이 일어서게 될 것이며 유러피안 먼로주의가 선포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집센 영국도 이에 협력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처칠이 최후까지 항전할 것이라고 선포하자 빌헬름 2세는 저주를 퍼부으며 유대인들과 프리메이슨이 처칠과 버킹엄 궁을 조종하고 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호엔촐레른 황가가 헤롱대는 것과 별개로 나치는 빌헬름 2세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국론 결집 및 왕당파의 지지 확보를 위해 그에게 독일로 귀국할 것을 요청했고 그가 죽은 다음엔 독일에 매장되길 바랐다. 실제로 이들 왕당파 상당수가 막나가는 나치에 질려 나중에 히틀러 암살 및 나치당 전복 음모에 가담한다. 발키리 작전을 활용하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주도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나 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인 육군 소장 한스 오스터 장군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키려 한 오스터 음모사건 등이 있다.
2.9. 사망
1941년 6월 4일,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에서 자신이 끝내 꺾지 못한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최후의 전성기 모습을 보면서 향년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빌헬름 2세는 독일이 제정 복고가 될 때까지 독일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네덜란드에 있는 그의 저택 정원에 마련한 영묘(가옥형 묘소)에 안장된다. 이후 독일이 완전한 공화국이 되면서 현재까지도 네덜란드에 묻혀 있다. 그는 말년까지 자신이 가문의 최대 수치이자 프로이센과 독일의 수치라고 생각했다. 나치 독일 정부는 제3제국의 정통성, 계승성 등을 고려하여 장례식에 독일 국방군 육해공군의 장교들과 의장대를 지원해 주었다. 왕당파 인물들 또한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시절의 공무원 및 군인의 예복을 착용하고 참석했다. 네덜란드 판무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막켄젠 육군 원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대장 등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빌헬름 2세의 장례식 동영상.
그 후 나치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언론에 다음과 같은 보도지침을 내렸다.
빌헬름 2세는 패배한 체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가 최선을 다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이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의도가 아니라 성공적인 결과다.
빌헬름 2세의 묘소.
3. 대외관계
3.1. 영국
1908년, 독일 제국 베를린을 방문한 외삼촌 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 | 1913년, 독일 제국군 제복을 입은 사촌 조지 5세(우측)와 영국군 제복을 입은 빌헬름 2세. |
1906년, 윈스턴 처칠(우측)과 함께 촬영한 사진. |
그가 추진했던 정책은 분명 반영적인 것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영국을 좋아했다. 본인도 영어가 유창해서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영어로 했으며, 가끔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낸 적도 있다. 심지어 퇴위 후 망명할 때에도 망명지에 도착하자마자 '좋은 영국 차 한 잔 부탁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전쟁 직전까지도 종종 영국에서 선물한 해군 원수의 예복을 "넬슨 제독의 옷"이라며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기도 했다. 그의 영국 사랑은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계속되어, 독일을 베네룩스와의 전쟁으로 인도하고도 그 때문에 영국이 프랑스와 힘을 합칠 것이 확실해 보이자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 小 몰트케 장군을 불러 갑자기 침공 중단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중단을 명한 바로 이 시점에 슐리펜 계획에 따라서 독일 육군은 이미 룩셈부르크에 진입하고 있었고, 상황을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정작 한 영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국민들은 반영(反英)적이지만, 나는 친영(親英)적"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독일 사람들 반응은 안 좋았다. 스스로 그렇게 친영(親英)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작 본인은 영국 국왕이였던 에드워드 7세를 상대로 공식석상에서 그를 사탄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다름아닌 빌헬름 2세의 외삼촌[34]이었다. 빌헬름 2세가 자신을 독실한 기독교도라고 생각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자를 기독교의 적이라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을 생각하면, 빌헬름 2세가 당시 영국의 대독일 고립 정책과 그에 협조하는 영국의 동맹국 및 우호국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영국의 친척들과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승하할 때 유럽 전역의 손자들 중에서 임종을 지킨 외국 손자는 빌헬름 2세가 유일했으며, 그는 영국 체류 동안 영국 왕족들에게 겸손하고 훌륭한 태도로 칭송을 받았다. 퇴위 당한 후에도 빌헬름 2세는 테크의 메리를 비롯한 영국 왕족들까지 끝까지 서신 교환을 유지했으며 사탄 드립을 날린 에드워드 7세도 빌헬름 2세를 매우 좋아했다. 1938년 뮌헨 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메리 왕대비에게 편지를 보내서 독일과 영국이 또 다시 미친 전쟁을 피하게 되었다고 기쁨이 넘쳤다. 당시 체임벌린 수상이 필히 주님이 기름 부어 인도하신 자가 틀림없다고 칭송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3.2. 프랑스
프랑스와는 그 이전부터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빌헬름 2세의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 시절 프랑스 제국을 무너트리고 독일 제국을 건국했던 만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한편 1907년에는 프랑스의 마지막 황후였던 외제니 드 몽티조와 만난적이 있다.
프랑스의 마지막 왕조인 보나파르트 가문와의 악연은 빌헬름 2세의 증조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부터 시작됐는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프랑스 제1제국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은 13일만에 수도인 베를린이 털리고 왕실이 도피하다가 항복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인조마냥 굴욕을 당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왕비였던 루이제 왕비는 온갖 고생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후 60년 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 제2제국과 보나파르트 가문를 무너뜨리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이때 외제니 황후가 빌헬름 1세에게 남편인 나폴레옹 3세를 사면시켜달라고 펀지를 썼지만 옛날 일을 잊지 않은 빌헬름 1세는 거절하고 모욕적인 편지를 보냈다.
외제니 황후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다가 1918년 빌헬름 1세의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퇴위당하고 네덜란드로 도망가자 그대로 돌려보내줬다.
3.3. 러시아 제국
[35]
알렉산드르 3세와 빌헬름 2세. 서로 육촌[36] 관계다.
러시아 제국군 제복을 입은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군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 2세. 두 사람은 프로이센 왕실 기준으로는 7촌, 러시아 황실 기준으로는 8촌이다.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헤센의 알렉산드라의 남편이기도 하다.
빌헬름 2세 즉위 이전부터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서로 대치하는 관계가 되었다. 다만 개인적인 사이는 아주 나쁘지 않았는지 1차대전 발발 직전까지 편지와 전보를 자주 주고 받았다고 한다.
3.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빌헬름 2세와 악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빌헬름 황태손,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카를 1세, 오토 폰 합스부르크.
1차 대전에서 운명을 함께한 동맹국이다. 같은 독일계 게르만족 국가이기도 했고 독일 통일 당시에는 서로 전쟁을 했지만 곧 화해하고 잘 지냈다. 다만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나라라고 탐탁지 않아했지만 그래도 독일과 오스트리아 둘 중 하나가 무너져서 망하면 한 쪽도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거나 다를 바 없었기에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는 계속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 하면서 전쟁이 시작됐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냅다 말려들면서 둘 다 동맹국으로서 협상국에서 맞서 싸웠으며 결국 패배하고 양국 모두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루돌프 황태자와 나이는 비슷하지만 루돌프가 1살 많다. 친불파인 루돌프는 반프랑스 성향의 빌헬름 2세를 극혐해 공석에서만 어울렸고 빌헬름도 루돌프를 고까워 해서 서로에게 굴욕 선사 배틀을 즐겼다. 루돌프가 빌헬름을 만나러 가기 전 "징글징글하다"고 쓴 편지도 있다고 한다. 루돌프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와 친했는데 빌헬름은 자기 외삼촌에게도 있는대로 개겨서 에드워드 7세도 루돌프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이렇듯 서로 사이가 안 좋은데다 루돌프가 친불파에 자유주의자인게 거슬려서 빌헬름 2세도 루돌프 사후 암살설의 배후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되기도 했다.
빌헬름 2세와 루돌프 황태자는 비슷한 듯 하면서도 상반된 인생을 사는 등 두 인물의 비교되는 지점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3.5. 이탈리아 왕국
빌헬름 2세는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작은 키(153cm)를 놀리는 것을 좋아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독일을 방문하자 빌헬름 2세는 일부러 체격이 큰 장병들을 선별해서 의장대를 구성해 방문 행사에 동원했다. 그러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작은 키가 더욱 돋보였다.3.6.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37]이 독일 제국을 방문해 빌헬름 2세를 만났을 때, 여왕을 작은 나라의 풋내기로 깔본 빌헬름 2세는 "내 병사들 키는 7피트인데 당신의 키는 그들의 어깨밖에 안 되는군."이라고 빈정대었다. 그러자 여왕은 "그 말이 맞네요. 근데 우리가 제방을 열면 10피트 깊이로 잠길 겁니다!"라고 미소지으며 맞받아쳤다.[38]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협상국이 독일을 봉쇄할 때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도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퇴위당한 빌헬름 2세의 망명을 받아주고 그를 인계하라는 협상국의 요구를 물리치는 대인배적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빌헬름 2세와 빌헬미나 여왕의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 도른 하우스에 거주할 때 빌헬름 2세와 만난 적은 없으며, 1938년 빌헬름 2세의 차손인 루이 페르디난트의 결혼식에도 딸인 율리아나를 보냈지만 본인은 가지 않았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이 나치 독일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일부 왕자들이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에 가담하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5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네덜란드 정부에서 몰수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쫒겨난다.
3.7. 미국
미국과는 접점이 별로 없어서 두 나라 모두 서로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당시 미국은 그때까지도 식민지 시기에 대한 악연 때문에 영국과 사이가 가장 안좋았고, 미국 독립전쟁 당시 앙숙인 영국과 싸우던 미국을 적극 지원한 프랑스와는 사이가 꽤 좋았다. 반면, 독일은 이주민들이 많이 유입되기는 했지만 19세기 후반에서야 통일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접점이 없는 소 닭 보듯하는 관계였다.[39]빌헬름 2세의 전기 작가 요아힘 폰 퀴렌베르크의 증언에 따르면 미국을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을 광부, 노동자, 메이드로나 보내 버릴 머나먼 미지의 땅'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빌헬름 2세 뿐 아니라 다른 유럽국가들의 정치인과 군주들도 아직 열강 후발주자였던 미국을 그렇게 생각했다.[40]
다만 20세기 초반 미국의 동부해안에 눈을 돌려 미국을 침공하려는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미국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빌헬름은 계획을 연기시켰다.관련 위키백과 문서
3.8. 일본 제국
메이지 유신 당시 영국이 적극 지지해줬고, 영일동맹을 맺는 등 일본과 영국이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일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영일동맹을 명목으로 독일이 보유한 칭다오를 일본군이 무력으로 점령했다.3.9. 대한제국
독일 제국과 대한제국은 서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빌헬름 2세는 고종 황제와 밀서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빌헬름 2세는 고종이 일본 제국에게 병합되기 직전의 대한제국 상태를 세계 각국에 호소했을 당시에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 즉 "한국의 황제"라고 부르면서 열강 지도자 중에선 거의 유일하게 동등한 지도자로 보고 예의를 표했고, 1902년 고종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빌헬름 2세가 고종의 서한에 반응을 보인 이유는 당시 영일동맹을 포함해서 영국이 세계 열강과 맺은 군사 동맹이 궁극적으로는 독일을 포위하여 고사시키려는 거대한 음모로 보았기 때문이다.[41] 하지만 독일이 초강대국이였다면 몰라도 당장 제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실직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42] 그나마 보낸 편지도 중간에 일본 측이 가로채는 등 조직적으로 훼방을 놓았다.4. 개인사
4.1. 왼팔 콤플렉스
왼쪽 팔을 거의 못 썼다고 한다. 역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태어날 때 왼쪽 팔이 어머니의 자궁에 걸려서 신경을 다친 바람에 왼쪽 팔이 상대적으로 15cm나 짧았고, 그것에 컴플렉스를 가진 그는 항상 흰 장갑으로 왼쪽 팔이 짧은 걸 감췄다고 한다. 게다가 빌헬름 2세는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왼팔이 저러니 스트레스도 심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왼팔을 부끄러워하면서 감추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사진을 찍을 때 항상 살짝 왼쪽에 치우쳐서 찍거나, 무언가를 왼손으로 들거나, 왼손을 주머니에 넣는 행위를 해서 왼팔을 똑바로 펴는 사진이 없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을 때도 왼팔을 주머니에 넣어서 감췄으며 아래의 나무 옮기는 영상을 봐도 왼팔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다.4.2. 건강
빌헬름 2세는 사실 왼쪽 팔 한 짝만 문제가 있었지, 나머지는 모두 멀쩡했으며, 건강도 매우 좋았다. 스페인 독감에 걸렸을 때도 금방 완치되었으며, 형제 자매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43] 심지어 사촌 동생인 조지 5세보다도 장수해서 조지 5세가 먼저 죽었다.근력과 지구력 또한 굉장했으며 노년에도 덩치가 크고 건장하여 웬만한 20대 청년만큼 거대하고 근육질이였다.
키는 174cm로 180cm인 할아버지, 아버지, 장남보다 작지만 당시 독일인 남성의 평균키인 170cm보다 컸다.
정력도 좋은지 아내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무려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손주들 중에서 아들수로는 공동 1등으로, 막내여동생 헤센카셀 백작부인 마르가레테도 큰오빠처럼 슬하에 6남을 두었다. 공동 2등은 슬하에 5남을 낳은 외사촌 조지 5세와 이종사촌 바텐베루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였다.
슬하에 6남 1녀라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외사촌 조지 5세도 아들 부자로 유명했지만 사실 진짜 아들 부자 끝판왕은 빌헬름 2세다.[44] 덕분에 호엔촐레른 가문은 지금도 빌헬름 2세의 직계 후손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엄청나게 번성했다. 마지막 군주의 직계가 끊겨서 방계 후손이 수장을 이어받은 보나파르트 왕조, 로마노프 왕조, 사보이아 왕조와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4.3. 성적 취향
마조히스트였다. 창녀에게 돈을 주고 비단 스타킹으로 자신을 묶고 가죽 채찍으로 때릴 것을 요구했다. 이런 성적 취향은 어린 시절에 팔의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전기 치료를 받았을 때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중엔 군사대신인 디트리히 폰 휠센하젤러(Dietrich von Hülsen-Haeseler)에게 핑크색의 여성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추게 했으며 휠센하젤러는 결국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딱히 그를 모욕하려고 한 건 아닌 게, 당시에는 파티의 여흥으로 귀족이나 고관 혹은 파티의 주최자 등이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깜짝 등장하여 사람들을 재밌게 해주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그때는 휠센하젤러가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이다. 다만 휠센하젤러가 갑자기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히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양성애 성향도 다분해서 가까운 양성애 친구들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해 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이 낳은 자식이 무려 7명이라는 사실이었다.[45][46] 독일의 오일렌부르크 스캔들이라고 스캔들에서 오일렌부르크 후작이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렸을 때 황제도 그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자세한 내막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47]
4.4. 허세와 나무꾼 카이저
겉으로는 강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매우 소심하고 유약한 성격이어서[48] 군인들과 어울려 호령하고 그들에게 망신을 주는 걸 즐겼다고 한다.쎈 척의 가장 최고봉은 황태자 시절에 일어났는데, 서부식 공연으로 유명했던 '버팔로 빌 쇼'의 여성 멤버 애니 오클리[49]는 입에 물린 시가를 정확히 권총으로 맞출 수 있었던 걸로 이름 높았는데, 빌헬름 2세는 여기에 자진해서 나갔다. 오클리는 훗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한 번 시가를 물어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며 황제는 당연히 무시했다.
특유의 허세와 과도한 독일 우월주의는 외교적 결례로도 작용했는데 독일은 세계에서 최고로 강력하다는 것을 과시하면서 같은 유럽 열강들도 무시하는 일이 잦았다. 자존심은 세워질지 몰라도 이런 태도는 다른 나라들의 반감을 샀다. 그러나 당장 널 없애버리겠다며 분노해도 막상 상황이 본인이 말한대로 돌아가면 의기소침해져서 다른 각료들에게 맡기거나 회유책을 제시했고, 심지어 회피하기도 했다.
당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에게 만약 벨기에가 우리 독일 편을 들어 전쟁에 협력한다면 북프랑스와 부르고뉴 왕위를 돌려주겠다는 대단히 옛스러운 허세성 제안을 하였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략을 고려하여 대대적으로 침공하겠다고 협박하였다.[50] 반면, 프랑스에는 '독일의 영토가 너무 작아서 독일인이 넘쳐나는데 국경을 서쪽으로 조금 옮겨줄 수는 없겠소?'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마초 정신의 일환으로 벌목[51]도 자주 하였다. 허세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다른 허세성 취미와 다르게 제대로 즐겼다. 벌목에 굉장한 소질을 보여 네덜란드로 망명한 이후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하루 네 그루 이상의 나무[52]를 베었다. 베는 손맛, 소위 타격감이 좋은 독일 최고의 참나무만을 골라서 베었고 일평생 최소 4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그의 도끼로 베어 넘겼다. 팔 상태가 안 좋음에도 불구한 실로 굉장한 기록[53]이었고, 네덜란드 정부에서 적당히 하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그리고 목공예에도 큰 소질을 보여 망명지에서 자신이 베어넘긴 나무로 예쁜 가구를 만들어 가족들에게 선물하였다.
4.5. 황화론
청일전쟁 말기에 앞으로 청나라와 일본제국을 위시한 황인종이 서구의 백인(白人) 사회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황화론(黃禍論)을 펴기도 했다.그러나 황화론은 다분히 영국을 견제하고 독일이 팽창하기 위함이었다는 분석 역시 존재한다. 급속도로 발전한 동방의 일본 제국을 주적으로 삼고, 이를 통해 주요 유럽 국가 중 러시아 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동방에 있는 독일이 국력을 키워 튜튼 기사단의 전례와 같이 동방의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고, 독일을 견제하고자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동양에 힘을 실어준 영국을 매도했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의 고종이 을사조약 이후에 서구 열강의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당시 열강 중 사실상 유일하게 '카이저 폰 코레아(Kaiser von Korea)'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공감을 표현한 것도 황화론과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같은 개념.
이 황화론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도 알려져 있었으며 동아일보에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이를 기자들이 대답하는 것을 연재한 '응접실(應接室)'이란 코너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5. 독일에서의 평가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갈등을 빚다 그를 강제로 쫓아낸 점, 또한 외교의 실패로 인해 독일을 고립시켰고 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그로 인해 독일을 폭삭 망하게 하고 이 때문에 히틀러가 나올 여건도 만들었다는 점 등이 그의 부정적 평가에 한 몫 하고 있다.[54]6.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빌헬름 2세와 형제자매들.[55]
할아버지 빌헬름 1세,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아들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와 함께 4대가 찍은 사진. 그리고 독일 제국의 모든 황제와 황태자가 다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사랑했던 맏이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공주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예뻐하였다. 빌헬름 왕자가 17세가 되던 해에 생일 선물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을 선물로 주었을 정도이다. 친척들 사이의 애칭은 빌리(Willy).[56] 특히 전쟁 직전에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개인적인 전보문을 보냈는데, 여기서는 끝날 때마다 "사랑하는 윌리가"라고 썼다. 니콜라이는 "사랑하는 니키가".
친조부모가 양육해서, 자유주의적이었던 부모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졌다. 그리고 어머니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안 좋았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재위 99일 만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곧바로 제위를 이어받았다. 이 탓에 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이 다수며, 빌헬름 1세의 아들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재위 초기의 행보만 놓고 보면 아버지 수준은 아니더라도 꽤나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족간의 관계는 친조부모 빌헬름 1세, 아우구스타 황후와 가까워서 잘 따랐고, 부모 프리드리히 3세, 빅토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형제자매들과는 나이 차에 따라 다른데 첫째 여동생 샤를로테와 남동생 하인리히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그 뒤에 태어난 여동생들인 빅토리아, 조피, 마르가레테와는 사이가 멀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으며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사이에서 슬하 6남 1녀를 두었다. 빌헬름 2세는 아들들한테는 엄격했지만 고명딸인 빅토리아 루이제는 매우 예뻐했다.
6.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빌헬름 2세 (Kaiser Wilhelm II.) | 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빌헬름 1세 (Kaiser Wilhelm I.)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König Friedrich Wilhelm III. von Preußen)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루이제 여공작 (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 공녀 (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Großherzog Karl Friedrich von Sachsen-Weimar-Eisenach) | |||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жна Мария Павловна)[57] | |||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 (Victoria, Princess Royal) |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z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Herzog Ernst I. von Sachsen-Coburg-Saalfeld) |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Luise, Prinzessin von Sachsen-Gotha-Altenburg) | |||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58] |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Victoire von Sachsen-Coburg-Saalfeld) |
6.2. 자녀
모두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소생이며, 독일 제국이 몰락한 이후 빌헬름 2세의 자손들은 기존의 성씨 대신 프로이센(von Preußen)을 성씨로 사용하였다.<rowcolor=#222,#FFF>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빌헬름 황태자 (Kronprinz Wilhelm) | 1882년 5월 6일 | 1951년 7월 20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체칠리에 여공작[59] 슬하 4남 2녀[60] |
2남 | 아이텔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Prinz Eitel Friedrich von Preußen) | 1883년 7월 7일 | 1942년 12월 8일 | 올덴부르크의 조피 샤를로테 여공작 |
3남 | 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 (Prinz Adalbert von Preußen) | 1884년 7월 14일 | 1948년 9월 22일 |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61] 슬하 1남 1녀 |
4남 |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프로이센 (Prinz August Wilhelm von Preußen) | 1887년 1월 29일 | 1949년 3월 25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공녀[62] 슬하 1남 |
5남 | 오스카 폰 프로이센 (Prinz Oskar von Preußen) | 1888년 7월 27일 | 1958년 1월 27일 | 이나 마리 폰 바스비츠 여백작 슬하 3남 1녀 |
6남 | 요아힘 폰 프로이센 (Prinz Joachim von Preußen) | 1890년 12월 17일 | 1920년 7월 18일 | 안할트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슬하 1남[63] |
1녀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 (Prinzessin Viktoria Luise, Herzogin von Braunschweig) | 1892년 9월 13일 | 1980년 12월 11일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스[64] 슬하 4남 1녀[65] |
7. 여담
-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7촌이자 사촌매제인 니콜라이 2세[66]와 프랑스를 상징하는 마리안(이 시절에도 이미 공화정이었기 때문), 일본을 상징하는 사무라이[67]와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만 청나라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데다가 땅도 더럽게 넒어서 아쉽게도 폴란드처럼 못 갈라 먹었다.
- 빌헬름 2세 시기에 독일이 청나라의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는 독일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점령이 남긴 영향은 칭따오 맥주의 탄생 정도였다. 정작 이 칭다오 공격은 러시아 강경파를 자극하여 러시아가 청나라의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독일의 전철같이 열강들 사이에서 고립되었고,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러시아는 일본과의 협상에서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아돌프 히틀러도 하지 못한 러시아 정벌을 성공한 황제이다. 1918년 3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독일에게 막대한 양의 물자와 영토를 바쳤다. 표면상으로는 휴전이었지만 명백한 항복이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밀려 항복하는 바람에 의미가 없어졌다. 독일 제국이 항복하자 볼셰비키들은 조약을 파기해 버리고 영토 회복에 나섰지만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던 붉은 군대는 신생국인 폴란드에게도 지는 추태를 보여 결국 잃어버린 영토를 모두 회복하지 못했다.
- 1938년, 아돌프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요구로 녹색 작전이 실행되면 방첩국 국장보 한스 오스터 소장이 히틀러를 축출하고 빌헬름 2세를 복위시킨다는 오스터 음모사건이 계획된 적이 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 협정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불발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항목
-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인데 빅토리아 여왕이 남긴 자녀가 워낙 많다 보니, 빌헬름 2세의 사촌들이 빌헬름 2세의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어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빌헬름 2세의 외사촌 중 한 명인 스웨덴 왕세자비 마거릿은 빌헬름 황태자(1882년생)와 동갑이고, 또 다른 외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두 살 어리며(1884년생), 이종사촌인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는 빌헬름 황태자보다 다섯 살 어리다.(1887년생) 하지만 빌헬름 2세의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터울이 짧은 편이라 자식이 7명이나 되는데도 나이차가 그리 큰 편은 아닌데, 막내인 프로이센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68]는 장남 빌헬름 황태자와 나이가 10살 차이가 난다.
- 자동차에 대해서는 탐탁지 않게 여긴 모양이다. 일시적인 유행 정도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 1895년 티어가르텐에 '승전로'(Siegesallee)를 만들어 호엔촐레른 가문 조상들과 아스카니아 가문-비텔스바흐 가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선제후들의 동상을 세워 국고를 탕진한 적이 있었다. 황실과 독일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겠다는 목표로 수행한 야심찬 프로젝트였지만 정작 베를린 시민들은 조소로 응답했다고 한다. 승전로의 동상들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존하는 동상은 현재 슈판다우구에 있는 슈판다우 성채(Zitadelle Spandau)에서 보관하고 있다.[70]
8. 대중매체
8.1. 소설
- 셜록 홈즈 시리즈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의 단편작 가운데 하나인 두 번째 얼룩에서, 영국의 대외 정책에 불만을 품고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서신을 보냈다가 뒤늦게 후회한 '해외의 어떤 왕'이 바로 빌헬름 2세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도 후보에 올라 있다. 다만 사건의 연대와 실제 역사를 비교해 보면 알렉산드르 3세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아예 직접 출현. <813>에서는 '위엄만 있는 좀팽이 황제'로, <포탄 파편>에선 허세쩔고 못된 야심이 넘치는 딱 독재자의 그 모습으로 묘사된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
네델란드에 망명해 있는 상태이며 망명하면서 빼돌린 재산으로 부유하게 생활하면서 권위적 면모를 유지하며 자신 대신 제위에 오른 아들 빌헬름 3세를 비판한다.
그러나 죽기 전에 개심하여 자신을 호엔촐레른 왕조의 실패작이라며 항상 숨기던 왼손으로 주인공 디트리히 샤흐트의 손을 잡으면서 위대한 독일을 바로잡고 싶었다며 울먹인다. 그리고 주인공이 빌헬름 3세의 즉위 여부와 독일 민주 정부 인정 여부를 묻자 인정한다고 말한다. 그 후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다.
- 대통령 각하 만세
초반에는 고종을 지지하여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을 적대, 이후 황화론에 따라 일본 견제를 위해 지지하다가 대한민국이 성장하자 한국을 적대하는 일관성 없는 외교 정책을 펼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제1차 세계 대전의 승리자로 원하는 대로 레벤스라움을 얻고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본인의 처참한 외교적 안목과 융커들에게 휘말려서 오히려 더 불행해진다. 그래도 독일이 위기에 처하자 독일을 구원하기 위해 융커와 싸우고, 총신인 얄마르 샤흐트와 독일 사민당을 끌어들이는 등의 노력을 한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융커들의 방해로 자신의 유일한 총신인 얄마르 샤흐트가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것을 눈물을 흘리면서 지켜보고 결국 제국주의 모순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소련군에게 공격당해 독일 제국의 멸망을 원래 역사보다 더 암울하게 지켜본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지만 다음 화에서 영국이 공산혁명으로 망하는 것을 보면 좋은 꼴은 못 봤을 듯하다.
- 카이저를 구했다
꿈속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를 만나 황인종인 주인공이 자신과 제국을 구할 것이란 말을 듣는다. 처음엔 원조 황화론자답게 황당해하다가 진짜로 주인공이 나타나 자신을 구하자, 아버지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주인공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 이후 원 역사와 다르게 어머니와도 화해하고, 주인공과 딸 사이에 태어난 손녀도 이뻐해주면서 나름 잘 지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며 자리를 지킨다.
- 히틀러가 되었다
초반에 패색이 짙어지자 원 역사대로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이후 왕정복고를 원하면서도 히틀러와 독일인들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하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설득을 듣고 고민하지만 슈타우펜베르크가 암살당하고 경호원들이 모두 무장친위대로 교체되면서 사실상 감금 상태에 놓여 왕정복고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사실만 자각하게 된다. 이후 원 역사대로 1941년에 사망하였다고 언급된다.
-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
주인공 아르민 로젠바움의 비행기 제작 사업을 무시하고 있다가[71] 성공하니 숟가락을 얹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줘서 주인공 아르민의 조력자가 되어준다. 비스마르크와 어머니에 눌려 자존감이 부족하고 생전에 아부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나름 불쌍한 인물이자 불가리아 차르의 엉덩이를 때리는 답이 없는 카이저로 등장했다.[72]
1차 대전 중반부터 실권을 잃고 허수아비로 전락했으며 아르민을 통해 비밀리에 종전 협상을 하려 했으나 결국 폐위당한다. 역사의 변화로 우드로 윌슨이 자신을 전범으로 처리해야한다고 하자 루이 16세 마냥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환상을 볼 정도로 카이저 자리고 뭐고 전전긍긍하는 상태가 된다.
- 화약고 제국의 천재 대공
원 역사와 달리 동맹국의 승전으로 황제 자릴 지켰고,연합국의 식민지를 빼앗아 독일을 강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배상금을 명목으로 파리 독일군대 진주,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군의 현대화 외면,대공황 때 폐쇄정책으로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쇠락조짐을 보이더니 결정적으로 아시아 식민지를 두고 일본과의 해상전 참패를 당하는 소식을 듣고 기절해버렸다. 이후 인도독립군에게마저도 패배하자 민심수습을 위해 퇴위를 해버렸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초라하게 자리에서 물러나버렸다.
8.2. 영화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2021년 말에 개봉한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도 등장했다. 배우는 톰 홀랜더.[73]
진지 일색인 사촌에 비해 상당히 유쾌한 성격이나, 실상은 신체적 장애에 대한 열등감과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로 점철된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정치인이나 군인도 아닌 에릭[74]이 이를 상기시키며 전쟁을 부추기자, 바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이후 에릭 얀 하누센의 말을 따라 치머만 전보를 보내는 등. 그의 손에 완전히 놀아나다가, 그대로 배신당하고 강제 폐위된다.
- 레드바론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레드바론>에서 등장한다. 첫 등장에서는 나름대로의 덕담을 하는 인자한 군주로 보이나, 다음에 나올 때는 자기 병사들이 죽어가는데도 옆의 장성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는 본성을 드러낸다.
- 스파이 전쟁
2017년 작 영화 <The Exception>[75]에서는 영화로써는 특이하게 말년의 그를 등장시킨다. 나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황제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합리화하는데 열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76] 그러나 자신의 복위를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나치의 본심과 실체를 깨닫고[77], 개심하여 자신의 집에 숨어든 영국 스파이가 탈출하는 것을 도와준다.
8.3. 만화 및 애니메이션
8.4. 게임
- Hearts of Iron 시리즈
나치즘이 아닐 때 권위주의 독일의 지도자로 집권시킬 수 있다. 2편과 3편은 지도자 목록에 있으나 치트 없이 집권시키기 힘들고, Hearts of Iron IV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있다면 라인란트 대신에 히틀러 축출 루트로 진행해서 나치를 몰아낸 뒤에 중점 선택지에 따라 빌헬름 2세가 복위한다.[78] 또한 Man the Guns가 있다면 네덜란드로 플레이할 때 빌헬미나 여왕이 친정하는 루트로 진행할 경우 독일의 핵심주를 네덜란드가 점령하는데 성공할 경우 빌헬름을 다시 독일 영토로 보내 독일 내전이 발발한다. 나치독일 본토 주에서 반군이 툭 튀어나오지는 않지만 이 독일 제국은 네덜란드의 괴뢰국이기에 핵심주도 아닌 땅을 네덜란드가 먹는 거보다 훨씬 득이 된다.[79]
모드인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빌헬름 2세가 제위에 계속 앉아있다. 가지고 있는 특성은 안정도 +15%, ai변동치 방어중점 +25%의 효과를 가진 '구세계의 카이저'. 독일 제국은 초강대국으로 등극해 있으며 전쟁으로 벨기에, 벨라루스, 발트 연합공국,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모로코를 괴뢰국으로 삼고 핀란드를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며 벨기에에는 삼남 아달베르트를 왕으로 앉히고 폴란드에는 사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을 왕으로 앉히고 핀란드에는 헤센카셀 가문이 이끄는 왕국을 만들었다.[80] 더해서 이전의 협상국들이 가졌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강탈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게임이 진행되면 경제 대공황과 적대국의 성장으로 이런 위치가 위협받게 되고 카이저의 선택에 따라 독일이 패권을 유지할 수도,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적대국의 공격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왕실은 망명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독일이 살아남으면 1941년 이후에는 서거 이벤트가 뜨면서 황태자가 즉위한다.
[1]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로이센 왕가에서 전통적으로 쓰던 이름이고 빅토어는 외할머니 빅토리아의 남성형, 알베르트는 외할아버지 앨버트 공의 독일어식 이름이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을 존경한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황후 부부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2] 게다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한 지 99일 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면서 존재감이 더더욱 없다.[3] 1차 대전 직전, 독일의 철강 생산량이 영국을 따라잡을 만큼 독일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던 상황이었다.[4] 프리드리히 왕세자가 왼팔을 잡아주고 있는데, 이는 어린 빌헬름의 왼팔 장애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왕세자의 포즈와, 그가 입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더용 킬트가 인상적이다.[5] 그래서인지 앨버트 공은 42살에 요절했지만 외손주들인 빌헬름 2세와 샤를로테의 탄생은 보고 갔다. 막내이모인 베아트리스 공주와는 불과 2살 차이밖에 안 난다.[6] 큰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아직 살아있었기에 할아버지 빌헬름 1세 -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 - 빌헬름 2세 본인 순이다.[7] 큰외삼촌 에드워드 7세 - 둘째 외삼촌 알프레드 왕자 - 셋째 외삼촌 아서 왕자 - 넷째 외삼촌 레오폴드 왕자 - 어머니 빅토리아 - 빌헬름 2세 본인이다.[8] 그래도 이 사고가 빅토리아의 성기능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아서 빅토리아는 이후에도 자녀를 7명이나 더 낳았다.[9] 당연하게도 이는 빅토리아 최악의 실책이었다. 빌헬름 2세를 폐태자시키지 않는 이상 당연히 차기 황제가 될 텐데 그런 아들을 적당히 보듬어주면서 훈육하기보다는 학대에 가까운 과한 훈육과 치료를 했다. 빌헬름이 그런 어머니를 평생 미워하는 건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었고 어머니의 자유주의 사상까지 혐오하는 원인이 되었다. 아내와 아들 사이를 중재하기는 커녕 매번 아내 편만 드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책임도 한몫 했다.[10] 일설에는 전기충격기로 온몸을 지지는 치료도 했고 이 때문에 마조히스트라는 성적 지향을 가졌다는 얘기도 있다.[11] 자신을 학대한 영국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인 둘째 외삼촌과의 악감정에 이어, 훗날 아버지가 영국인 의사의 오진으로 제때 치료를 못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한 게 평생 영국을 증오하게 된 것에 한몫 했다. 물론 아버지의 사망 건은 정치적 핑계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빌헬름 2세는 첫째 외삼촌인 에드워드 7세에게도 있는대로 대들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마찬가지로 빌헬름과 사이가 안좋았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루돌프가 빌헬름에 대해 진절머리를 치자, 에드워드 7세가 외조카를 편들어주긴 커녕 루돌프 황태자를 이해하고 달래줄 지경이었다고 한다.[12] 빅토리아 여왕은 이 사실을 몰랐기에 모자간의 갈등부터 외삼촌과 외조카 사이의 갈등을 별거 아니라고 취급했을 가능성이 높다.[13] 진짜 웬만한 왕족, 귀족들은 다 받는게 가터 훈장이라 가터 훈장 안받은 사람들이 더 신기하게 보일 정도였으며, 심지어 영국 왕실과 어떠한 혼맥도 혈연도 없는 일본 황실도 받았다.[14] 이모 헤센 대공비 앨리스의 차녀.[15] 참고로 빌헬름 2세의 고종 사촌형인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2세도 엘리자베트에게 고백했지만 차였다.[16]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인 헤센의 이레네 공녀 공녀는 빌헬름 2세의 첫째 남동생인 하인리히 왕자와 결혼했다. 만약 둘이 결혼했다면 겹사돈이 될 수도 있었다.[17] 볼셰비키에 의해 갱도 안으로 끌려가 폭탄으로 살해당했다. 엘리자베트는 남편의 사후 수녀가 되어 종교와 봉사활동에 힘쓰며 많은 신망을 받았기에, 로마노프 왕조라면 이를 가는 러시아의 신민들조차 엘리자베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빌헬름 2세 역시 당시 러시아와 적국이었음에도 끝까지 엘리자베트를 구출하려고 했지만, 엘리자베트는 수녀원에 남겠다며 거절했고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돕다가 죽음을 맞이했다.[18] 재상 비스마르크 역시 선대 빌헬름 1세와는 달리 자신을 중용해 주지 않고 사사건건 대립하는 프리드리히 3세 및 빌헬름 2세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는 대륙국가 독일이 높은 역량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좌우의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과 제대로 한판 붙기에도 벅찬 상태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주변 경쟁국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대륙국이 대양으로 나아가 해양국가인 영국과 붙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내각 운영 방침으로 삼고 빌헬름 2세에게 계속 진언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컸다고 믿었던 어머니의 나라에 미묘한 열등감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황손과 황태자 시절 19세기 후반의 눈부신 성장을 직접 보아온 그는 영국을 뛰어넘고자 비스마르크가 평생에 걸쳐 이룬 유럽의 미묘한 균형을 평생에 걸쳐 무너뜨리기 시작한다.[19] 영국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가장 크게 수혜를 본 나라는 미국이다. 독일 포위망을 완성하기 위해 여지껏 호시탐탐 북아메리카를 겨누던 영국의 대서양 해군 전력이 유럽으로 재편됨에 따라서, 미국은 마음 놓고 라틴 아메리카로 진출하게 되었다.[20] 20세기 초 유럽의 군주들은 대개 수많은 민족들을 통치하는 경우가 많았고(이 부류의 끝판왕이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놓고 어떤 민족을 박해했다간 제국이 결딴날 가능성이 높았으며 국가 자체가 특정 민족의 이익이 아닌 군주를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민족주의의 위상이 이후의 국가들보다는 약했다. 따라서 군주들은 대개 민족들 간의 조화를 강조하는 면이 강했다. 오히려 제국들이 붕괴된 이후 건설된 민족 중심 공화국들에 의해 소수 민족의 고난사가 펼쳐졌다.[21] 이 당시에 독일인의 노래가 공식 국가는 아니었지만 제2국가 수준으로 널리 불려지던 노래였다.[22] 간단히 말해서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비슷한, '독일 우선주의'인 셈이다.[23] 한 마디로 계속 군비 경쟁 하다 보면 영국도 지쳐서 '그냥 우리끼리 경쟁하지 말고 차라리 친하게 지내자...'라고 할 거라는 생각이었다.[24] 당시 빌헬름 2세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는데, 사라예보 사건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문제이며 전쟁이 난다 해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전쟁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들이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었다.[25] 잠재적 동맹국이던 이탈리아 왕국은 오히려 세르비아에게 범슬라브주의를 확대할 것, 이중제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해 몬테네그로와의 점진적인 통일 등을 요구하고, 껄끄러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관계를 고려하는 등 3국 동맹 가맹국답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26]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각료와 장성들도 다 자리를 비웠다. 소(小) 몰트케 참모총장은 28일 신병 치료를 위해 칼스바트(필젠과 함께 주데텐란트의 주요 도시)로 휴양을 갔고, 해군 장관과 육군 참모 차장도 휴가를 쓰고 자리를 비웠으며 야코프 외상은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에서 신혼 여행을, 베트만홀베크 총리 역시 자신의 시골집에서 베토벤을 연주하며 쉬고 있었다.[27] 실제로는 무려 22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받아냈고, 독일 제국판 레벤스라움을 계획했었다.[28] 대략 당시 시점에서 약 백여 년 전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동명의 글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 글 역시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내용.[29] 후처 헤르미네와 함께. 오른쪽의 여자아이는 헤르미네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 헨리에테로, 후에 빌헬름 2세의 6남 요아힘 왕자의 아들로 막내 손자인 카를 프란츠와 결혼한다.[30] 거기다 형 빌헬름은 슬하에 딸만 2명을 두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벨기에 니벨레스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만일 귀천상혼 배제 원칙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살리카 법 때문에 어차피 후계자는 루이 페르디난트가 될 수 밖에 없다.[31]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셋째딸.[32] 빌헬름 2세의 생전에 출생한 증손주는 이 둘 외에 장손 빌헬름 황태손(귀천상혼으로 계승권 포기)의 두 딸인 펠리치타스, 크리스타(각각 1934년생, 1936년생), 외손녀 프리데리케의 자녀들인 소피아 왕대비(1938년생)와 콘스탄티노스 2세(1940년생)도 있다.[33] 그 이후에도 그의 손자이자 빌헬름 황태자의 아들인 가문 수장 루이 페르디난트도 1968년 독일 대통령 출마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34] 어머니 빅토리아 황후의 남동생.[35] 좌측부터 순서대로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3세, 세르비아 왕국의 알렉산다르 1세, 이탈리아 왕국의 움베르토 1세,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36] 영국은 외삼촌이 다스렸고, 러시아는 육촌이 다스렸다.[37] 빌헬름 2세의 7촌으로, 빌헬미나 여왕의 아버지 빌럼 3세가 빌헬름 2세의 친할머니 아우구스타 황후와 이종사촌이었다.[38] 정작 키 7피트는 213cm로 2023년 기준으로도 전 세계에서 고작 2,800명 가량만이 존재한다.# 저 시대에는 평균키가 더 작았고, 인구도 지금보다 적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많지 않았다.[39] 이는 이탈리아나 폴란드, 아일랜드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비슷해서 가난해서 이민온 사람들의 고향이라는 정도 인식이었다.[40] 당시 미국은 본토의 국력이 유럽의 개별 국가보다 이미 앞섰으나 세계를 주도할 잠재력이 아직 드러나기 전이었고, 고립주의 정책 때문에 국제외교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았다. 현재와 같이 세계 정치경제외교의 주도권을 쥐고 서방 진영을 주도하는 맹주국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41] 당시 영일동맹은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러시아 제국이 남하해서 대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러시아 제국은 북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연해주와 만주, 한반도로 끝임없이 남하했다. 영국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일본을 극동의 용병으로 쓰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다.[42] 이에 대해 당시 영국과 미국의 압박도 고려해야 한다. 당장 러일전쟁 당시 독일 제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의 편을 들지 못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두 나라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독일 제국에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냈다. "독일과 프랑스, 둘 중 하나라도 러일전쟁에 개입한다면 우리 미국은 일본 제국의 편을 들어 필요한 조치를 다하겠소."[43] 막내 여동생을 제외한 다른 동생들은 본인보다 먼저 사망했다. 장손인 빌헬름 폰 프로이센 주니어 왕자가 1940년에 전사했을 때도 살아있었다.[44] 비슷한 아들부자 끝판왕 왕실로는 로마노프 왕조도 있다. 니콜라이 2세를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 1세 이래로 직계 황제부터 방계까지 남성 황족들이 아들을 수두룩 낳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서 니콜라이 2세 일가를 비롯한 황족들이 대거 총살당한데다, 그나마 살아남은 황족들도 귀천상혼을 하는 바람에 현재에는 적법한 계승권을 지닌 후손은 얼마 없다.[45] 물론 당시에는 자식을 다섯 정도는 기본적으로 낳았던 시절이라서 빌헬름 2세가 유난히 많이 낳은 것은 아니었다.[46] 이와 비슷한 사람이 러시아 제국의 6촌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다. 둘 다 양성애자인데 부부관계도 좋아서 낳은 자녀가 매우 많은 것(이쪽은 슬하 6남 3녀)도 비슷하다.[47] 이때 이전에 참모총장직을 역임하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의 친척인 쿠노 폰 몰트케도 휘말려 강제 전역 당하였다.[48]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에게 휘둘리고 다닌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9] 여성 교육에 힘썼으며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카우걸이미지의 모델이기도 하다.[50] 이에 레오폴드는 분노했지만 빌헬름이 평소에도 허튼 소리를 자주해서 그 발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빌헬름 2세의 그 발언은 허세가 아니었음이 벨기에 침공으로 드러났다.[51] 벌목은 굉장히 위험하며 힘이 드는 행위로 마초이즘을 과시하기 적절하다. 당시 서양에는 마초이즘이 만연해서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았고, 흉터가 없거나 "사나이다운 결투를 안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여겼다. 그리고 "남자라면 피가 철철흐르는 생고기를 뜯어먹어야지 라임같은 걸 왜 먹냐"는 소리가 나돌 정도로 남자다움에 목숨을 걸었다. 즉, 좋게 말하면 상남자적이며 낭만주의 성향이 강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야만적인 것이 일반적인 문화였다. 성실함과 부지런함, 강인함, 용기, 힘들어도 참는 꿋꿋함, 불평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인간 프로이센 정신 (Preußische Tugenden)의 덕목에도 부합하니 지도자의 취미로도 권장될만 했다.[52] 독일 패망 직후 극도의 스트레스를 다스리기 위해 하루종일 나무를 패는 것에 집중하여 탈진할 때가 많았고, 이전보다 더 많이 베었다고 한다. 탈진할 때까지 무리하게 하는 건 어느 정도 자기파괴적인 욕구가 반영된 걸로 보인다.[53] 나무를 순수하게 도끼로 베어내려면 힘과 체력이 상당히 좋아야 한다. 나무 옮기는 빌헬름[54] 앞에서 언급된 사안은 패전 그 자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성격이 강하고, 망하게 했다는 내용은 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서 독일의 영토, 식민지, 특허권 등을 잃었고 막대한 보상금(1,320억 마르크)을 배상(무려 2011년까지) 하느라 경제가 파탄나고 지도자를 원망하는 내용으로 미묘하게 다르다.[55] 원래 남동생 두 명이 더 있었지만 요절했기 때문에 사진에는 없다.[56] 영어로는 "윌리". 다만 이와 별개로 영어에도 철자를 바꿔 발음을 비슷하게 한 Billy라는 표기가 존재한다.[57] 파벨 1세의 3녀이다.[58] 조지 3세의 4남이다.[59]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의 차녀로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60] 루이 페르디난트 폰 프로이센 등.[61]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아내인 작센마이닝겐의 레기나 공녀의 둘째 고모이다.[62] 빌헬름 2세의 외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의 처제로, 아우구스트 빌헬름 본인의 이종사촌(이모 카롤리네 마틸데의 딸)이기도 하다.[63] 카를 프란츠. 카를의 큰아들이자 요아힘 왕자의 손자인 프란츠 빌헬름은 로마노프 왕조의 현 수장(논란 있음) 마리야 여대공과 결혼했다가 아들 게오르기 공(1981년생)을 두고 이혼했다.[64] 하노버 왕조 참고. 게오르크 5세의 손자이자 크리스티안 9세의 외손자이다.[6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4세, 그리스 왕국의 왕비 프레데리키 등.[66] 이종사촌 헤센의 알릭스 공녀(이모 헤센 대공비 앨리스의 4녀)의 남편으로 빌헬름 2세의 사촌 매제이며, 빌헬름의 고모할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가 니콜라이의 증조할머니이기 때문에 7촌지간인 그리 멀지 않은 인척이다.[67] 이 시절은 메이지 덴노 시절로 당시의 서방 국가 사람들이 이제 막 급부상한 메이지 덴노의 얼굴을 몰라서 일본을 상징하는 사무라이 이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68] 1913년 하노버 왕가의 후계자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빌헬름 2세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했다. 고명딸 프리데리케는 빅토리아 루이제의 사촌동생인 그리스 국왕 파블로스의 왕비가 되었고, 이후 외손녀가 에스파냐의 왕비가 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죽었다.[69] 하리보는 빌헬름 2세가 퇴위 후 네덜란드에서 망명하던 시기인 1922년 처음으로 나왔다.[70] 여담으로 이 동상들을 만들 때 프로이센 공작이었던 방계 먼 조상 알브레히트와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동상은 만들지 않았다. 이 당시 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으로 여겼던 당대 프로이센인들의 역사 인식을 알 수 있다.[71] 그도 그럴 것이 체펠린 백작의 실패를 본 이후였다.[72] 실제로도 그랬다. 해당 에피소드가 처음 올라왔을 때 뺨을 때린 것으로 나왔으나, 이후 고증대로 엉덩이를 때린 것으로 수정되면서 독자들을 경악케 했다.[73] 동시에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역도 맡았다.[74] 에릭 얀 하누센. 실제 역사에서는 히틀러에게 선동술을 가르친 유대인 점술가였으며, 본작에선 악의 조직인 '목자의 무리'의 일원으로 등장한다.[75] 한국에서는 '스파이 전쟁'이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으로 번역되었다.[76] 예를 들면 빌헬름 자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에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베오그라드에서 멈추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그들이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에 대해 주변인들은 '그럼 들어먹을 때까지 보냈어야지'라는 태도로 일관한다.[77] 왼팔 콤플렉스 항목에서도 서술하지만 빌헬름 2세 역시 역아로 태어나서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왼쪽팔이 오른쪽팔보다 짧고 그로 인해 왼팔은 거의 못쓰는 신체적 장애가 있었다. 때문에 영화 내에서 빌헬름 2세는 T4 프로그램의 진상을 알게되자 눈에 띄게 표정이 안 좋아진다.[78] 만약 네덜란드에서 빌헬름 2세의 독일행을 거절하거나, 비동맹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아들인 빌헬름 황태자가 빌헬름 3세로 즉위한다.[79] 카이저 복위 후에 네덜란드가 오라녜 만세 루트(비동맹주의) 중점을 마지막까지 마무리하면 동맹국에 가입할 수 있다.[80] 그리고 게임을 하다 보면 조지아에서는 막내아들 요아힘이 이오아킴 1세로 즉위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