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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나 왕조 वर्धन राजघराणे | ||
존속기간 | 580년 ~ 647년 | |
왕조 | 푸시야부티(पुष्यभुती) 왕조 또는 바르다나(वर्धन) 왕조 | |
수도 | 스타니슈바라(타네사르) → 칸야쿱자(카나우지) | |
국가원수 | 마하라자디라자(왕중왕) | |
주요 황제 | 하르샤 바르다나(606~647) | |
언어 |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 |
종교 |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 |
종족 | 인도아리아인 | |
성립 이전 | 굽타 왕조 | |
멸망 이후 | 프라티하라 왕조, 팔라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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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네사르 지역을 지배했던 푸시야부티 왕국의 유력한 가문중 하나였던 바르다나 가문이 세운 왕조로 580년부터 647년까지 존속했고, 굽타 왕조에 이어 북인도를 통일했던 왕조이다.2. 역사
2.1. 초기 역사
굽타 왕조가 5세기 들어 에프탈의 침입으로 급격히 쇠락하고, 이 와중에 내부문제로 다툼까지 일어나자 결국 550년경에 여러 왕조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중 마가다를 기점으로 한 후굽타 왕조[1]과 마우카리 왕조, 푸시야부티 왕조, 마이트라카 왕조가 북인도를 통치하고 있었다.그 중 푸시야부티 왕국은 델리 지역의 북쪽 타네사르를 지배했는데, 당시 유력 가문이었던 바르다나 가문의 프라바카라 바르다나가 왕국의 지배권을 얻고 왕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다나 왕조의 시초였다. 프라바카라 왕과 야소마티 왕비 사이에는 2남 1녀 즉, 3명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중 장남은 라지야 바르다나였고, 차남이 바르다나 왕조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했던 하르샤 바르다나였다. 605년 프라바카라 왕이 사망하자 장남 라지야 바르다나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라지야 왕은 606년 왕위에 오른지 겨우 1년 만에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2] 이에 동생이었던 하르샤 바르다나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바르다나 왕조는 전성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2.2. 하르샤 시대
하르샤 왕은 국력 성장에 집중하여 그가 이끄는 바르다나 왕조는 100,000명의 보병, 50,000기의 기병, 60,000 마리의 코끼리를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큰 나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하르샤 왕은 7세기 초반에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북부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러 지역 정권이 공존하던 북부를 다시 통합한 것이다. 특히 옛 마가다 지역을 지배하며 굽타 제국 시대 이후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하던 후굽타 왕조를 봉신국으로 삼았다.하르샤는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딸을 서부의 강자였던 구자라트의 지배자와 결혼시키고, 영토를 늘릴 때 보태 준 나라와는 끝까지 좋은 관계를 이어 갔다. 당나라와도 사신을 교환했는데, 당의 승려인 현장과 신라의 승려 혜초가 인도를 방문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르샤 왕은 종교와 문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시바 신을 믿었으며, 힌두교에 밀려 힘을 잃어 가던 불교와 자이나교 등에도 관대했다. 불교의 중심지였던 날란다 사원에서는 불교 승려와 브라만이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불교가 힌두교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만 힌두교의 영향이 커지면서 카스트 제도가 더욱 큰 힘을 발휘했는데, 이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자띠', 즉 직업 사이의 구별도 엄격해졌고,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은 한층 더 심해진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차별이 어느 정도였냐면, 보통 마을 바깥의 제한된 곳에서 살았는데, 마을에 들어갈 때는 소리를 크게 질러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르샤 왕은 왕국의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부지런하고 자상한 왕이었다. 국가 제정의 25%를 백성들을 위해 썼는데, 백성들의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동물을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3], 굶주리고 아픈 사람에게 음식과 약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하지만 하르샤 왕은 이전 마우리아 왕조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지 못했고, 느슨한 봉건적 종속관계에서 허술하게 북인도를 다스렸다. 이는 결국 하르샤 왕의 죽음과 동시에 바르다나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이 하르샤 왕이 다스리던 시대를 따로 하르샤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담으로 하르샤 왕이 죽은 뒤 《신당서》와 《구당서》 등에 의하면 하르샤 왕이 죽자 아라나순[4]이란 자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 정황상 신하가 반란을 일으킨 경우이거나 봉건적 종속 관계에 있었던 속국의 군주가 독립, 혹은 수도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자가 재물을 확보하려고 당시 하르샤 왕을 만나러 온 당나라 사신 왕현책과 30명의 부하들을 습격, 공물을 강탈했는데, 하필 왕현책이 부하 장사인과 함께 탈출해버렸다.
왕현책은 토번, 네팔 국경지대로 도주한 후 격문을 써서 토번군 1,200명과 네팔군 7,000명을 확보한 후 아라나순을 공격했다. 왕현책과 장사인은 이 군대로 아라나순의 군대를 대파했고, 아라나순은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혔다. 아라나순의 잔당들이 저항했지만 괴멸되었고, 그러자 소국들이 앞다투어 왕현책에게 공물을 바치며 아부했다고 한다. 왕현책은 인도의 각 소국들에게서 받은 공물들과 아라나순을 끌고 유유히 장안으로 돌아갔다.
3. 역대 황제
- 1대 프라바카라 바르다나 (580 ~ 605)
- 2대 라지야 바르다나 (605 ~ 606)
- 3대 하르샤 바르다나 (606 ~ 6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