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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08:49:20

뤼트 헤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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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 헤일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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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에레디비시 로고.svg
1974-75 · 1975-76 · 1976-77 · 1977-78 · 1980-81
베스트팀
파일:World Soccer.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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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Ruud Geels 1974.jpg
이름 뤼트 헤일스
Ruud Geels
본명 헤르트라위다 뤼트 마리아 헤일스
Geertruida Ruud Maria Geels
출생 1948년 7월 28일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하를렘
사망 2023년 11월 18일 (향년 75세)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 체중 72kg
포지션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 SC 텔스타 (1964~1966)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6~1970)
고 어헤드 이글스 (1970~1972)
클뤼프 브뤼허 KV (1972~1974)
AFC 아약스 (1974~1978)
RSC 안데를레흐트 (1978~1979)
스파르타 로테르담 (1979~1981)
PSV 에인트호번 (1981~1982)
NAC 브레다 (1982~1984)
국가대표 20경기 11골 (네덜란드 / 1974~1981)

1. 개요2. 선수 경력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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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에레디비시 역사상 가장 많은 득점왕(5회)을 차지한 선수이자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한 선수다.[1]

2. 선수 경력

고향인 하를렘에서 북쪽으로 27km 떨어진 펠선을 연고로 하는 SC 텔스타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17세 235일의 나이로 에레디비시 역대 최연소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1966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했지만 로테르담에는 해리 빌트, 오베 킨드발과 같은 당대 스웨덴 최고의 공격수가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아직 10대의 어린 선수인 헤일스로서는 기회가 제한적이었다.[2]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1968-69 시즌에는 20경기 10골을, 1969-70 시즌에는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결장했지만 12경기 8골을 기록했다. 또한 1969-70 시즌 유러피언컵 4경기에서 6골을 터뜨리면서 팀이 유럽 정상에 오르는 데 큰 공헌을 함과 동시에 대회 득점 순위 3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소속으로 4시즌 동안 리그 89경기 46골을 기록했고, 1970년 팀을 떠나 고 어헤드 이글스로 이적한다.

1970-71 시즌 34경기 17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득점 5위에 이름을 올렸고 본격적으로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 다음 시즌인 1971-72 시즌에는 28경기 18골을 기록하며 요한 크루이프(25골), 코왈리크(20골)에 이어 리그 득점 3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이 시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AFC 아약스무패 우승을 할 뻔 했는데, 헤일스가 아약스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주며 무패 우승을 저지하기도 했다.[3]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벨기에의 클뤼프 브뤼허 KV로 이적한다.

브뤼허에서도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이적 첫 시즌 리그 우승을 일궈냈고 2시즌 동안 56경기 28골을 기록한다.
이 시기 처음으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었고 1974년 3월 27일 오스트리아와의 친선전에서 선발 출전하면서 데뷔전을 치렀다.[4]

1974년은 네덜란드 에레디비시가 정점을 찍고 쇠퇴하기 시작한 해였는데 그 이유는 요한 크루이프, 요한 네스켄스 같은 자국 최고의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감행했고 이러한 인재 유출이 곧 전력 손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에레디비시 최고의 팀을 넘어 유럽 최고의 팀으로 군림하던 아약스가 타격이 컸는데 이에 아약스에서는 선수단을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기로 했고 벨기에 리그 진출 전 자국 리그에서 정상급 활약을 보여준 헤일스를 영입한다.

1974 서독 월드컵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대회에서는 당연히 요한 크루이프, 요니 렙에게 밀려 결승전까지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켰다.

대회 종료 후 소속팀 아약스에서의 첫 시즌인 1974-75 시즌 월드컵에서 뛰지 못한 울분이라도 터뜨리듯 미친듯 한 맹활약을 펼치며 30골을 넣어 커리어 첫 득점왕 타이틀을 손에 거머쥐었고 다음 시즌인 1975-76 시즌에는 자국 리그 부활을 위해 에레디비시로 돌아온 리누스 미헬스 감독 지휘 하에 29골을 터뜨리며 2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또한 이 시즌 UEFA컵에서 11골을 넣어 대회 득점왕까지 차지하는 맹위를 떨쳤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UEFA 유로 1976에 출전하였고 유고슬라비아와의 3-4위전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며 네덜란드의 3:2 승리와 대회 3위를 견인했다.

이후 1976-77 시즌, 1977-78 시즌에도 각각 34골과 30골을 폭격하며 전인미답의 4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5] 하지만 1977-78 시즌 종료 후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아약스는 계약 연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다시 자국 리그를 떠나 벨기에 리그 팀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하게 된다.

그곳에서 로프 렌센브링크, 아리에 한과 1년을 함께 한 뒤 다시 자국 리그로 리턴해 스파르타 로테르담에서 리그 22골을 터뜨리며 32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리그 득점왕에 올라 녹슬지 않은 클래스를 입증해냈다.[6]

1981년,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면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AFC 아약스, PSV 에인트호번에서 뛰어 본 몇 안되는 선수가 되었다.

이후 NAC 브레다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2시즌을 보낸 뒤 1984년 35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1] 에레디비시 역대 최다 득점자는 빌리 판데르카윌런.[2] 해리 빌트와 오베 킨드발은 스웨덴 대표팀 선후배 사이로, 실력도 실력이지만 페예노르트 이전에 자국 리그 팀인 IFK 노르셰핑에서 몇 시즌간 함께 호흡을 맞춘 바 있어 둘의 호흡은 매우 좋았다. 이 스웨덴 커넥션은 1966-67 시즌 각각 리그 득점 2위와 5위를 차지하며 그 위력을 네덜란드 전역에 떨쳤다.[3] 1: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는 원맨쇼로 3:2 역전승을 이끌었다. 참고로 이 시즌 아약스는 유러피언컵KNVB 베이커에서 무패 우승을 차지했는데 헤일스가 고춧가루를 뿌린 덕분에 리그 무패 우승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무패 트레블까지 날라갔다.[4]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요한 크루이프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빌리 판데르카윌런, 오베 킨드발, 요니 렙 등의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최정상급 공격수로 분류되는 괴물들과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에 그동안 리그 정상급 활약을 선보이고도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다.[5] 이후에 마르코 판바스턴이 1983-84 시즌부터 1986-87 시즌까지 4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타이를 이뤘기 때문에 전무한 기록이긴 하지만, 후무한 기록은 아니게 되었다. 참고로 헤일스는 4시즌 동안 123골을 넣었고, 판바스턴은 118골을 넣었다.[6] 지금 기준으로도 32세의 선수는 적지 않은 나이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당장 은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노장급 나이였다. 지금으로 치면 30대 중후반의 선수가 리그 득점왕에 오른 것과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