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0E0E6,#505780><colcolor=#000> 덴마크 프레데리크 8세의 왕비 스웨덴의 로비사 공주 Prinsessan Lovisa av Sverige | ||
이름 | 스웨덴어 | 로비사 요세피나 에우에니아 (Lovisa Josefina Eugenia) |
덴마크어 | 루이세 요세피네 에우게니 (Louise Josephine Eugenie) | |
출생 | 1851년 10월 31일 |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스톡홀름 스톡홀름 왕궁 | ||
사망 | 1926년 3월 20일 (향년 74세) | |
덴마크 코펜하겐 아말리엔보르 궁전 | ||
배우자 | 프레데리크 8세 (1869년 결혼 / 1912년 사망) | |
자녀 | 크리스티안 10세, 호콘 7세, 루이세, 하랄, 잉에보르, 티라, 구스타프, 다우마 | |
아버지 | 칼 15세 | |
어머니 | 네덜란드의 루이세 | |
형제 | 칼 오스카르 | |
서명 |
[clearfix]
1. 개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의 왕비이자 스웨덴 칼 15세와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의 장녀.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와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잉에보르크 공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2. 작위
문장 |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로비사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Lovisa of Sweden and Norway(1851년 10월 31일 ~ 1869년 7월 28일)
- 덴마크의 왕세자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of Denmark (1869년 7월 28일 ~ 1906년 1월 29일)
- 덴마크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Denmark (1906년 1월 29일 ~ 1912년 5월 14일)
- 덴마크의 왕대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Dowager of Denmark (1912년 5월 14일 ~ 1926년 5월 20일)
3. 생애
3.1. 어린시절
1851년 10월 31일, 당시 스웨덴의 왕세자였던 칼과 로비사 왕세자비의 딸로 태어났다. 스웨덴에서 로비사로 불렀던 어머니 루이제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1세의 손녀이자 프로이센 왕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외손녀였다.사실 아버지 칼은 프로이센의 루이제[1]와 혼담이 진행되었지만 파기되었고[2], 어머니인 네덜란드의 루이제랑 결혼했다.
칼 15세와 로비사 왕비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로비사의 동생인 칼 오스카르가 사망한 뒤, 하나 남은 로비사를 더욱 예뻐했고 사랑하는 딸을 위해 부부로서 함께 했다고 한다. 로비사는 매우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아버지 칼은 활발한 활동을 하도록 권유했는데, 어머니 로비사는 딸이 너무 사내아이처럼 크는 것을 걱정하였다고. 심지어 삼촌 오스카르 왕자가 로비사 공주를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로비사의 애칭은 공식적으로 세사(Sessan)이었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스톡홀름의 부랑아'라고 불렀다.
이후 로비사는 어린 시절과 정반대로 얌전하고 신앙심 깊은 공주로 자라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대중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어머니 로비사 왕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비사 공주는 교육을 잘 받았는데 특히 언어에 관심이 많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되어있는 문학에 심취했다고 한다.[3]
3.2. 왕위를 잇지 못하다
로비사의 아버지 칼 15세가 이끌던 스웨덴은 옆 나라인 노르웨이과 함께 연합왕국이였는데, 로비사의 남동생 칼 오스카르가 사망한 뒤 칼 15세의 자식이 로비사 한 명밖에 남지 않으면서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겼다. 스웨덴의 경우 로비사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지만, 노르웨이는 살리카법을 우선시하며 여왕이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웨덴은 칼 15세가 사망한 뒤 노르웨이와의 연합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로비사가 아닌 그녀의 삼촌 오스카르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만약 로비사가 스웨덴의 여왕이 되었으면 남편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와 함께 부부동군연합이 되고, 장남 크리스티안 10세가 세 왕위를 다 물려받아 다시 한번 칼마르 동맹을 구현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1905년에 로비사의 차남이자 칼 15세의 외손자인 칼 왕자가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다. 칼 15세는 직계 자식에게 스웨덴의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지만, 사후에나마 외손자가 노르웨이의 왕위를 물려받았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3.3. 결혼
1868년 당시 16세였던 로비사는 25세였던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왕세자를 만난다. 당시 북유럽 국가에서는 범 스칸디나비아 주의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로비사와 프레데리크의 결혼은 매우 환영받을 만한 일이였다. 하지만 프레데리크의 어머니인 루이세 왕비는 아들의 결혼에 대해서 처음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이유는 차분하고 신앙심 깊은 로비사가 활달한 분위기의 덴마크 왕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비사가 덴마크의 왕세자비로서 공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비사가 덴마크어를 쉽게 구사해서 덴마크 왕실에 적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이 성사됐다.1869년 7월 28일, 로비사와 프레데리크의 결혼식은 스톡홀름에서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후 로비사는 고모와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선사업에 관심을 보이며 'Prinsessan Lovisas minnesfond'이라는 단체를 조성해 어린 아이들을 도왔다.
3.4. 왕세자비
덴마크의 왕세자비가 된 로비사는 이제 루이세(Louise)로 불리게 되었다. 차분하고 신앙심이 깊은 로비사는 덴마크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가족적이고 활달한 덴마크 왕실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크리스티안 9세의 딸이었던 알렉산드라, 다우마, 티라가 미녀여서 그런지 로비사는 매번 시누이들과 외모를 비교당했다고 한다. 당시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알렉산드라와 러시아의 황태자비였던 다우마는 로비사를 못마땅해 했다.[4] 그나마 막내 시누이이자 하노버의 왕세자비였던 티라가 로비사와 가까이 지냈다. 시어머니인 루이세 왕비도 며느리인 로비사를 안 좋게 봤다고 한다.[5] 이에 대해 남편 프레데리크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그렇지만 왕세자비가 된지 얼마 되지 않은 1870년에 장남 크리스티안 왕세손과 1872년 차남 칼을 출산함으로서 왕실에서의 입지가 굳건해지게 되었다. 이후 루이세, 하랄, 잉에보르, 티라, 구스타프, 다우마를 출산했다.
하지만 로비사에게 크나큰 슬픔이 찿아왔다. 1871년과 1872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외동딸이였던 로비사는 자신이 고아가 되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아, 점점 공적생활보다 조용히 가정생활을 좋아하게 되었다.
로비사는 어머니인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처럼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활발했던 어린 시절과 다르게 자녀들을 매우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특히 귀천상혼을 용납하지 않아서 막내 다우마는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평민과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99년에 장남 크리스티안 왕세손의 장남인 프레데리크 왕자가 태어나면서 할머니가 되었다.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함에 따라 차남 칼 왕자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칼 왕자가 노르웨이식 이름인 호콘으로 개명하고 호콘 7세로 등극하면서, 로비사는 아들이 노르웨이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칼 15세의 여계 후손은 비록 스웨덴의 왕위는 못 물려받았지만 노르웨이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호콘 7세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선출된 이유는 결정적으로 처가가 영국 왕실인 점도 있었지만, 호콘의 어머니인 로비사가 스웨덴의 공주인 점도 한몫 했다.
3.5. 왕비 이후의 삶
1906년에 시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 프레데리크 왕세자가 덴마크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로비사도 덴마크의 왕비가 되었다. 로비사는 왕비가 된 이후에도 조용히 살았으며, 왕세자비 시절부터 후원해온 자선단체와 예술가들을 죽을 때까지 직접 후원했다고 한다.1912년에 남편 프레데리크 8세가 갑작스레 사망하자 장남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국왕이 되어 왕대비가 되었다.
왕대비가 된 이후에도 조용히 지내다가 1926년에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웨덴의 로비사 (Louise of Sweden) | <colbgcolor=#FFF3E4,#331c00> 칼 15세 (Charles XV)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카르 1세 (Oscar I) | |
<colbgcolor=#E4FFEC,#00330f> 칼 14세 요한 (Charles XIV John) | |||
데지레 클라리 (Désirée Clary) | |||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 (Princess Josephine of Leuchtenberg) |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 드 보아르네 (Eugène de Beauharnais, Duke of Leuchtenberg) | |||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 공주 (Princess Augusta of Bavaria)[6] | |||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the Netherlands) | |||
네덜란드의 프리디리크 왕자 (Prince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 |||
빌럼 1세 (William I) | |||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공주 (Princess Wilhelmine of Prussia)[7] | |||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Princess Louise of Prussia)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여공작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크리스티안 10세 (Christian X) | 1870년 9월 26일 | 1947년 4월 20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여공작 슬하 2남[8] |
2남 | 호콘 7세 (Haakon VII) | 1872년 8월 3일 | 1957년 9월 21일 | 웨일스의 모드 공녀[9] 슬하 1남[10] |
1녀 | 샤움부르크리페의 프리드리히 공자비 루이제 (Louise, Princess Friedrich of Schaumburg-Lippe) | 1875년 2월 17일 | 1906년 4월 4일 | 샤움부르크리페의 프리드리히 공자 슬하 1남 2녀 |
3남 | 하랄 왕자 (Prince Harald) | 1876년 10월 8일 | 1949년 3월 30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헬레네 슬하 2남 3녀 |
2녀 |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부인 잉에보르 공주 (Princess Ingeborg, Duchess of Västergötland) | 1878년 8월 2일 | 1958년 3월 12일 |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칼 왕자[11] 슬하 1남 3녀[12] |
3녀 | 티라 공주 (Princess Thyra) | 1880년 3월 14일 | 1945년 11월 2일 | |
4남 | 구스타프 왕자 (Prince Gustav) | 1887년 3월 4일 | 1944년 10월 5일 | |
4녀 | 다우마 공주 (Princess Dagmar) | 1890년 5월 23일 | 1961년 10월 11일 | 율겐 카스텐스키오드 슬하 4남 1녀 |
5. 여담
- 로비사의 외모는 사진으로 보면 평범하지만 두 시누이인 알렉산드라 왕비, 마리아 황후랑 찍은 사진들을 보면 두 시누이의 외모가 더 돋보인다. 아마도 두 시누이들이 워낙 미녀여서 그럴 수도 있다. 어느날 시동생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자식들이 덴마크에 방문했는데, 큰어머니인 로비사를 보고 고니를 닮았다며 "앤트 스완"이라고 불렀다. 이 말에 로비사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로비사의 삶을 통틀어 보면 어렸을 때 밝은 성격이었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바뀌면서, 가족적이고 활달한 덴마크 왕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나 차기 왕비인 왕세자비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공적인 의무를 멀리 한다는 오해를 받아, 시어머니인 루이세 왕비가 이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8남매의 양육과 가정교육에 집중하며 자식농사에 성공했다는 것. 로비사의 장남과 차남은 각각 덴마크 국왕과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고, 차녀의 경우 노르웨이 왕세자비, 벨기에 왕비의 어머니였고, 손주와 증손주들도 국왕과 군주의 부인[13][14]이고, 현손주들도 현재 군주로 재임하고 있다.[15]
[1] 빌헬름 1세의 동생 카를 왕자의 딸이다.[2] 당시 베르나도트 왕가는 신흥 왕조였기에 벼락부자 이미지가 강했다. 이 때문에 대가문과의 혼담을 깨는 건 왕조의 입지에 상당히 불리했다.[3] 여담으로 아버지 칼 15세 또한 젊은 시절 외국어 학습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4] 시누이 알렉산드라의 막내딸이자 자신의 작은며느리인 웨일스의 모드 공녀가 이러한 관계 때문에 굉장히 난감했다고 한다.[5] 그 이유는 여담에서 후술.[6]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장녀이다.[7]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차녀이다.[8] 프레데리크 9세, 덴마크의 세습 왕자 크누드[9] 에드워드 7세와 고모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의 3녀로 고종사촌이다.[10] 올라프 5세[11] 오스카르 2세의 3남이다.[12]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메르타, 벨기에의 왕비 아스트리드 등[13] 손주: 프레데리크 9세(덴마크), 올라프 5세♡메르타 왕세자비 부부(노르웨이), 아스트리드 왕비(벨기에)[14] 증손주: 마르그레테 2세(덴마크), 그리스의 아나마리아 왕비(그리스. 단, 여기는 군주제 폐지됨), 하랄 5세(노르웨이), 벨기에의 조제핀샤를로트 공주(룩셈부르크 대공비), 보두앵 1세, 알베르 2세(벨기에 국왕)[15]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 벨기에의 필리프 1세, 프레데리크 1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