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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0:25:09

런던 해군 군축조약

런던 군축 조약에서 넘어옴
영어 명칭London Naval Treaty
장소영국 런던
시기1930년 4월 22일

1. 개요2. 배경3. 내용4. 영향
4.1. 국가별 입장4.2. 군함의 변화4.3. 일본군 폭주의 시발점
5. 관련 문서

1. 개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후속으로 기존 군축조약에서 미처 합의하지 못한 사항에 대해 런던에서 체결한 조약. 1930년의 1차 조약과 1936년의 2차 조약이 있다. 이 조약 중에서 보통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라고 하면 1차를 지칭하는데, 2차의 경우에는 사실상 체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차 조약의 정식 명칭은 1930년 런던해군조약이다. 그 외에도 런던 군축조약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 1월 ~ 4월에 개최된 런던회의에서 영국, 미국, 일본 제국, 프랑스, 이탈리아 왕국 5대 해군국을 포함한 11개국이 참가하여 채택된 해군군축조약으로 4월 22일에 서명, 12월 31일 발효되었다. 23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1922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던 보조함(순양함, 구축함, 잠수함)의 제한에 대해서 주로 결정한 것과 함께 영국ㆍ미국ㆍ일본 제국 3국 간에는 대략적으로 10:10:7의 비율로 보조함을 제한할 것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미국에 요구한 안전의 보증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대한 대등한 요구가 프랑스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에 모두 보조함 제한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보조함 제한 불참가국의 군함제조에 의해 자국의 안전이 영향을 받는 경우에 군함제조를 인정하는 에스컬레이터 조항(21조)이 규정되었다.

1935년 ~ 1936년에는 본 조약 23조에 따라 신조약을 작성하기 위해 제2회 런던회의가 개최되었지만, 1934년 12월에서 1936년 말까지 워싱턴 해군군축조약과 본 조약을 폐기할 것을 통고하였던 일본이 그 주장(공통의 상한(上限))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의에서 탈퇴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미국과 프랑스만 모아서 3국이 런던에서 군축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를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상 체결되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보여주며 팀킬만 작렬한 조약이었다.

2. 배경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는 주로 전함순양전함, 항공모함을 규제하였기 때문에, 순양함 이하의 보조함선에 대해서는 건조수량 및 배수량 제한이 없다시피 했다. 물론 보조함의 한계는 기준배수량 10,000t 미만에 8인치 주포 이하로 제한되었지만, 이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조함으로 인정하므로 각국은 보조함에 최신 기술을 접목해서 수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27년에 제네바 해군 군축회의가 열렸지만, 미국의 비율주의와 영국의 개함 규제 원리가 충돌하는 바람에 결렬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실효성에 의문이 가해질 수준이라 1929년 6월 14일에 영국과 미국 간의 예비교섭에서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1930년에 런던 해군 군축회의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3. 내용

여기서는 대략적인 조약 내용을 소개하며, 부가설명은 별도의 표시로 추가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발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리대상에 올랐지만 대체함이 마련되기 전까지나 기존 함선이 수리중이라는 등의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아직 정리하지 않은 전함과 순양전함들을 다 퇴역시키라는 것을 확실히 규정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는 퇴역했으며, 연습전함이 된 물건들은 전투에서 사용이 불가능할 수준까지 약화시키는 조치가 취해졌으므로 각국에서는 연습전함이 된 물건들은 퇴물이 된 것으로 간주하고 더이상 위험요소로 치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진 태평양 전쟁에서 히에이는 다시 대개장을 받고 일선에서 뛰게 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헛점을 이용해서 항공모함 배수량 쿼터를 늘리는 행위를 막고, 항공모함이라는 이름하에 작은 비행갑판과 수상기 몇대를 보유한 순양함을 건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추가된 조항이다.
보조함 중 순양함이 가장 많이 건조되는 바람에 전간기 기간 동안 순양함이 사실상 함대의 주력이 되었으므로 새로 제한을 설정한 것이다. 각국의 이해가 가장 많이 충돌된 사항이다. 이 때문에 전함의 성격을 많이 가진 중순양함과 구축함의 대장 역할을 하는 경순양함이 확실하게 구분되었으며, 구축함과의 구분도 확실하게 만들어졌다.
구축함의 규제가 크게 강화된 이유는 일본의 후부키급 구축함처럼 구축함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당시의 일반적인 경순양함급에 가까운 물건을 각국이 계속 뽑아냈기 때문이다. 특히 어뢰의 발달과 기관기술의 향상으로 인해 뇌격을 비롯한 구축함의 전반적인 전투능력 향상이 이루어졌으므로 더 이상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잠수함도 보조함이라는 근거를 이용해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전에는 전함의 12인치 주포를 장비한 잠수함이 등장했고, 그 이후에도 순양함의 8인치 주포를 장착한 쉬르쿠프급 잠수순양함이 등장하는 등의 사태가 발생해서 규정된 것이다. 다만 소나와 잠수함의 전투를 강제적으로 막는 각종 국제조약으로 인해 잠수함이 잠항한 후 어뢰를 사용해서 공격할 가능성은 적다고 봤기 때문에 어뢰에 대한 규제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따로 언급하는 잠수함 3척은 미국의 아르거넛, 나왈, 노틸러스이며, 기존의 잠수함을 폐기처리하기 힘들어서 규정된 것이다.
해당 조약 체결시점에서 직접 전투용으로는 너무 느리고 작아서 사용할 수 없는 함선이 자위용의 목적으로 약간의 무장을 탑재하거나, 너무 낡은 보조함을 다른 용도로 전환해서 쓰는 경우에 대한 배려다. 다만 이런 목적을 빌미로 함선을 건조한 후 유사시 바로 1선급 전투함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배수량과 속력 및 주포의 종류와 크기를 규제하였다.

4. 영향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만들어진 군함 규제를 최종적으로 완성함으로써 조약 규정안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군비경쟁을 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에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의미는 상당하다.

4.1. 국가별 입장

하지만, 이미 1차 조약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보조함의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실상 이탈함에 따라서 조약이 체결된 당시부터 조약의 능력은 제한받기 시작했다. 당장 양국은 순양함과 구축함의 능력향상에 치중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질 무렵에는 해당 분야의 함선들은 적어도 카탈로그상으로는 최상급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조약을 완전체결한 영국, 미국, 일본 제국의 불만도 상당했다. 영국은 경순양함을 더 많이 필요로 했고, 미국은 중순양함을 더 많이 필요로 해서 조약에 반영되었지만, 다들 이 정도 수량으로는 순양함 자체가 모자라다는 인식을 가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긴축재정이 필요했고, 자신들이 주장하던 보조함 비율인 7에 육박하는 6.975를 인정받아서 처음에는 그럭저럭 넘기려고 했지만, 일본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해당 조약의 내용을 가지고 일본 국내에서 여러가지 마찰이 있었으며, 결국 이런 문제는 1936년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일본이 해당 조약은 물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등 다른 조약도 탈퇴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해군은 재무장을 시작도 못한 상태라 조약 내용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미 베르사유 조약으로 심각한 제한을 받고 있던 처지이기도 하고... 그래서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1935년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따로 규제를 받게 된다. 물론 애초부터 지킬 생각도 없었고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휴지조각이 되지만.

4.2. 군함의 변화

그리고 이 조약에 따라서 이른바 군축조약형 중순양함이 출현하게 된다. 공통적으로 군축조약의 제한을 빠듯하게 채워서 화력과 속도는 상당하지만, 방어력면에서는 대응방어가 안 되는 등의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제약을 잘 지킨 초기의 함선들은 주석깡통함(tin-can)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물론 미국의 경우 건함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조약을 지키면서도 그럭저럭 대응방어를 갖춘 중순양함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시점에서 조약이 사실상 효력을 상실해서... 영국의 경우 요크급[2] 이후에는 중순양함이 건조되지 않았으니 패스.

이외에도 일본 국내 한정으로 함선 건조에 관련된 흑역사가 있다. 바로 워싱턴, 런던 해군 군축조약하에서 각 함선의 전투력을 어떻게든 높이려고 무리를 한 결과, 각 함선의 무게중심이 상승하고 구조재에 균열이 가거나, 아직 제대로 익히지 않은 최신기술인 전기용접을 대량으로 적용한 것이다. 덕분에 파도가 조금 거칠다고 어뢰정이 뒤집어지는 토모즈루 사건이나, 태풍과 접촉해서 각종 함선이 큰 피해를 보는 제4함대 사건이 발생했고[3], 결국 일본군은 다시 돈을 들여서 함선들을 대규모로 재수리하고 무게중심을 낮추고 속도를 줄이는 등의 고생을 하게 된다.[4]

이 동안 함선들을 군축조약하에서 항해성능을 개선하려는 과정에서 용접을 포기하고 리벳접합으로 회귀하는 기술적 퇴보까지 벌어졌으며, 기본적인 항해성능조차 불안한 조약형 군함에 대한 불안을 가지게 된 중립적인 대다수 해군장교들은 군축조약을 부정하는 군령부 위주의 함대파와 조약의 유지를 주장하는 해군성 위주의 조약파간 대립에서 함대파에 대거 가담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쓰시마 해전의 영웅으로서 해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대파의 영수인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지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4.3. 일본군 폭주의 시발점

일본 해군 군령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약이 강행되자 기타 잇키, 오카와 슈메이 등의 국가주의자들과 극우세력들은 런던 군축조약을 통수권 침해[5]로 규정하며 반발하였고 이러한 가운데 육해군을 막론하고 불온한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5.15 사건2.26 사건은 그 절정으로, 군축 조약이 되려 군부 폭주의 주요한 시발점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는 것은 눈여겨 볼 부분.

5. 관련 문서


[1] 여기서 말하는 특무함은 특수부대와 관련이 있거나 특별한 임무를 가진 군함이 아니라 기뢰전 함정처럼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배가 아닌 기타 함선을 지칭한다.[2] 카운티급 중순양함의 축소판이다.[3] 다만 저 경우는 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런 상황에서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잘못이 크다. 저런 상황은 일본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함정이라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할 만큼 악천후였다. 가령 미국도 태풍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적이 있다. 코브라(태풍) 문서를 참고.[4] 하지만 일본은 이 대규모 개장으로 태평양 전쟁 동안 태풍으로 인한 함선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제7차 다호 작전 중 태풍을 만난 구축함 타케는 태풍을 조우했지만 무사히 귀환했다.[5] 천황은 내각에 대권을 위임했을 뿐이지, 군 통수권을 위임한 것이 아닌데 통수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해군 군령부의 반대를 내각에서 묵살하고 멋대로 군축조약에 조인한 것은 반역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