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 Diego Flores de Valdez | |
| 성명 |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 Diego Flores de Valdez |
| 출생 | 1530년경 |
| 스페인 제국 아스투리아스 산 에스테반 데 라스 모르테라스 교구 | |
| 사망 | 1595년 (향년 64~65세) |
| 스페인 제국 아스투리아스 산 에스테반 데 라스 모르테라스 교구 | |
| 직위 | 스페인 해군 제독.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제독.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의 고문을 맡았다.2. 생애
1530년경 아스투리아스 지방 산 에스테반 데 라스 모르테라스 교구에서 무역에 종사하는 귀족 집안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1550년경 해군에 입대한 뒤 1555년 페루와 칠레에서 상선을 운영했다. 1565년부터는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 함대에 복무하여 플로리다 정복과 위그노인들이 플로리다에 캐롤라인 요새를 세우고 정착하려는 시도 진압에 참여했다. 스페인으로 귀환한 후 공로를 인정받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로부터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1579년, 탐험가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가 마젤란 해협 탐험 및 식민지 개척 항해를 수행하고 스페인으로 귀환한 후, 펠리페 2세에게 수많은 사략선과 외국 항해자들이 그곳을 탐험하면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날 경우 직면하게 될 위험은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조언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적국 함대가 마젤란 해협을 이용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강력한 함대를 배치하기로 하는 동시에, 수많은 주민을 마젤란 해협 지역에 정착시키기로 했다. 왕은 감보아를 해협 함대 사령관으로 세우고,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581년 9월 25일, 병사 3천 명을 태운 배 23척이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출항했다. 여기에는 이주민 350명이 포함되었는데, 이주민 중에는 어린이 21명과 여성 30명이 있었다. 이들은 마젤란 해협에 마을과 요새를 세우고 거기에 정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함대가 대서양에 진입했을 때 폭풍이 들이닥쳐서 배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항구로 복귀해야 했다. 몇 달 후 다시 출발했지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해안에서 폭풍을 여러 차례 만났고, 수많은 선원이 질병에 쓰러져서 오랫동안 그곳에 정박해야 했다.
1583년 1월, 함대는 마침내 마젤란 해협 인근에 도착했고, 해협 진입을 시도했지만 강한 역풍과 해류 때문에 실패했다. 이즈음 감보아와 플로레스의 갈등이 불거졌다. 플로레스는 연이은 고난에 지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감보아는 왕의 명령을 이행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브라질로 돌아가 가장 심하게 손상된 배들을 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1583년 6월 2일, 귀환을 결심한 플로레스는 함대 대부분을 이끌고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감보아는 배 5척과 병사 500명만 거느리고 마젤란 해협으로 가서 기어이 정착을 완수했다.
한편, 플로레스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포르투갈인들이 프랑스 사략선 몇 척이 숨어 있다고 경고했던 올세인츠만으로 향했다. 프랑스 해적들은 저항 없이 도주했고, 플로레스는 도망친 해적들이 남겨놓은 식량과 물자를 확보했다. 그 후 대서양으로 떠난 플로레스는 1584년 7월 7일 산루카르에 도착했다.
1588년, 플로레스는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해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의 수석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제독 계급으로서 함선 16척으로 구성된 카스티야 함대를 지휘했으며, 국왕의 명령에 따라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과 함께 대함대의 기함인 산 마르틴호에 탑승했다. 왕은 그가 풍부한 해상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해전 경험이 없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을 잘 보필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바다에서 활동한 경험은 풍부했지만 대규모 해전을 치른 경험은 없었던 플로레스는 대함대가 강력한 전투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앞을 가로막은 잉글랜드 함대를 상대로 방어에 전념하라고 조언했고,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그 말에 따라 초승달 대형을 갖추고 수송선들을 지키는 데 전념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잉글랜드 함대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은 스페인 대함대에 비할 바 아니었으므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면 잉글랜드 함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 후 칼레 해전으로 함대가 흩어지면서 더 이상의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플로레스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과 아일랜드 해안을 거쳐 스페인으로 귀환하자고 제안했다. 공작은 이에 따랐지만, 귀환 과정에서 2차례의 심각한 폭풍에 직면해 막심한 손실을 보았고, 공작 본인도 중병에 걸렸다.
플로레스는 귀환 후 펠리페 2세에게 처벌받고 부르고스에 투옥된 유일한 고위 사령관이었다. 그 이유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에게 잘못된 조언을 했기 때문인데, 특히 손상된 안달루시아 함대 기함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로사리오를 버리라고 조언한 것이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전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함대가 대형을 유지한 채 항해에 지연을 초래하지 않도록 한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러나 로사리오 호는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이끄는 네덜란드 방면 스페인군에 급료를 지급하는 데 쓸 막대한 금화를 싣고 가던 수송선이었다. 펠리페 2세는 플로레스가 이 중요한 배를 너무도 쉽게 버렸다며 몹시 불쾌해했다.
플로레스는 몇 달간 옥고를 치르다가 풀려난 뒤 여생을 조용히 지내다가 1595년 고향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