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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1:24:33

데이브 섹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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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섹스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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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감독
파일:external/www.uefa.org/740552_w2.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데이브 섹스턴 OBE
Dave Sexton OBE
본명 데이비드 제임스 섹스턴
David James Sexton
출생 1930년 4월 6일
잉글랜드 런던 이슬링턴
사망 2012년 11월 25일 (향년 82세)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직업 축구선수 (인사이드 포워드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루턴 타운 FC (1951~1952)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1952~1955)
레이턴 오리엔트 FC (1956~1957)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 (1957~1958)
크리스탈 팰리스 FC (1959)
감독 레이턴 오리엔트 FC (1965)
첼시 FC (1967~1974)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1974~1977)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77~1981)
잉글랜드 U-21 대표팀 (1977~1990)
코번트리 시티 FC (1981~1983)
잉글랜드 U-21 대표팀 (1994~1996)

1. 개요2. 선수 시절3. 감독 경력
3.1. 첼시 시절3.2. QPR 시절 - '슈퍼 후프스'의 수장.3.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3.4. 코벤트리 시티 시절3.5.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U-21 감독
4. 은퇴 후5. 수상
5.1. 선수 시절5.2.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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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브 섹스턴은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이자 前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꽤나 하는 선수였지만 대표팀에 뽑힐 정도로 잘하진 못했다. 하지만 감독으로서는 첼시와 QPR의 전성기를 이끌어냈고 잉글랜드의 U-21 대표팀 감독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길러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맨유에서는 암흑기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던 팀을 도로 암흑 속으로 떨어지게 만든 원흉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그는 대영제국 훈장을 받을 만큼 영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고 그가 죽자 수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2. 선수 시절

섹스턴은 1930년 4월 6일 영국 런던의 이슬린턴에서 프로 복싱 선수였던 아서 섹스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축구에 관심이 많았고 1948년 18살의 나이에 웨스트햄 유스팀에 들어갔다. 그는 1951년에 루튼 타운으로 이적하고 1년간 뛰면서 9경기 1골을 넣었다. 그후 1952년에 다시 웨스트햄으로 돌아와 3년간 74경기에 출장하여 27골을 넣었다.

섹스턴은 1956년에 레이튼 오리엔트로 이적하여 24경기 4골을 기록했고 이듬해엔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에 이적, 49경기 출장하여 26골을 기록했다. 그후 1959년 크리스탈 팰리스로 이적하여 27경기 동안 11골을 기록하고 29세의 나이에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섹스턴은 선수 시절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동했으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시기는 브라이튼에서 3부 리그를 우승한 1957-58 시즌이었다.

3. 감독 경력

3.1.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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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FA컵을 우승한 뒤 첼시 선수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섹스턴.

섹스턴은 선수 생활을 은퇴한뒤 첼시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고 1965년에 잠시 레이튼 오리엔트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지만 곧 물러났다. 1966년, 그는 아스날의 감독 버티 미로부터 코치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1년 뒤, 그는 도로 첼시로 돌아와 토미 도허티 감독의 경질 이후 흔들리던 첼시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섹스턴은 첼시에서 1970년에 FA컵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섹스턴은 1972년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스토크시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성공을 거둔 섹스턴은 얼마 후 피터 오스굿, 알란 허드슨과 갈등을 빚고 그들을 팔아버린 뒤 위기에 봉착했다. 선수들은 자신의 동료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쫓은 그에게 불만을 품었고 선수진과 그와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고, 결국 보드진은 상황을 주시한 끝에 1974-75 시즌 초반에 그를 경질했다. 이후 첼시는 지도자를 잃고 표류했고 시즌 말에 2부 리그로 강등되고 말았다.

3.2. QPR 시절 - '슈퍼 후프스'의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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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섹스턴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전임 감독인 고든 자고 주니어로부터 제리 프랜시스, 스탠 보울스, 데이브 토마스, 필 파크스, 돈 기븐스 등의 재능이 뛰어난 젊은 선수들과 데이브 클레멘트, 이안 길라드, 믹 리치 등의 고참들, 아스날 FC에서 온 프랭크 매클린톡 등의 노장들이 모인 스쿼드를 이어받아 이들의 기량을 다듬고, 그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후 섹스턴은 돈 마슨을 영입해 스쿼드의 폭을 넓혔고, 첼시 FC에서 활동하던 존 홀린스와 데이브 웹을 데려와 팀 자체의 경기력을 길렀다. 그가 이끌던 QPR은 로프터스 로드에서 뛰었던 팀들 중에서 팬들로부터 가장 박진감이 넘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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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76 시즌 당시 QPR의 스쿼드.

그의 우아한 플레이 스타일은 1975-76 시즌 개막전에서 제리 프랜시스가 당대 최강팀인 리버풀 FC를 상대로 물 흐르는 듯한 패스와 연결해서 넣은 호쾌한 골로 시작하여 시즌 내내 거침없이 질주하여 14경기 연속 무패(13경기 승리, 1경기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마지막 경기인 노리치 시티와의 원정에서 3:2로 패배하는 바람에 리그 우승을 1점차로 놓치고 말았다. (그해 리그 우승은 리버풀이었다.) 그래도 리그 2위는 QPR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래도 UEFA컵 진출권을 얻음으로써 클럽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진출이라는 쾌거를 누린 것이다.

다음 시즌인 1976-77 시즌에는 UEFA컵에 출전해 첫 클럽대항전 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대회에서 QPR은 노르웨이의 SK 브란, 체코슬로바키아의 ŠK 슬로반 브라티슬라바[1], 그리고 서독의 FC 쾰른을 꺾으면서 선전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8강전에서 그리스의 AEK 아테네에게 3대 3으로 동점을 기록했으나 아테네의 승부차기로 인해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대회에서 보여준 패기로 인해 섹스턴의 지도력은 국제 무대에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섹스턴은 QPR에서 130경기 동안 57승 41무 32패를 기록하며 QPR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1977년 6월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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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턴은 1977년 여름 토미 도허티의 뒤를 이어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사실 도허티는 맨유에서 부임하자마자 2부리그를 우승시켜 1부리그로 복귀시켰고 1977년엔 FA컵을 우승시키는 등 팀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는 맨유에 소속된 물리치료사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가졌다가 걸리는 바람에(...) 경질되었다. 섹스턴은 맨유에 부임한 이후 이름과는 반대로 감독의 도덕성을 끌어올려 실추된 팀의 명성을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록 비도덕적인 행위를 벌이다 경질되긴 했어도 팀에 많은 공헌을 한 도허티와 달리, 그는 맨유에서 4년간 어떠한 트로피도 얻지 못했다. 그는 1979-80 시즌에 우승에 근접했으나 막판에 부진에 빠져 리버풀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데 만족해야 했고 FA컵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스날에게 3:2로 역전패하고 말았다. 이후 섹스턴은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다. 그는 1979년에 첼시로부터 미들필더 레이 윌킨스를 영입했고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조 조던을 영입했다. 이 두사람은 섹스턴의 최고 영입작품이었다. 윌킨스는 훗날 유럽 제일의 미들필더로 거드났고 조 조던은 3년간 50골 이상을 꽂아넣는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성장했다.

섹스턴은 이외에도 노팅엄 포레스트의 스트라이커 게리 버틀스를 1980년에 125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이 이적료는 이때까지 맨유가 지불한 이적료 중 가장 높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게리 버틀스는 1980-81 시즌에 25경기에 출장했지만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결국 재정 압박에 시달린 보드진은 1980-81 시즌 막판에 7연승을 거두진 했지만 8위에 그쳤고 트로피를 단 하나도 들지 못한 데다 재정을 악화시킨 책임을 물어 섹스턴을 경질했다.

3.4. 코벤트리 시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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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턴은 1981년 여름 코벤트리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81-82 시즌에 팀을 14위에 안착시켰고 1982-83 시즌엔 팀을 유로파 진출권으로 올리는 데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 15경기에서 단 1승만 거두는 최악의 부진을 맞이했고 코벤트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여 간신히 강등을 모면했다. 시즌이 끝난 후 섹스턴은 경질되었다.

3.5.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U-21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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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턴은 맨유 감독에 재임하는 동안 잉글랜드 U-21 대표팀 감독도 병행했고 맨유에서 해고되고 코벤트리 감독이 된 뒤에도 대표팀 감독 직을 유지했다. 섹스턴은 1982년 UEFA 21세 이하 챔피언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84년에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이러한 공적으로 1984년에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기술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1990년까지 잉글랜드 U-21 대표팀을 이끈 섹스턴은 4년간 휴식을 취하다가 1994년에 다시 U21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6년까지 2년간 유스 선수들을 가르쳤다. 그는 항상 코치들에게 모든 레벨의 유스들에게 태클을 잘하는 방법을 가르칠 것을 주문했고 그들이 수비적으로 안정되게 할 것을 주문했다. 1996년, 섹스턴은 대표팀 감독을 사임했고 축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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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은퇴 후 위릭셔에 거주하면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그가 코벤트리 시티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살았던 집은 훗날 "섹스턴 하우스"로 명명되어 지역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이후 2012년 11월 25일, 섹스턴은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5. 수상

5.1. 선수 시절

1. 루튼 타운

2부리그 준우승 : 1954-55 시즌

2.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3부 리그 우승 : 1957-58 시즌

5.2. 감독 시절

1. 첼시

FA컵 우승 : 1969-70 시즌

UEFA 위너스컵 우승 : 1970-71 시즌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커뮤니티 실드 : 1977년

3. 잉글랜드 U-21 대표팀

UEFA U-21 챔피언쉽 우승 : 1982년, 1984년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 수여 : 2005

[1] 현재는 슬로바키아 리그 소속이다.